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누그러진 반응이 돌아왔다. 대신에 들려온 건 어렴풋하던 중얼거림. 혹시 연구 때려 치라고 하면 어쩌지? 묶어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걸 보면 그러진 않을 텐데. 혼자 걱정하며 신랄한 말이 돌아올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조마조마하게 내려간다.
“새로 만든 연고네. 조금은 더 빠르게 들었으면 좋겠군.”
그렇게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그악스러운 손아귀가 제 팔을 꽉 붙잡아 당겼다. 으어어, 불시에 균형을 잃고 이끌려가자 상처 난 곳 위로 뻑뻑한 연고가 발린다. 이왕 해줄 거면 좀 살살 해주지. 말해도 소용없을 걸 아는 투덜거림과 함께 억센 손에 연고가 발리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며 재잘거렸다. 이번 건 무슨 성분이 들어갔어? 이거 바르면 상처가 금방 나아? 어차피 들어도 별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알아두어서 나쁠 건 없겠다고 떠들며 고개를 들자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눈이 평소와 조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대로 한 입에 꿀꺽 먹혀버릴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고드름이 녹은 듯 온화한 것 같기도 하고.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는 엑~? 저 사람이? 싶은 기분이지만 제가 느끼기에 이 이상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시골쥐.”
나 시골쥐로 완전히 정착해버린 거야? 차라리 사막쥐면 모르겠는데 시골쥐는 어딘지 촌스럽잖아. 이상한 시선에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딴생각을 하다가 새겨두라는 그의 말에 다시 집중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말했지, 자네는 내게 도움이 된다고. 나는 그 사실만으로 자네가 내게 하는 모든 언짢은 언동이나 잘못을 모두 용서할 수 있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자네가 그럴 수 있을 때 실컷 귀찮게 굴도록 하게. 이곳에서 그나마 자네가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나란 것을 잘 알아. 손을 뻗었을 때 확실하게 답이 돌아오는 자에게 실컷 매달리란 말일세. 인간사엔 역지사지라던데, 자네의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편이 합리적이거든.”
군 생각 말고 실컷 이기적으로 굴라고. 덧붙여진 뒷말과 함께 그는 저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그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다. 손바닥과 그의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챠콜은 눈살을 찌푸렸다. 실컷 매달리라고?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가 놀리는 건 아닐까,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았다.
“자. 어서 날 걱정시키겠다고, 신경 쓰게 하겠다고 대답하게.”
이어서 들려온 말은 한 술 더 떴다. 굳이 비유하자면 메마른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우박에 챠콜은 머리를 가릴 새도 없었다. 뒤통수가 얼얼하고, 동공은 크게 열려 닫을 줄 모르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또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를 잘 안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못하지만 그가 이런 걸로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이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지도 단편적으로나마 들었다. 키워준다고 했던가. 제 안의 열매가 무르익도록, 그의 취향에 맞게 말이다.
만약 그의 손을 잡는다면, 그건 아주 편한 길이 될 것이다. 어리광을 부리고, 매달리고, 그의 손을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마냥 간절히 붙잡은 채, 어쩌면 좁은 울타리 안에 한 뼘 정도 제 자리가 생길지도 모르지. 그는 그 자신의 위치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챠콜이 그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도.
눈앞에서, 해로울 것 없다는 양 내보인 손바닥이 굉장히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챠콜은 간단히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마디가 도드라진 검은 손바닥 위로 햇볕에 타 구릿빛이던 흉터투성이의 손이 겹친다.
「난 널 두고 갈 거다, 에슬리.」
「그 땐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어야 한다.」
환상을 두들겨 깨워주는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현실로 돌아와 파드득, 겁을 먹은 들쥐처럼 몸을 말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까만 눈동자가 낯선 상대라도 보듯 경계심을 갖고 껌벅인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이거 새로운 화내는 방법이야?? 당신 그런 거 엄청나게 귀찮아 할 것처럼 생겨서, 아, 안 어울리는 말이라고!”
눈앞에 내밀어진 손은 꼭 신화 속 붉은 과실처럼 달콤해보였지만, 때문에 챠콜은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