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피르 F. 렌하르트
어째서 누군가는 부족함 없는 삶이라 칭하는 우물 안에 갇혀 있는지, 누군가는 가진 것 없는 삶 속에서 갈증에 허덕이는지, 내 심장이 이끄는 방향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운지, 바라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지.
어찌할 수 없이 타고나길 다르고 주어진 것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다. 성격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며 지극히 사소하게는 좋아하는 과목이 다르고 기상시간이 다르고 나이도 다르겠지.
우리는 이토록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함께 가는 길을 바란다.
「기사단에서 또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또 다른 운명에 바랄 일이나.
다름 가운데 우연처럼, 또 운명처럼 아카데미에서 만나 한 페이지에 도장을 다 채우도록 시간을 나누었다. 네가 수업을 듣도록 강의 내용을 고르고 골라, 흥미를 갖도록 고양이 도장을 파내기도 하고, 제 수업시간도 어려워하는 대련에 어울리거나, 서로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혀주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럼에도 그 시간들이 뜻 깊었다. 제법 웃었고 웃는 너를 보았다. 너와 어울리는 동안 네게 배운 값진 것들이 많다. 너는 나를 선배이자 스승이라 칭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 너와 있는 동안에는 네 심장박동이 마치 내 고동인양, 잠시 뜨거워지는 날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축제의 강을 따라 붉게, 노랗게 타오르고 흘러간다.
네게 마지막 도장을 찍어준다. 완성된 도장표의 종이를 포장지 삼아 은색의 나이프를 감쌌다. 자색의 보석이 박힌 그것은 다른 사람과 칼을 부딪치기엔 아주 얇고 조그마한 것이었다. 그 위를 다시 하얀 리본으로 감쌌다.
“이건?”
“페이퍼 나이프예요. 졸업한 뒤에도 선배가 그리울 당신을 위해, 편지라도 보내줄까 하고.”
이건 그 때에 편지 봉투를 예쁘게 개봉하는 용도. 물론 네가 바란다면 보다 날카로운 역할로도 쓸 수야 있겠지. 이 날이 종이를 가를지 살을 가를지는 주인인 네 손에 달릴 것이다. 보라색을 좋아하느냐 하면 여전히 그 답은 보류할 수밖에 없으나 만일 네게 기억된다면, 이것을.
이 정도면 기념이 될 만 할까? 주문이 많은 후배에게 보내는 선배의 마지막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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