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31) 10.20. 꽃과 태산

천가유 2023. 12. 27. 20:44

ㅡ이치이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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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지방에서도 긴 세월을 자랑하는 능가는 가문의 대표가 바뀔 때마다 그 성격은 조금씩 달라질지언정 절대로 변치 않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도화무늬가 새겨진 기와다. 마을에서도 동편, 넘어가면 해안절벽이 나오는 그 언저리에 지어진 으리으리한 기와집은 수리와 보수, 증축을 이어나가면서도 그때마다 쌓아올리는 기와에는 반드시 도화무늬가 들어가도록 하였다.

현재의 도화무늬 기와집은 특히 몇 대 전인가 심어둔 오얏꽃과 복숭아꽃이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어 마을 사람들의 자랑이 되었는데 때문에 능란은 꽃 피는 그 시기를 어린 시절부터 늘 손꼽아기다리곤 했다.

는개마을은 가온시티가 지금처럼 번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화랑지방으로 들어오는 배가 제일 먼저 닿는 곳이었다. 그야 물론, 무역선들도 이왕이면 한 번에 화랑 정가운데까지 뻗을 수 있는 가온의 항구를 더 좋아했지만 먼 길 오다 지칠 것 같으면 한 번쯤 는개로 키를 돌리기도 했다.

는개의 아이들은 그래서 뻘과 배를 익숙하게 보고 자랐다. 바닷물이 방파제까지 치고 들어올 때는 커다란 배가 상자를 몇 개씩이나 싣고 내렸고 쫘아악- 빠져나가면 상자에 미처 담지 못할 보물들이 갯벌 아래 살아 숨을 쉬는 풍경. 늘봄의 아이들이 대나무 수련장에 올라서서 날렵함을 배운다면 는개의 아이들은 발목이 진탕 뻘에 빠지더라도 꾸역꾸역 걸어 나가는 끈기를 학습했다.

그렇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두 아이가 있었다.

히노테, 이 녀석. 아무리 이몸을 좋아해도 말이지이.”

애초에 프라이버시 같은 것이 없는 포켓몬에게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테지. 생각을 하면서도 능란은 나중에 모모에게는 손단속을 잘 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엉망진창으로 열린 서랍들은 자신이 손 댄 흔적을 싹 지운 채 완전범죄처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제법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어디 야한 잡지라도 하나 있을까 해서 몰래 열어보았지만 내용물은 생각보다 더 진중한 것이었다. 어련히 중요한 것들은 금고에 보관했을 테지만 시시껄렁한 옛날 앨범이라도 기대하려던 게 완전히 허탕이다.

방 수색을 포기한 능란은 웬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도 모를 꼬마가 두고 간 상차림으로 갔다. 과연 도련님의 손님이라 그런지 상다리가 휘어지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다. 묘하게 중화가 없는 건 제 배경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이 집안 식단인지, 아무튼 젓가락을 툭 뜯어 잘 썰린 횟감에 와사비부터 발랐다.

네 덕분에 귀한 음식 먹는구만. , 히노테. 너도 어서 먹어.”

마그케인은 출렁거리는 뱃살을 제 몸뚱이로 꾹 누른 채 자신을 위해 따로 차려진 상을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맞춤형의 식사인 모양인데 이참에 능란은 히노테의 기호도 파악해두었다.

이런 음식을 먹을 때는 아~ 역시 이게 있어야 하는데, 이거. 오독오독 회를 씹다 보니 자연히 한 손이 허전하게 흔들린다. 누가 보면 술꾼인 줄 알겠다만 그걸 또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장지문이 부리나케 열리며 조금 전의 아이가 다시 술상도 내오는 것이었다.

어라, 완전히 감시당하는 중인가? 손님 대접이 극진한 건지 허튼짓하지 말라는 견제인지 아무튼 정말 남의 집에서 취할 생각은 없었지만 모처럼 내준 것이니 한 잔 따라 보았다. 맑은 향이 피어오르는 게 그 값어치를 가늠하게 했다. 그럼 딱 한 잔만 마셔볼게, 아이 그래. 내온 성의라는 게 있으니까 한 잔만.

조그만 잔에 홀짝, 목넘김이 아주 매끄럽다. 대통주만 마셔버릇한 능란에게는 산보다는 바다의 것에 가까운 술맛이 신기했다. 해산물이랑 아주 잘 어울리네. 이게 바로 는개식 화이트 와인인가. 한 잔만 마신다고 했지만 이렇게 잘 만든 술을 대접받으면 병을 비워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진정성 있게 하는 말이다. 한 번 꺼낸 술이 도로 병에 들어갈 리도 없고 버려지게 두는 건 마을적 손실이었다.

느긋한 식사를 이어 나가며 능란은 볕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청년의 방을 한 바퀴 더 둘러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참 평탄치 않았는데 정작 집안은 놀라울 정도로 평범했다. 평범할 뿐이었다. 그것이 도리어 기이하지 않은가.

