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𝐇𝐄 𝐂𝐔𝐑𝐄 : 존재의 증명

23) 경계 위

천가유 2022. 8. 25. 00:29

2챕 개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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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생각했다. 오늘은 내 차례야. 목숨을 내놓으러 가는 건 아니었다. 리미트를 해제하는 위험성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돌아올 것을, 붙잡아 당겨줄 것을 알고 있었다. 믿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인간임을 포기하는 일이야 그 경계 위에서 늘상 위태롭게 벌이지 않던가.

막상 침식이 치솟기 시작했을 때는 잠시 아차했다. 이것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나 혼자서는 어쩌지 못한다는 무력함과 공포가 삽시간에 발밑에서부터 덮쳤다. 우습게도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를 부유감이 차지했다. 파도에 휩쓸렸다. 정처 없이 떠밀렸다. 나를 휩쓸던 파도란 무수히 많은 목소리, 목소리, 그리고 또 목소리.

이거라면 귀가 멀 만도 하다.

안다는 것은 곧 독이다. 알지 못했더라면 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불분명한 웅얼거림에 지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라리사 소워비는 오드가 바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때문인지 목소리는 유독 잘 들렸다.

하나가 되자. 그럼 슬프지 않을 거야. 무섭지도 않아. 괴롭지 않아.

다정하고 슬픈 목소리, 애틋한 바람. 옭아매는 손과 잡아끄는 힘. 발밑이 새까맸다. 이곳은 물이었다. 경계가 허물어졌다.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휘청인다. 돌아갈 거야. 돌아가려 했는데, 역시 이건 내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이곳에도 바다가 있다고 들었어. 바다가 나를 불러, 잠길 거야. 잠기고 말 거야.

인간의 의지란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나는 이것을 뿌리치지 못해. 혼자서는 뿌리칠 수 없어. 그럴 때에──

혼자서는 꺼내어지지 못할 그곳에서 당겨 올리는 손이 있었다. 건져내려는 손들이 있었다.

그렇게 다시 경계 위를 부유하게 되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몸에 남은 침식률이 지독하고 아찔했다. 과열된 엔진이 식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은 진탕이었고 열이 가시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위화감이란 시야였다. 기묘하게도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것을 후유증이라고 이해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라리사 소워비의 왼눈이란 본디 침식과 가까웠다. 양쪽 다 자색을 띠던 시기가 오히려 색이 다른 시기보다도 짧아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이유도 원리도 알 수 없었지만 감염이 원인이란 것만 막연하게 알았다. 이 탁한 푸름은 독의 증거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 더 침식에 적셔지고 왔을 땐 조금 더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

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의 눈을 기꺼이 미미르의 샘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그 던져진 눈은 샘에서 지혜를 읽고 있을까. 내 두고 온 눈은 그렇다면 게이트에 남아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경계가 위태로웠다. 시야의 한쪽은 물에 잠긴 듯 불분명하게 깜빡이고 다른 한쪽만이 이 세계에 섰다. 걸음이 휘청거렸고 쉽게 좌와 우를 오갔다. 한 번 극점을 찍고 난 후유증은 몸에만 남지 않았다. 마음에도 남아 실감을 주었다. 전보다 더 괴물에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그렇구나, 이건 정말 인간이 아니야. 타협이나 포기가 아닌 선선한 납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를 인간이라 한다면,

네가 나를 인간으로 봐준다면.

네 정의가 곧 나의 정의가 되어 네 앞에서만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겠지.

물에서 숨 쉬는 법을 배우고 왔다. 그 경험은 몸에 남아 언제든 또 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아직은…… 네가 불러주는 경계 위에 있다.


수미상관 같은 구조로 캐치 프레이즈에 맞는 엔딩을 낼 수 있어서 기뻤어요...

후유증 얻게 될 때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총괄계 디엠 두드리고 황급히 애들이 더 물어보기 전에 독백부터 치고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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