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부터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새하얀 인영에 클로이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그리핀도르의 1학년은 이곳에서 수업할 일이 없을 텐데. 어째서인지 꿰어버리고 만 타 기숙사, 타 학년의 시간표를 떠올리며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작은 사자의 레이더에 잡히고 만 모양이다. 이쪽을 향해 용맹스럽게 달려오는 걸음걸이에 소녀는 체념하고 품에 안은 책을 슬그머니 눈 아래까지 들어올렸다.
“슬리데린~!”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래서, 곤란해. 이목이 집중되는 일은 그녀가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였다. 가뜩이나 움츠린 어깨를 더 좁히고 슬금슬금 벽으로 붙으며 클로이는 다가온 인영에게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숙녀답지 못해요, 작은 사자. 그리고 이곳은, 나 외에도 전부 슬리데린이고……”
“그럼 클로이! 오늘에야말로 눈 보고 대화할 거야. 그러려고 왔어.”
그러나 제 불만은 오늘도 가볍게 날아가 버리고 만다. 변함없이 똑바로, 곧게 향해오는 한 쌍의 붉은 빛에 클로이는 반사적으로 눈을 피한다. 흐읍, 하고 들리는 소리에서 아…, 굳이 보지 않아도 저보다 작은 아이가 또 볼을 풍선처럼 부풀렸으리란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 조금 웃어버릴 것 같네. 여기서 웃었다간 저 아이의 불만에 부채질만 하겠지만. 웃음을 참는 대신 낮은 한숨을 뱉으며 클로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온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었는데 네가 보여서……──또 눈 피하고 있지!”
쿵,
이라는 건 실제로 난 소리는 아니다. 말하자면 당하는 클로이의 마음의 소리. 호그와트의 벽은 충격흡수기능이라도 있는지 클레멘트가 발차기를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꿈쩍하는 건 오로지 클로이의 마음과,
“치마 올라가요, 작은 사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치마 말고 날 봐!”
“…….”
저 멀리서부터 이마를 짚으며 달려오는 앨피어스 정도일까.
싫어요. 라고 말해버리고 싶다는 심술이 불쑥 솟는다. 싫다고 하면 눈앞의 저보다 작은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와는 퍽 다르게 언제나 다채로운 빛깔로 표정을 바꾸는 상대가 조금 부러운 듯, 혹은 신기한 듯. 어쩌면 아예 숨어버릴 수 있음에도 꼬리가 밟힐 만큼의 틈을 내놓는 건 그 때문에.
물론 이런 생각을 드러내진 않는다. 능숙하게 속내를 삼키며 클로이는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치맛자락 대신 상대의 망토를 당겨 다리를 가려주었다. 그래도 저번까지는 손으로 밀어붙였는데……. 슬슬 손바닥 갖고는 박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버린 걸까.
그렇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손을 뻗어 벽에 쿵 밀어붙이는 작은 사자는 클로이를 꽤나 동요하게 만들었다. 로맨스 소설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지만 저지른 사람은 저보다 한 뼘쯤 작은 옆 기숙사의 후배로, 덕분에 제 턱 바로 아래에서부터 쏘아져오는 눈동자를 어디로도 피할 수 없어 주저앉을 뻔했다─그 때도 앨피어스가 나타나 구해주었지─그 점에서 지금처럼 다리로 벽을 칠 경우 클레멘트의 종아리만큼의 폭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조금 안심이지만, 역시 숙녀답지 못해.
“아직 눈 마주칠 기분이 안 들어?”
“……작은 사자도, 끈질기네요.”
“졸업하기 전까지 제대로 눈 보고 얘기하기가 목표라고 했는걸.”
앞으로 3년 더 버텨야 하는 건가. 저보다 작고 어린 상대를 대하는 건 난처한 일이다. 또래 중에서도 왜소한 편인 그녀는 이제껏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는 그녀에게 굳이 말을 걸어오는 건 겉도는 후배를 내버려두지 못하는 상냥한 선배들 정도로, 저보다 어린 아이들과는 접점조차 없는 경우가 많으니 당연 저보다 작은 아이를 상대할 일도 없었지.
