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내뱉은 숨이 밤을 수놓듯 하얗게 번진다. 그러나 이 땅을 모두 덮은 검은 장막을 수놓기에 제 숨은 터무니없이 연약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가끔 이렇게 자려고 해도 정신이 말똥거릴 때가 있다. 오늘은 달리기가 좀 부족했던 걸까. 체력을 모두 써버릴 때까지 달리고 달리고, 그러다 지쳐서 곯아떨어져야 하는데. 지금부터라도 산에 다녀오면 좋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그것보다는 뭘 해도 안 되는 날인 게 분명했다.
“……ㅅ.”
손가락 끝이 저릿하고 아파온다. 시작인가. 꼭 뱀의 독에 물린 듯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저릿저릿 쥐가 난 듯 아려오는 게 첫 번째다. 그 때부터 이미 챠콜의 기분은 최악으로 치닿는다. 이 다음은 피부 안쪽에서부터 수천 개의 바늘이 몸을 찌르는 듯한 감각이다. 외부의 자극에는 꿈쩍도 안 하는 몸이 이 때는 마치 평범한 사람인 양 제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챠콜이 아는 고통이란 오직 이것뿐이었다.
얼굴이 오만상으로 구겨지면서 품을 뒤져 약을 찾는다. 이번 약도 그다지 효과는 없던 것 같지만 그래도 한 움큼 으적으적 씹으며 얼른 이 통증이 가시길 바라며 두 팔로 제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 사람, 에르덴 루미얀체프를 만난 건 입학하고도 제법 지나서였다. 얼굴은 강의를 듣고 있으니 당연히 몇 번 보았지만 학생들이 듣는지 안 듣는지 혼자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진도를 빼는 모습에 질려 맨 뒷자리에서 도망치거나 잠들기 일쑤였던 것 같다. 그러다 시험을 보고 나서야 된통 정신을 차릴까 했지만 재회는 의외의 곳에서 이루어졌다.
“자네 내 연구를 도울 생각 없나?”
연구? 처음엔 상대를 잘못 찾아온 줄로만 알았지. 자신이 그의 연구를 돕는다니, 차라리 고양이의 손을 빌리는 게 더 이로울 것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납득할 수 있었다.
“자네 몸의 증상을 치료하는 데 흥미가 있네.”
이거라면 분명 자신만큼 적임이 없다. 챠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 상태를 드러내는 건 싫다. 사일란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도, 이상한 취급을 받는 것도, 동정 받는 것조차도. 그런 자신이 에르덴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은 제안을 해오는 그의 눈이 강의를 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이 편하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그의 눈 너머에는 제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감정이 조금 섞인 것 같았지만 적어도 눈앞의 서 있는 챠콜을 상대로 그는 차라리 물건을 보듯 무기질의 빛만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연구는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그야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면 이미 예전에 치료법이 개발되었겠지. 그에게 온갖 구박과 핀잔을 받아가는 것도 순탄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제껏 사일란이란 이유라거나 작고 어린 외형으로 무시당한 적은 많았지만 지식으로 이렇게 하찮은 취급당한 적이 없었는데……. 깔보는 듯한 시선과 마주하고 있으면 자꾸만 주눅이 들어 허리에 힘을 주는 걸로 퍽 고생을 해야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런 말 하면 아마도 그는 뭔가 잘못 먹었느냐 거나 정신이 나갔느냔 반응을 보이겠지만, 챠콜이 보기에 에르덴이란 사내는 생각보다 친절하고 상냥한 축에 속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몸을 걱정해주고 저 자신보다도 꼼꼼히 챙겨주고, 이런 식으로 걱정 받는 것 자체가 챠콜에겐 대단히 낯선 경험이라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다. 사실은 아직도 다 적응하지 못했다.
연구를 이어나가면서 약간이지만 그가 서슬 푸른 시선 뒤에 남겨둔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아내와 딸이 사일란이라던가. 사랑하게 되었으니 상대가 사일란이든 누든 지네괴물이든 괜찮다는 말은 그에게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그다웠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이런 사람의 울타리 안에 든 사람들은 좋겠네. 문득 부러움도 느꼈다.
그가 친 울타리 안의 세계는 혹독한 바깥과 다르게 천국 같겠지. 눈과 바람과 냉기가 휘몰아치는 땅이 아니라 따스한 햇살과 웃음과 마음 놓고 쉴 곳이 기다릴 게 분명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행복, 거기에 자신이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쁠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을 위해 도움이 되고 있어?”
“당연한 소리를.”
제가 연구를 돕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망설임 없이 나온 그 답에 안심하고는 혼자 푸흐흐 웃음을 흘렸지. 기뻐. 그거면 됐어.
자신은 가져본 적 없는 그 행복을 지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아주 필요하고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태어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연구가 성공하면 당신의 딸과 만나보고 싶어.’
그 아이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아, 으, 으으……, 큿.”
참아야지, 참아내야지 생각했지만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번에도 몸을 긁고 말았다. 어차피 긁어봤자 저는 아프단 느낌도 받지 못하고 안에서부터 퍼지는 통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는 쪽이 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검은 옷감을 찢어질 듯 당겨 벗기고 피부 위에 손톱을 세우며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차라리 벽에 머리라도 박을까. 기절해버리면 편할 텐데. 송골송골하게 맺힌 땀이 턱을 따라 아래로 떨어진다. 신경질적이 되어 얼굴을 문지르다 손톱 끝에 피가 맺힌 걸 발견하였다. 통증이 간신히 가실 즈음에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즉시 찾아오라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하지만 지금은, ……이따 그를 만나면 그 때 말해도 되겠지. 지금은 일단, 쉬고 싶었다. 이런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야.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원망하며 손톱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진 팔을 대충 치료한 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렇게 이불을 싸매고도, 쌀쌀함인지 쓸쓸함인지 모를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