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아침도 에슬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을 돌아보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가시지 않는 산은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에슬리에게 마냥 신기한 공간이었다. 근 10년을 사막에서만 보낸 그녀에게 계절이 달라져도 눈이 사라지지 않는 땅이란 아무리 둘러봐도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곤 했다.
이날 에슬리의 눈을 사로잡은 건 절벽의 조금 튀어나온 모서리 부근에 피어 있던 꽃이었다. 바위에 둘러싸인 그 작은 공간에서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에 1차로 놀랐고 그 꽃이 희귀한 장미임에 2차로 놀랐다. 이곳은 마법사가 많은 도시니까 어떤 호기심 많은 마법사가 눈 속에서도 틔울 수 있는 꽃씨를 뿌리고 간 것일지도 모르지. 경위가 무엇이든 중요한 건 에슬리의 눈에 흔히 볼 수 없는 꽃이 보였다는 것이다.
가져가야지. 어딘가의 누군가는 이런 험한 자연 속에서 꿋꿋이 피어있는 꽃을 꺾는다고 책망을 할지도 모르지만, 지극히 그녀의 관점에서 어차피 나중 가면 시들 꽃이라면 지금 꺾어서 아카데미의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거기서 발밑이 무너진 건 꽃의 복수였을지도 모른다. 좀 더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꽃을 뽑으면서 뿌리를 건드려 지반이 무너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와앗."
꽃을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등 뒤의 검을 뽑아 바닥을 딛든 낙법을 하든 가능했을 테지만 섣불리 굴다가 꽃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그녀를 주저하게 했고, 그 잠깐의 주저가 결국 무릎 하나를 희생하게 만들고 말았다.
윽, 하고 눈살을 찌푸린다. 통각에 둔한 편인 그녀에게 지잉하고 울릴 정도의 충격과 통증을 안겨주다니. 큰일 났네, 그런 생각부터 머리를 스치며 무릎을 들자 살이 패여 피가 울컥울컥하고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내가 멍청했어. 반성을 하며 흰 천을 부욱 찢은 에슬리는 지혈이 되도록 무릎을 단단히 묶고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치료해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건 레탈라였다. 맞아, 레타는 치유술을 잘했던 것 같아. 반짝하고 떠올린 에슬리는 그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내밀었다. 이거 치료해줄 수 있어? 조금 뻔뻔할 정도의 치료 요구에도 그는 도리어 심각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앉히고 치료에 임해주었다. 적당히 피가 멎을 정도만 바랐던 에슬리는 다 고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란 그의 말에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나 마법이 잘 안 통해서, 다 하려면 힘들 텐데.”
“환자를 그냥 보내기엔 양심도 찔리고, 자존심도 건들여지니까요.”
고집스러운 얼굴이었다. 자존심이라고 말하면 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에슬리는 어색하게 푸른빛에 감싸여 아물어가는 제 무릎을 응시했다.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하세요.」신기하게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통증이 밀려들었다. 아파도 괜찮은 거구나, 그렇게 깨달았다는 듯이.
그의 치유술의 기반은 기도라고 하던가. 누군가 자신을 기도해준다는 것도 굉장히 생소한 일이었다. 걱정을 받는 것도. 멋쩍은 표정을 하는 그녀를 두고 레탈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친구라고 함은 서로 걱정하는 법이잖아요?」그런 말도 들려주었다.
친구인가. 나중에, 나중 가서도 그가 똑같은 말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습관처럼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고는 함박웃음을 지어보인다.
“고마워, 레타!”
아, 맞아 이거. 치료를 마치고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의 손에 오늘의 수고를 일으키며 꺾어온 장미를 쥐어주었다.
“레타가 생각나서 가져왔어. 선물이야.”
새하얀 눈더미 사이에서 꼭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고운 빛깔을 하고 피어있던 꽃이다. 붉은 꽃이었더라면 훨씬 더 눈에 잘 띄었겠지만 어쩌면 스쳐지나가기 좋은 색이어서 이제까지 버텼던 것일지도 모르지. 가녀린 빛이지만 엘버의 추위도 견뎌낸 강한 꽃이니까 당신에게 분명 잘 어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