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앉은 밤

001. Fate works in a strange way

천가유 2025. 9. 14. 01:12

For. 이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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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체구가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올려다본 얼굴은 덜 자란 태가 남아 있었는데 성장이 아직 멎지 않은 것 같은 그 몸도 멜로우에겐 거대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거대한 것이 짓눌러 오기 딱 직전이었단 뜻이다. 만약 그대로 눌렀더라면 두말할 것 없이 납작해졌겠지. ‘정말 공 같다.’ 그래, 공이 짜부라지듯이. 잠깐, 공? 무엇이? 아니, 무엇을 말하는지 들을 것도 없었다. 이럴 때만 아니었으면 커튼처럼 덮어오는 머리카락을 죽 잡아당겨 원성을 냈을 텐데 지금 막 중요한 말을 하려는 참이지 않은가. 일단 참는다.

멜로우는 질문했고, 이르한은 답을 해야만 했다. 이 답이 두 사람의 관계에 전환점이 될지도 몰랐다─그야 친구 관계를 무르진 않겠지만─. 소녀는 각오를 다졌다. 올 테면 와보라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버텼다.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네.’ 드디어 그 말을 회수할 때였다. 그랬는데,

『잠깐 잊었던 모양인데— 묻고 싶은 건, 언제나 내가 더 많았다고?』

아연하게 눈을 들자 여지없이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저 치가 오래 버틴다 싶었지. 자기 얘기라곤 도통 해오는 법이 없으며 남에게는 귀찮을 정도로 묻고 다니지만 그래서 잘 듣느냐 하면 청자가 으레 보일 법한 경청과 공감의 자세보다는 어딘지 냉소적인 태도로 저 듣고 싶은 것만 해결되면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이. 변덕과는 달랐다. 그어놓은 선이 선명하여 그 선 바깥의 것은 아무것도 중요치 않아 보였다.

그래 놓고 유독 멜로우에게는 집요하다시피 꼬치꼬치 캐물어 오는 게 있었으니 바로 불행의 저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을 대하는 입장이 서로 달랐던 탓일까. 다 해소하지 못한 질문과 의문은 차곡차곡 쌓였고 서로 지금은 결론 내릴 수 없다는 미온적 매듭만 묶어둔 채로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그 질문이 드디어 풀리는 줄 알았는데──, 또 저의 차례인가. 보기 좋게 선 콧날을 꼬집어 비튼다. “너무 많이의 ‘너’까지도 아직 가지 못했네만, 이 녀석아.” 억울함을 담았다.

방학에는 대체 어딜 가 있는지 왜 편지를 보내면 받는 곳마다 다른지 집에는 잘 들어가는지 가족은 뭐 하는지, 자기 얘기라곤 해주는 법이 없는 그는 때때로 뿌리가 없는 사람 같았다. 아카데미라는 같은 공간에 머물 때는 목격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넓은 세상이 되면 연처럼 날아갔다. ‘계속 친구 해줄 거야?’ 물어본 건 그였으나 ‘이곳을 나가서도 우리 친구인가?’ 묻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란 뜻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두드리면 열릴 것이오, 물어보면 답해주는 게 마농의 인지상정이었다. 웅크렸던 몸을 펴 뒤로 기울이며 멜로우는 제 것보다 밝은 선명한 빛의 눈동자를 마주 응시했다.

“이다음엔 다시 자네 차례라는 걸 잊지 말게.”

⋅

⋅

⋅

──그래, 어디 무슨 이야기부터 해볼까. 좀 이상해도 괜찮다는 것?

그야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는 빈말은 않겠다. 상대가 그가 아니었더라면 누굴 놀리기 위한 말이냐며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난 4년을 지켜본 그는 타인의 고통이나 불행을 조롱거리 삼는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불행의 저주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본성이 악이란 말인가.】

검증할 길이 없던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제 안다. 불행의 저주란 틀림없이 실재하고 지금도 전염되고 있다. 저주가 인간을 불행케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 본성이 악이 아니라는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저주가 아니어도 사람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저주가 있어 더욱 사람들은 불행에 빠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불행이란 필연일까.

이럴 때 우리가 타인의 불행에 분노하고 연민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선의가 악의를 억누를 수 있다면 말할 것 없이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하여 그의 말에 일부 동의하였으나,

“‘보통’은 그것을 두고 기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그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말은 그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처럼 들렸다. 다시 한번 일련의 일들을 자신의 선 바깥으로 만들었다. 아니, 반대일까. 세계라는 선 바깥에 서 있는 것은 그, 선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건 우리.

너는 왜 이 안에 없을까.

분노하고 연민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빛낼 등불이 왜 네 손에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어느덧 꾸며내던 말투를 잊고 멜로우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조금 이상해. 하지만 싫은 건 아냐. 단지 궁금해. 너는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그건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야, 그렇지? 성이 풀릴 때까지 쫓아가 질문하는 일.

“왜 내게 이것을 묻고 답이 듣고 싶었을까. 기대한 만큼의 답을 주었을까?”

네가 나를 믿고 질문해온 만큼 나도 너를 믿고 답해주고 싶은데 만족할만한 답이 되었을지 모르겠어. 한 마디를 답하느라 열 마디 깊은 생각에 잠겼던 소녀는 이윽고 시선 마주하며 웃었다.

“그래도 내게 너의 진실을 이야기하러 와줘서 고마워, 이안.”

 


자캐가 남의 이름을 부르고 다니는 편이 아니었는데 로그에서 처음으로 이 친구의 지칭이 나와서 고민했던 기억이 나네요.

친구에게 먼저 이상한(+++++) 로그를 받고 아 이거 진짜 잘 답해주고 싶다 고민했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