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파이를 먹었다.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빼빼로도 먹었지. 또 뭘 먹었더라? 아무튼 많이 먹었다. 디저트만 먹은 것도 아니다. 세 끼 식사도 충실히 했다. 요즘 세이라의 취미는 요리였고, 가정식 외에도 여러 가지 메뉴에 곧잘 도전했다. 1인분보다 2인분을 만드는 쪽이 편했다. 좋았다.
결과는 당연했다.
“살쪘어.”
머리 위로 덤벨이라도 떨어진 듯, 충격 받은 얼굴로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친구의 발언에 세이라는 으슬으슬 추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가요? 으음…, 잘 모르겠는데. 그보다 이노리 군, 지금 몇 시라도 생각하는 거예요. 원체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생활을 하는 편이라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다.
하품을 하자 흰 입김이 샌다. 어느새 새벽 공기가 찼다. 잠옷 위에 카디건 한 겹,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세이라는 현관 앞에 선 이노리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래서요?”
“세이라, 같이 조깅하자.”
그래. 그가 현관 앞에 선 순간부터 어쩌면, 하고 예감이 들긴 했다. 어디로 보나 훌륭하게도 운동하러 나갈 복장이었는걸. 간편한 운동복에 편해 보이는 조깅화, 심지어 새 것 같다. 이럴 때의 행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노리는 태연하게 가방에서 그녀 몫의 신발도 꺼냈다. 세이라 발 사이즈 이거 맞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에~, 싫어요. 남에게 싫단 말 한 번 못하는 세이라에게 싫다는 말을 이토록 자주 듣는 것도 그의 재주 중 하나다. 싫긴 왜 싫어. 너도 운동해야지. 그만큼 듣는 쪽도 익숙해진 덕에 효과는 미미했다. 그치만 저는 살 안 쪘는데.
“에엑, 그럴 리가. 같이 먹었잖아…!?”
노란 눈에 억울함이 짙어진다. 믿기지 않는단 표정에 세이라는 스을쩍 눈을 피했다. 체질이라면 체질이고 입이 짧은 탓도 있을 것이다. 분명 둘이 같이 먹었지만 들어가는 양은 달랐으니까.
“아무튼 너도 와야 해. 네가 주는 대로 먹다 보니까 이렇게 됐잖아. 책임져.”
포기인지 납득인지, 태세 전환은 빨랐다. 혼자서 뛰기 심심하단 말야. 어차피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혼자 보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는 수 없이 세이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원체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 보니 운동하기 좋은 옷을 찾는 데만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건 아마 유이의 옷인가? 사이즈가 비슷하니 다행이지. 옷을 입고 머리를 높이 묶고 그가 준 조깅화를 신고 함께 집 앞 공원까지 나갔다. 그녀도 종종 산책하러 나가곤 했지만, 운동 하러 모인 새벽 사람들을 보기란 처음이었다. 제법 북적이네.
“이노리 군은 운동 잘 하나요?”
시작은 준비운동부터. 손목 발목을 풀어주고 다리에 시동을 건다. 이노리의 동작을 곁눈질로 따라 하며 세이라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 물었다.
“에~. 잘 한다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보통은 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가벼운 겸양에 가까웠다. 기실, 그의 기준에서 그 자신은 운동을 대단히 잘하거나 꾸준히 한 것도 아니었으니 틀린 답도 아니었다.
다만 세이라의 기준과는 한참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헉…, 헉…. 이, 이노리 군. 스톱.”
“……? 뭘 했다고 벌써 그래.”
“저…, 더, 더는 못 뛰겠어요.”
시작한지 몇 분만에 나온 기브 업 표시였는지는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기술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쳐다보아도 이미 호흡 곤란이라도 온 듯 그녀는 죽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문화 충격을 겪으며 이노리는 근처의 벤치로 세이라를 인도했다. 손에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코코아가 있었다.
“너 정말 터무니 없구나.”
“시, 실, 례예요. 이노리, 군.”
이 정도도 못 뛰면 어떻게 걸어 다니는 거야. 그래서 대중교통이란 게 있잖아요. 그리고, 걷는 것과 뛰는 건 다른걸요. 지금 건 뛴 것도 아닌데. 대화가 이어질수록 두 사람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골이 깊어졌다. 코코아 캔을 손에 쥔 채 세이라가 웃, 하고 이노리를 째려보았다. 이노리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나 뛰고 올 동안 보기라도 해줘. 어디 가면 안 돼.”
“네-에. 다녀오세요, 이노리 군.”
그 날 이노리는 1시간을 뛰고도 팔팔했고 세이라는 그를 다시 보았다.
다음 날 세이라는 감기에 걸렸다. 이노리는 한 번 더 이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세이라는 학원에 있을 때도 자주 감기에 걸렸다. 그 당시에는 그게 앨리스를 무리해서 쓴 영향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종합적으로 감기에 잘 걸리는 거였다.
코맹맹이 소리를 내거나 목이 잠겨 필담을 하거나, 그게 꼭 앨리스 탓만은 아니었단 얘기다.
이노리는 조금 반성했다. 다음부터 세이라는 못 부르겠다. 쓸쓸해도 혼자 뛰어야 하나.
“우, 불러주세요. 지켜보는 건 할 수 있다고요.”
“그러다 감기 걸려놓고 무슨 소릴 하는 거람. 안 돼, 안 돼.”
“따뜻하게 입고 가면 된다니깐요. 그 땐 땀 흘린 직후에 추워서.”
그게 어디 땀을 흘릴만한 일이었는지. 이런 데서 또 서로 고집쟁이다. 아직도 미열이 남은 세이라의 이마를 꽁, 하며 이노리는 다 낫고선 말하라고 그 입을 다물게 했다. 자, 일부러 비싼 걸로 사왔으니까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전복죽은 거의 한 솥이었다. 세이라는 자기 세 끼 분량이라고 절대 못 먹는다고 고개를 젓다가 세모눈을 뜨고 지켜보는 이노리 탓에 어쩔 수 없이 반을 비워냈다. 다 먹고 나면 이 다음엔 약을 먹고 한 숨 푹 재워야지.
혼자서는 잼 뚜껑도 못 열고, 운동도 못 하고. 참 못난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정말로 정말로, 혼자 나가지 말고 불러주기예요.”
못나고 고집쟁이인 친구는 눈썹에 부릅 힘을 주고 강조에 강조를 더했다.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조깅화가 신발장에서 가지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