그렇게 소리가 어둠에 먹혔다
즐거운 축제날이었다. 안 좋은 예감 따위 조금도 들지 않던…… 그렇지. 짧은 인생 중 손 꼽아 즐거웠던 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때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볼 거 많겠지…. 먹을 것도. 한 바퀴 돌아보려고. 같은 자리 빙빙 안 돌고 잘…….”
“그럼 오늘, 은…… 헤매지 않게.”
체력이 좋지 않은 저는 평소부터 움직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현권, 신인학당에 와서 친해진 아이로, 언제나 구석에서 가만히 있는 제게 먼저 와서 말을 걸어주고 옆에 있어주던 친구였다.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함께 무언가를 그리거나 새기거나, 권이 곁에 있으면서 잔잔히 흘러가는 시간을 좋아했다.
권이와 함께라면 축제도 즐거울 것 같아. 막연하게 내민 손을 아이는 느릿하게 잡아주었지.
“고루고루 다 보고 싶어. 뭐가 있는지.”
“응, 권이가, 보고 싶은 거… 전부, 보고 오자.”
함께 축제를 구경하고 눈에 담은 것들을 추억만이 아니라 작품으로 남기기로 약속했다. 하은이가 제안해준 것처럼 퍼즐로 신서울의 지도를 만들면 어떨까? 즐거운 이야기만 가득한 축제 지도의 퍼즐이야. 친구들이 해주는 즐거웠던 이야기를 듣고, 퍼즐에 새겨서, 오래도록 기록할 거야.
───또 잊지 않도록.
그렇지. 어쩌면 그런 고집이 담긴 약속이었다.
손을 잡고 학당을 나와서, 넓은 서울의 마을들을 뱅뱅 돌았다. 친구의 집이 있는 곳, 제 집이 있는 곳, 아이들이 잔뜩 모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 서울이 이렇게 넓었나? 하는 감상과 동시에 서울이 이렇게 좁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온 종일 걸어 다니면서 새삼스럽게 제가 자랐다는 실감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들뜬 나머지 체력이 바닥나버렸다. 부끄럽게도, 제 손을 잡은 친구는 아직 쌩쌩해 보이는데 저만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친구에게 말하기가 쑥스러워서 너는 더 있다 오라고 말하고 혼자 학당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와서야 후회했다. 거기서 그렇게 돌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권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함께 나온 것이었는데 제가 혼자 돌아와 버려서야……. 하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덕분에, 【그런 모습】을 그 아이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 아, 보러 가야 하는데. 멍하니 의식이 깜빡거렸지. 그러다 문득 눈을 떴을 때,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나치게 어둡다는 것도.
깨닫자마자 몸이 뻣뻣이 굳었다. 입을 여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새하얗게 질려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버지가, 그림자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라, 이 그림자는……?
“단이야…………?”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단아, 백단, 내 여우. 자작나무 빛깔의 털을 가진 여우야.
“……안녕하십니까, 신님”
목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 늑대, 여우, 그림자. 머릿속이 어지러워. 약속……, 약속은, 단이야?
“……응, ……무슨, 일?”
“작은 신님께 결례를 끼치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작은 신님은 큰 신님들의 뜻에 따라 제가 처분해야 합니다.”
“………….”
여우의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저 몸을 떨었다. 여우가 약속을 어겼어. 그런 원망은 들지 않았다. 놀라지도 않았다. 늘, 머릿속으로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곧 내 차례가 올 거야.》 |
미안해. ……약속, 했는데. 모두와 같이, 어른…… 되기로. 나는 아마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참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퐁퐁 떨어진다. 고개를 좌우로 젓자 두 개의 방울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아,ㄴ 돼. 단아. ……단아, 안, 안 돼. 나는, ……처, 분, 같은. ……죽으, 면…… 안 되는데. …………약속, 했는데.”
훌쩍거리는 저를 여우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신님께서는 저를 해하지 않으시는군요. 바르고, 현명하며 상냥한 선택입니다. ……저는 신님을 언제든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작은 신님을 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이를 해쳐?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여우의 탓이 아닌걸. 이런 걸 시키는 인간이 나쁜 것이다. 여우에게 무리한 약속을 시킨 자신도 나쁜 인간. 여우에게 피를 묻히는 인간도 나쁜 인간.