히노테를 따라 사람들의 눈을 피하듯 자꾸만 마을 바깥 산길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미 초입부터 접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던 외떨어진 곳에 으리으리한 대감집이 나왔다. 검은 산을 등진 집은 한여름에도 겨울 같은 냉기를 뿜어낼 것도 같았고 한편으론 화산이 폭발할 듯 위기감을 주었다.

배산임수의 위치는 최적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고립되어 있었다. 이 비옥한 땅 위로 이웃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검고 높은 나무 문의 정체성인 것마냥.

따뜻하고 평범한 대문 너머, 모두가 어린 도련님을 사랑해주는 세계와 배타적인 대문 바깥의 공간. 이곳을 언급한 것만으로 역린이 건드려진 것마냥 으르렁대던 얼굴이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

끝내 그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다. ‘너는 그것으로 되느냐.’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을 물어온 건 네가 아니었나?

모처럼 히노테가 이몸을 여기까지 데려와주었으니까 나도 비밀 얘기 하나만 털어놓기로 할까. 이치이 군의 비밀만 알아버리면 수지에 맞지 않잖아.”

투실투실한 마그케인을 끌어안은 채 능란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후식으로 나온 호지차 푸딩이 아주 고소하고 달았다.

나는 사실 그 녀석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따지자면 제법 좋아하는 편이겠지.”

이 말을 네가 듣는다면 너 같은 여자의 호의는 줘도 안 갖는다.’는 반응이려나. 아니면 또 시답잖은 거짓말이라고 느끼려나. 진심을 받아주지 않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그 녀석, 행동은 거칠지만 본성이 나쁘진 않잖아. 입으로 떠드는 거랑 다르게 남 잘 해줄 줄도 알고-그런데 나한텐 왜 그러는 거냐, 나쁜 녀석-. 무슨 짐을 짊어졌길래 그렇게 아득바득 독고다이처럼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혼자가 아니잖아. 그걸 그 녀석이라고 정말 모르진 않을 거야.

나는 말이지. 그 녀석이 남의 호의를 받아들일 줄 알면 좋겠어. 그리고 남에게 다정하게 구는 경험을 해보면 좋겠어. 다정을 베풀어서 다정이 돌아오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면, 그것 참 좋겠어.”

다른 사람의 바람 같은 건 넣지 않는다니 고집도 그런 고집이 없다. 세상에 남의 바람 하나 없이 서는 게 어디 있다고, 저 길가에 홀연히 자라난 잡초 한 포기조차 비와 바람이 키워내는데. 모를 뿐이다. 이미 너는, 우리는 무수히 많은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나 같은 좌절은 겪지 않는 편이 좋지만 좌절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유연함이 생기면 좋겠어. 도저히 혼자서는 그러지 못하겠는 순간에 그 녀석을 일으켜 세우는 게 누군가의 다정과 누군가의 바람이면 좋겠어.”

지금도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왜 그걸 알면서 몰라.

자기 잘난 줄 아는 성격도 좀 고치면 좋겠고 남을 무시하는 버릇도 고쳤으면 좋겠어. , 하다 보니까 그 녀석 고쳐야 할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런데도 싫어하는 게 아니라니까?

정말로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열받아서 하는 말이야. 으핫.”

포식한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남의 방이란 자각도 없이 뻔뻔하게 바닥에 드러누웠다. 품에 안은 마그케인이 따뜻했다. 불꽃 타입 포켓몬 딱 한 마리만 만나고 싶다고 그렇게 빌었는데 이상하게 아직까지 인연이 없더라. 네가 내 인연이라 그런가? 너랑은 이렇게 쉽게 친구가 되었는데 그 녀석이랑은 참 쉽지 않더라.

이런저런 걸 다 떠나서 그 녀석이랑 내가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지. 나는 그 녀석을 이해해보고도 싶은데 그 녀석은 절대 날 이해하려 들지 않잖아. 알면 죽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게 이해하려는 노력이긴 한지 모르겠다. 그저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닌가. , 그 꼴이 웃기니까 조금 더 두고 볼까 싶지만.

늘봄의 숙소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전등이 모두 꺼진 컴컴한 주방, 정수기와 전자렌지, 그 몇몇 개가 내는 어슴푸레한 빛과 냉장고의 엔진이 돌아가던 소리. 초가을치곤 실내가 쌀쌀하던 그날, 대나무 향 알싸한 알코올을 남기고 그 녀석은 결국 등을 돌렸던가.

그 녀석에게 친구가 생긴다면 나보단 덜 부딪칠만한 인선이 좋겠다고 객관적으로 생각이 들지만, 고작 나 하나를 가지고 질색팔색하면서 독이 든 접시라도 보는 것처럼 구는 게 웃기니까 역시 친구가 되어줘야겠단 생각이 든 거야.”

아 역시 의도가 좀 불순한가? 아무렴.

다 본인이 자초한 거니까 감내하도록 해, 이치이 군.”

 


날조가 좀 많이 들어간.

이런 식으로 대비시키는 거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