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가 몰아친 다음 날이었다. 덧대었던 나무판자를 떼어내고 꼭꼭 걸어 잠갔던 창문을 활짝 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간 하늘이 반겨주었다. 후우, 하고 깊이 숨을 들이쉬자 촉촉하고 달콤한 공기가 폐를 감돈다.
“오늘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네.”
아직 이슬방울이 남은 꽃길로 나와 한들한들 걷고 있자니 꽃들도 기분 좋게 웃어주는 듯 했다. 사나웠던 비바람을 견디고 살아남은 아이들에게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 기운을 넘겨받듯 꽃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다가왔다.
“대단하군요. 그저 한없이 여려 보이는데.”
그렇지. 마냥 여리게만 보이는 생명이지만 그래도 살아있다고, 더 살고 싶다고 악착같이 흙을 움켜쥐고 살아남는 생명.
동시에 덧없는 것.
무참히 꺾이고 만 꽃송이를 쥐고 허망해 하는 그에게 그 꽃을 꽂아주자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역시 새까만 것보다는 알록달록한 것이 퍽 좋아 보였다.
꽃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아름답게 피었다가 언젠가는 져버리는 것. 사람의 삶이라고 꽃과 다를까. 아름다운 순간은 짧게 스쳐 지나고 끝은 늘 곁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있는 힘껏 살아가고자 발버둥치고.
“꽃의 죽음이 슬프다면 이 죽음이 가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주어야지요.”
말장난과 같은 말을 가만히 듣던 그가 끝내 꽃을 내게 꽂아준다. 제가 하고 있기는 역시 쑥스러웠던 걸까. 갸우뚱 그 속내를 살펴보면서도 얌전히 받아두었다. 꽃을 위하여.
얘, 꽃아. 나는 네 죽음을 대신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일까?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여보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글쎄, 나는 발버둥 치고 있을까. 이 삶을 위해? 반대로 언제든 놓아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니고. 비바람에 정신도 함께 날아갔던 것인지 잠시 넋을 놓고 상념에 잠기다 한 박자 늦게 그의 말을 담는다.
“혹시 지금 바쁘십니까?”
“아뇨, 한가하답니다.”
그는 선물해주고 싶다는 것이 있다고 했다. 대화를 곰곰이 되짚어 보면 그가 무엇을 주려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지레 거절하기도 어려워 고개를 끄덕였다.
보조를 맞춰주는 걸음걸이에 급할 것 없이 느긋하게 산길을 넘어 마을 장터까지 도달한다. 비바람에도 굳건히 견디는 것은 꽃만이 아니라고 증명하듯 활기가 넘치는 장터의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가 가게에 들어가는 동안 가게 앞에 살며시 등을 붙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부모의 손에 매달려 바삐 걷는 아이,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다정한 시선, 둘이 셋이 어울려 가는 모습을 보니 그리움과 함께 허전함이 조금 감돌았다. 괜한 생각 들기는. 멋쩍게 귓가에 꽂힌 꽃을 만지작거리다 가게를 나오는 그를 본다.
“찾으시던 건 발견하셨나요?”
그는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끄덕이며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었다. 차갑게 만져지는 철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만다.
“……그럴 리 없을 거라 생각은 합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게 검을 쥐어주는 눈은 얄궂게도 몹시 상냥하고 온화하였다. 걱정해주는 듯한 시선, 오랜만에 느끼는 보호받는단 감각은 기쁜 것이었지만──
검은, 역시 싫다.
사람을 해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은 아무래도 달갑지 않았다.
식칼을 잡을 땐 괜찮다. 이것은 먹기 위해,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닌 이 물건은……, 고작해야 소도일 뿐인데도 손에 쥐었을 때 천근의 무게를 느꼈다.
아직도 눈앞에 선한 것이다. 달도 뜨지 않은 밤, 어둠에 휘감겨 부모의 목숨을 앗아가던 그것을. 공포를 따지자면 그저 도구에 불과했던 검보다도 그것을 다루던 사람이 더 무서웠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던 낮고 탁한 목소리, 사람을 죽이며 빛나던 눈. 그러나 다루는 이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할지라도 검의 무게는 즉 생명의 무게이다, 저는 견딜 수 없는.
“……죄송해요.”
한 번 꼭하고 손으로 검을 쥐었다가 그에게 되돌려준다. 두려웠다. 책임을 짊어질 자신이 없었다.
“걱정해주신 마음은 기뻐요. 하지만, 저는 어차피 갖고 있어도 잘 다루지 못할 테고.”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을 흔들며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짓는다. 이런 손으로는 위험한 상황이 나왔을 때 제 목을 찌르는 것도 여의치 않겠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고. 상념은 시선 아래로 숨기고 모르는 척 시선을 맞춘다.
“그래도 시환 씨의 마음은 정말로 기뻤어요. 후후, 그 마음을 가호로 삼아 무사할 거예요.”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보답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뿐이었다. 혹시 제가 거절한 것 때문에 그의 마음이 상하기라도 할까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그의 기색을 살핀다. 겁 많은 저를 이해해주길, 그렇게 바라며 검 대신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다 꽃이 중한 까닭이다. 쇳덩이에 꽃이 상해서는 안 되니. ──그렇게 핑계를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