각오했던 일이었다. 언젠가 제가 저지른 실수가 제게 돌아오리라고. 때문에 그저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여우의 뒷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 면?”
“작은 신님께서는 서울을 나가더라도 살고 싶으신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무엇이었을까. 부모님의 얼굴? 『 』의 시선? 친구들? 아니, 그것보다도 제 안에 있던 삶의 욕구에 놀랐던 것 같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죽는 건 두려워. 처분되고 싶지 않아. 나는 아직, 살고 싶은걸.
그렇게 여우와 함께 서울을 벗어났다.
제법 긴 걸음이었다. 학당을 벗어나, 서울을 벗어나, 언젠가 수학여행에서 몰래 들어갔던 그 지하의 굴을 걸었다. 하루 종일 신서울 전부를 걸어다니고도 또 긴 걸음을 가야 해서 제법 지쳤던 것 같다.
무거운 다리, 망토 너머로 배는 땀. 지쳐가는 와중에 죽음에 직면했던 공포와 당시의 일을 재현하며 선도위에 올라갔을 때 받은 암시가 서서히 옅어져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렇구나, 우리는 결국 어른들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다 같이 목소리를 죽이고 자기만 알고 있던 비밀을 모두와 공유했던 그 밤. 놀랍고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도 안도했었다. 나만이 아니었어, 라는 안도. 친구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안도. 친구들과 짐을 나눈다는 안도. 동시에 두려워했다.
비밀을 공유하기로 한 선택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다음이 너무 물렀다. 정말로 지키고 싶었다면, 안이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상황을 짐작한 어른들 앞에서 고작 열서너 살의 저희가 방비하기에는 어떤 준비를 해도 안이해 보였을 테지만.
열어선 안 되는 그 상자를 연 죗값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렇다면?
문득, 제 앞을 걷던 여우의 넓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단아. 인간을 처분, 한 여우는…… 어떻게, 돼?”
처분의 대상이었다고는 하나 감히 인간에게 손 댄 여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처분됩니다.”
여우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답을 해주었다. 들려온 답에 한 번 더 눈앞이 캄캄해진 건 저였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천천히 제 입술을 씹었다. 그럼에도 다 담아내지 못하고 흐느낌이 새어나갔다.
“…………, 우, 윽…… 흑. 미, 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단아. 그냥, ……같이, 숨, 으면.”
“제가 보이지 않으면 신님과 도망갔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괜찮습니다. 저 하나쯤은……”
남의 목숨을 빌어 제 목숨을 살렸다. 과연 저에게 그렇게까지 해서 살 가치가 있을까?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지만 자신은…… 도저히 이렇게 해서 살아갈 자신이 들지 않았다. 지독하게 모순되게도.
주어진 이별을 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허둥지둥 머리의 방울 하나만 간신히 여우의 손에 쥐어 주었다.
“…………단아. 이거. …………내가, ……바보 같은, 짓 해버려서………… 나, 때문에 네가……. 너는, 아,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살아갈 자신이 없단 마음이 풍랑에 흔들리는 배처럼 이리저리 출렁거린다. 제 작고 초라한 조각배는 풍랑에 뒤집어질 듯 뒤집히지 않아, 아아 어째서 내 삶은 이렇게도 끈질긴 것일까 하고 한숨을 토했을까.
여우의 큰 손을 움켜쥔 채 더듬더듬 제 부족한 말을 전한다.
“…………나는, 죽, 은 거야. 너랑, 같이. ……같이, 간 거야. ……미안해. 고마, 워.”
나약하고 무력하고 쓸모없는 노아. 처분당해도 가치가 없는 노아.
“마지막까지 친절한 저의 신님. 감사합니다. 꼭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그런 초라한 목숨 값을 빌어준 내 여우야. 너를 위해서라도 살겠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너무 약해서 미안해.
녹색의 방울을 손에 꼭 쥔 채 여우가 멀어진다. 여우가 멀어지는 동안 제 귓가에서는 방울 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렸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콰직.
방울 소리가 멎은 건 새까맣고 깊은 밤이었다. 그림자도 삼켜버린 듯, 그저 까맣기만 한 밤. 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는 까만 밤, 제 방울이 어딘가 먼 곳에서 찌그러진 듯한 기분이 들어 심장이 아릿해졌다.
그렇게 소리가 어둠에 먹혔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