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움을 안겨주는 제자에게.
라 바르. 주신의 크신 은혜가 이 편지와 함께 당신에게 깃들길.
당신이 먼저 편지를 보내다니 조금 놀랐답니다.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기다렸나요? 선물이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도록 자주 보내주어야 할 텐데 바뀐 환경이 생각 이상으로 바쁘더군요. 그래도 잘 지낸답니다. 걱정보다 훨씬.
졸업식이 있은지도 오래지 않았는데 어쩐지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기분이네요. 그 사이 최고 학년이 되었겠군요. 후배들에게 상냥하고 멋진 멘토가 되어주고 있겠죠. 그렇다고 당신이 하던 것처럼, 아카데미의 규칙을 벗어나 마음 이끄는 대로 다니게 하진 말고요.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엔 축제도 끝났겠어요. 올해 축제는 보러 가지도 못했는데, 제 몫까지 봐주었길 바라요. 음. (잉크가 유독 고여 있다. 다음 문장을 쓰길 머뭇거린 듯.) ……올해도 보오 님 인형이 상품으로 나왔던가요?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지만 아카데미의 교수님들을 두고 그 호칭은 역시 어울리지 않네요. 다음에 답장 줄 때는 새로운 호칭을 고민해주세요.
4994.05.XX.
선배, 멘토, 스승, 그 다음을 기대하며.
크피르 F. 렌하르트 씨에게. 친애를 담아.
그 긴 호칭을 귀로 듣지 못해서 얼마나 유감인지 모르겠어요. 당신과 재회하는 날까지 호칭을 정하지 않은 채 두고 직접 들어볼까 고민했답니다. 편지의 답이 늦어진 건 그 때문이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정말 바쁘거든요.
사실 바쁘단 건 핑계일지도 몰라요. 그렇게까지 바쁠 것도 없지만, 내키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선 마음이 바빠질 수밖에 없네요. 제 수업을 빼먹고 부산스럽게 도망가던 당신의 기분이 이랬을까 이제야 생각한답니다. 수업은 잘 듣고 있나요?
호칭 하나로 이렇게 고민하다니 종종 귀여운 면이 있어요, 렌하르트. 저는 선배 멘토 스승 사부 사형 은사 님이라고 그대로 불려도 좋은데, 역시 그대로 둘까? 어차피 내년이면 다시 제 후배가 되지 않겠나요. 예비 기사님. 지난날에 제게 큰소리 친 만큼 멋지게 나타나주길 기대할게요.
당신의 3루페는 고양이 먹이이자 인베스를 향한 감사헌금으로 귀하게 쓰겠답니다.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었죠? 향수를 동봉한답니다. 성년이 머지않은 당신에게 인베스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4994.07.XX.
비에모드 라반둘라 씨가.
키어런 올브리히 귀하.
안녕하세요, 올브리히.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엔 올해의 축제도 끝나고 어느덧 봄의 끝자락이겠군요. 잘 지내고 있나요? 당신이야 언제나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졸업하기 전까지 당신이 궁금해 한 만큼 저를 알려주지 못한 것만 같아서, 펜을 들었답니다.
잘 아는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저는 비에모드 라반둘라. 라반둘라 후작의 장자, 비에모드라는 이름에는 풍요로운 생명이란 의미가 담겼답니다. 당신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들어보지 못했군요.
한 번도 누군가의 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어쩌다 보니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위치가 그렇더군요. 위에 서야만 했어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행했죠. 당신은 높은 곳에 올라서 화려한 사람들이 부럽다고 했지만 저는 종종 피로감을 느꼈어요. 산의 형태를 그려본 적이 있나요? 위로 갈수록 뾰족하고 좁고, 아래는 넓고 무겁죠. 위에 선 자는 역으로 제 아래 있는 이들의 무게까지 책임져야만 해요.
당신의 위엔 누군가 ‘주인’이 있을 테죠. 하지만 당신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은 위로 올라갈수록 적고 당신이 명령해야 할 사람은 강바닥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아질 거랍니다. 강바닥의 많고 많은 모래알 중 하나일 때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지만 그 모래알을 하나하나 살피고 골라내야 하는 위치가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럼에도 당신의 시선은 올라가고 싶은 곳을 또렷이 향하고 있어요. 목표가 분명해서 멋지다고 생각한답니다. 부럽기도 해요.
적다 보니 또 당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네요. 제 얘길 적는 일은 익숙지 않아서요. 하나 더 제 이야기를 하자면…… 졸업식은 잘 지켜봤나요? 후배의 상승을 응원해줄 마음이었는데 또 한 걸음 당신보다 위로 향하고 말았네요. 그래도 올브리히가 저보다 높은 곳으로 오르게 될지, 아니면 그 때처럼 여전히 저를 올려다볼지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이만 줄입니다. 다시 봄이 찾아올 적에 기사단에서 만나요.
4944.05.XX. 한 계단 오른 곳에서
비에모드 라반둘라 드림.
3월, 가장 무르익은 오렌지의 무게처럼 사랑스러운 후배에게.
안녕하세요, 오웬. 후배의 안부도 먼저 묻지 못하는 박정한 졸업생을 찾아주어 고마워요.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서야 아카데미를 졸업한지도 1년이 지났음을 상기했답니다. 제 시간은 졸업 후에도 몇 발짝 나아가지 않은 듯 한데 당신의 시간은 훌쩍 앞을 달리고 있군요. 그것만으로도 오웬은 자랑스러운 저의 후배예요.
시험 소식도 기쁘게 들었답니다. 제 가르침이 당신에게 남아 있다니 기쁜 일이에요. 편지 너머의 당신은 벌써 의젓한 선배인 것만 같아서 나중에 재회하게 된다면 얼굴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오웬은 아직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의 후배는 작년의 당신이 저를 보듯, 분명 오웬을 우러러보고 있을 거랍니다. 라 바르, 당신의 미래는 앞으로도 찬란하리니.
선물도 잘 먹었답니다. 당신이 만드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오웬은 매사에 즐거운 얼굴을 하니 분명 빵을 굽는 동안에도 즐겁게 웃고 있었겠죠. 덕분에 제 표정도 온화해졌다지 않겠어요.
알고 있나요? 스케마의 오렌지 농가에서는 3-4월이 가장 무르익은 수확기라 한답니다. 잘 익은 오렌지를 손바닥으로 받쳐보면 안쪽으로 단 과즙이 꽉 차 묵직하고 탐스러워요. 그 복된 무게를 당신에게서 떠올렸어요.
글을 적다 보니 저 또한 당신이 그리워지는군요. 학기를 마치고 여유가 된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당신이 보내준 선물의 답례를 하고 싶답니다.
오렌지의 무게를 그리며,
비에모드 라반둘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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