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식기 개인로그
성대한 졸업식이었다. 그도 그렇겠지. 미래의 국가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의 집합이라고 환성이 자자하더랬다. 수석으로 불리운 이름을 듣고 아, 짧은 탄성과 납득을 한 뒤 그 뒤를 따랐다. 언젠가 말한 것처럼 나란했던가. 한 발짝 뒤였던가. 경애를 담아서.
한 명, 한 명, 졸업장을 받는 동안 졸업 노래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담담한 졸업생들과 달리 남겨지는 후배들의 얼굴에 도리어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늘 그랬다. 떠나가는 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자연히 미소를 그리며 비에모드는 생각한다. 나의 미래, 내게 찾아올 시련. 내가 마주하게 될 나의──
제 앞에 놓인 길이 달라진 적은 없었다.
찾아오는 후배의 손에 백합을 한 송이 건넸다. La vare, 인베스의 축복이 당신을 따르길. 언젠가의 축제날과 닮은 풍경이었다. 감사함을 나누기란 어렵지 않다. 인베스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제 것을 나누려니 두 손이 비었다. 나는 무엇을 쥐고 있던가. 그러니 다만 눈 감고 기도한다. 순결을 나타내는 꽃 아래서 삿되고 그릇된 것의 죄 사함을. 우리의 무결함을.
죄 사함을 믿으며 죄 짓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결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신이 아니고서야.
잉크를 채우고 펜을 든다. 할 말이 많지는 않았으나 답해야 할 것이 있었다. 언제부턴가 말수가 줄어갔다. 묻는 말 외에 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맞겠다. 그러나 묻는 이가 많았다. 구하는 이가 많았다. 비에모드는 오늘도 입을 열고 여상히 답했다. 자, 기도합시다.
저라고 방황하고 혼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응당한 감정 속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았다. 건틀렛을 차고 검을 쥐었다. 궤적을 따라 희미한 잔향이 남았다.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 하늘에. 혹은 우리 마음속에.
때때로 떠올린다. 하늘이 아니라 앞을 보던 이들의 얼굴을, 신이 아니라 나를 믿던 이들의 눈을. 많은 것들로 이루어진─이를 테면 사사로운 욕망이나 반짝이는 꿈이나 영롱한 감정이나─생생한 목소리를. 그들의 채워진 것을 보며 더듬던 손아래로 무엇이 집혔던가.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유수와 같이 빨랐다.
해가 지나고 달이 지난다. 고향에 새하얀 라벤더가 피었다. 여기도 저기도 온통, 흰 빛이 가득했다. 이곳이 꼭 지상에 도래한 낙원인 것만 같았다. 아름다웠다. 성령이 눈물 흘린 날이라. 가히 부족함이 없는 표현이었다. 모처럼 휴가를 받아 방문한 고향을 거닐며 비에모드는 꽃의 머리들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질식할 것만 같은 향이었다. 잠겨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 하지만 지금 죽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돌아가야 했다.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대신에 오늘도 허락된 침묵을.
누군가는 악몽을 꾼다던가. 피로 물든 손의 환상을 본다고도 했다. 비탄에 잠긴 목소리, 혈향. 발목을 붙잡는 억센 손, 구원받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고해성사를 해오는 이들을 달래고 그 손에 손을 겹쳐 기도했다. 씻어낼까요. 그리고는 깨닫고 마는 것이었다. 저는 겪은 바 없는 일들이었다.
기도한 적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대신에 오늘도 눈 감은 침묵을. 라벤더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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