그런데 이 아이는 어째서인지 같은 기숙사도 아니면서 끈질기게 저를 쫓아와, 쫓아오는 것도 모자라 대화를 청해, 대화를 청하는 것도 모자라 눈을 맞추자고 말해온다. ───곤란하게도.
아래에서부터 향해오는 시선은 꼭 창과 같아 피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불편하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자꾸만 저를 쿡쿡 찌르려는 것 같아, 도망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이러는 거 싫어?”
다시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그것만으로 아이의 표정은 꽃이 피어나듯 활짝 개어 그럼 됐어! 하고 기운차게 말해주었다. 제 태도로 인해 상처 받진 않을까, 소녀가 걱정하던 게 무색할 만큼.
작은 사자, 작지만 활활 타오르는, 용기 있는 그리핀도르의 아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어느새 뒷목을 잡아당기는 앨피어스에게 붙잡혀 가면서도 끝까지 턱을 치켜든 채 내뱉는 아이를 보고 클로이는 작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요. 내일은 또 어떻게 올지, 나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는 사자에게까지 닿지 않았지만 누그러진 표정만큼은 아무래도 닿은 듯, 기쁨에 차 붕붕거리는 손을 보았다.
《번외》
“……작은 사자.”
“언제까지 작은 사자라고 부를 거야?”
“그럼 큰 사자라고 불러줘야 할까요. 그보다 당신이야말로 그만, 평범하게 상대를 부르는 법을 익히는 건 어떨까요. 숙……”
“또 숙녀답지 못하단 말 하려고?”
그 말은 이제 지겨워. 라고 입술을 비죽거리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몰라보게 자라 성숙해진─클로이보다도 키가 자라버린─덕에 똑같은 행동을 보여도 귀엽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보다는 아름답고 늠름하게 자랐다는 표현이 어울릴까.
……너무 자란 것도 같지만. 누가 이렇게 키를 키워버린 걸까요.
설마 지나가던 길에 다짜고짜 잡아서는 벽으로 밀어붙이며 인사를 해올 줄은 몰랐다. 그리핀도르의 인사는 이런 식인가요? 하고 묻자 뱀은 이렇게 잡지 않으면 도망가 버리니까. 능청스럽게 답하던 모습을 보며 사자로 자란 건지 뱀으로 자란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도망가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좀 알아주면 좋을 텐데.
그래도 그녀의 키가 저를 추월해서 생긴 딱 하나의 이점이라면 쏘아오는 시선에서 고개를 내리는 것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단 점이었다. ──점이었을 터였다.
“작은, ……폰드.”
“응?”
이름으로 불러줘도 괜찮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가락이 제 턱을 아프지 않게 잡고는 올린다. 작은 사자에게 이런 걸 가르쳐준 선배는 대체 누구일까. 루비처럼 반짝거리는 시선과 맞닥트리지 않기 위해 턱에 힘을 주고 눈은 옆으로 돌린다. 제 필사의 노력을 상대는 어딘지 여유롭게 보는 듯 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이제는 계기조차 희미해진 옛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그런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앨피어스 선배. 왜 먼저 졸업해버린 건가요. 아무도 구해주지 않고─구해주긴커녕 관람이나 하던 선배들을 두고─와중에 유일하게 그녀의 방파제가 되어주던 앨피어스마저 졸업한 이후 눈앞의 상대는 고삐 풀린 망아지, 아니 사자처럼 더욱 날뛰고 있었다.
요즘의 후배들은 이런 그녀를 보고 멋지다며 동경어린 눈을 한다지? 말세네요. 부러 비뚤어진 생각을 하자 내 앞에서 다른 생각 하는 거야? 하고 이럴 때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토라진 표정이 불쑥 더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