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험난한 산맥을 홀로 넘어, 동쪽에서 서쪽을 가로지르는 지루한 여행길이었다. 산맥을 몇 번 넘은 것만으로 익숙하고 낯익은 동쪽과는 다른 공기, 다른 문화가 펼쳐지는 건 신기하기도 하고 동시에 두렵기도 하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제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겨우 다른 도시를 방문한 것만으로 긴장하고 경계해야 했다.
이제 가르쳐줄 사람이 곁에 없으니까.
잔뜩 경직된 어깨를 하고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서툰 글씨로 입학 신청서를 작성하고 입학시험을 치르라는 안내를 받아 가는 길 내내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어쩌지, 입학 안 시켜준다고 하면 어쩌지 조마조마했던 것 같다.
그렇게 들어간 경기장 안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저와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 소녀. 잘 익은 포도를 연상시키는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면서 그녀는 잔뜩 얼어붙은 이쪽을 향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안녕! 네가 내 파트너야?”
언제나 생글생글한 미소를 보이던 제니, 아이제니프 다 카일리피르와의 첫 만남이었다. 2인 1조로 치르는 입학시험, 완전히 처음 보는 상대와 합을 맞춰야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잘 맞춰준 덕분에 스스로 생각해도 괜찮은 시험성적을 내었고, 덕분에 무사히 합격해 아카데미 안에서 기쁜 재회도 할 수 있었다.
“나와 친구가 되어줄래?”
수줍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해오는 그녀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친구, 듣기만 해도 조금 낯간지러운 단어. 그 말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로 아카데미 생활은 그녀 덕분에 즐거운 추억을 차곡차곡 쌓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챠콜은 자신이 사일란임을 밝히지 않았다. 밝힐 수 없었다. 기껏 다가오는 호의가 이 표식 하나로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매 순간 있었다.
제니를 믿지 못해?
응, 못해.
제니는 그러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은 얄팍한 희망조차 가져오지 못했다. 이미 몇 번이고 사무치게 겪은 일이다. 소중한 한 사람을 또 잃을지도 모른단 공포는 오히려 옷깃을 더 단단히 조이게 했다. 그녀 앞에서 솔직해지고 싶다는 마음과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챠콜의 안에서 늘 힘겨루기를 하듯 부딪쳤다.
그랬는데,
“──혹시 어려움에 빠지더라도, 입학시험 때처럼 잘 헤쳐 나가자.”
즐겁게 재잘대며 후드를 벗은 그녀의 목가에서 저와 같은 것을 발견했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무어라 표현해야 맞을까? 기쁨, 아니 사일란을 보고 기쁨 같은 건 느끼지 못한다. 동정? 내가 누굴 동정하지? 동질감? 글쎄, 어쩌면 그와 비슷한 것. 나와 같은 아픔을 겪었을, 나와 같은 시선을 받고 같은 대우를 받고 같은 삶을 거쳐 왔을 자를 향한 제멋대로의 감상. 그 여러 가지 것들이 뒤섞여 마음을 얼룩지게 했다.
“숨길 거면 더 잘 숨겨둬. 보이면, 큰일이잖아.”
그래서 한 말이었다. 제 딴에는 필요한 충고라고 여겼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예상과 달랐다.
“나는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아. …사일란들도 제국의 일원인데, 왜 자기 정체성을 숨겨야 해?”
제국의 일원. 그렇지. 공식적으로 사일란은 누나 나브람과 다르지 않은 위치다. 아무도 대놓고 사일란을 두고 그 아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란 것이었다. 눈초리로, 피부로 느꼈다. ‘우리’는 ‘저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좀 더 당당해지려고, 가슴을 펴고자 왔다. 하지만 1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너무나 힘들었다. 힘들어서, 목적을 잊고 다들 사일란인 걸 모르는 채 대해주는 이 반쪽짜리 현실에 안주해버릴 뻔했다.
그런 자신의 앞에 그녀가 나타난 건 신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신 따위 믿지 않지만 우습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동포 챠콜, 우리는 이런 대우를 받을 정도로 사악한 존재가 아니야. 남들에게 혐오당하는 게 당연한 존재도 아니고. …나는 네가 침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온화한 겉보기와 다르게 심지가 굳은 아이였다. 그녀는 언제나 챠콜이 낯선 걸 해주고 챠콜에게 낯선 걸 가르쳐주었다. 다정하게 껴안아오는 팔이, 풍겨오는 좋은 향기와 따스한 체온이, 어딘지 곧 부서질 듯 혹은 날아가 사라질 듯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마주 안아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해도 좋을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바꿀 수 있어. 사일란들이 차별받지 않고, 제국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세상을 언젠가는 만들 수 있을 거야. ……함께 강해지지 않을래?”
언젠가의 네가 기뻐해주었던 것처럼, 한 번 더 용기를 내고 싶었다.
내밀어진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결국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사막의 태양빛에 이미 다 메마른 줄 알았던 눈가에 물기가 차오를 것만 같았다.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심호흡만 하였다. 제 안에서 만들어졌다 부서지길 반복하는 단어단어들 사이에서 도저히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간절하게 바라던, 기다리던 말을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들려주는 그녀에게, 챠콜은 간신히 힘을 내어 내밀어진 그 손을 맞잡았다.
“같이, 힘내줄 거야?”
“응. 네 편이 될게. 곁에서 같이 힘내면서, 혹시 챠콜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함께 싸워줄게. 바뀔 때까지, 이 손, 놓지 않아.”
돌아오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들린 건 부디 제 착각이 아니었길. 우리가 닮은 길을 걸어왔던 만큼 앞으로는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길.
그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그렇다면 나도 네게 맹세할 거야. 내 동포, 내게 또 한 번 잡을 손을 내밀어준 소중한 제니. 네가 내 손을 잡아주는 한 난 절대 널 혼자 두지도, 등을 돌리지도 않을게. 함께할 거야.”
“───챠↗코↗오↗올↗”
한참을 지그시 쳐다본다 했더니 언제나처럼 조금 빠르게 올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잔뜩 늘어트리는 발음과 함께 확 껴안아온다. 놀라기도 잠시, 어느새 그녀의 이런 행동이 익숙해지고 말았다는 듯 파하핫 웃음을 터트리고는 기우뚱하고 두 사람분의 체중을 침대 위에 올렸다. 풀썩 소리와 함께 푹신한 이불이 두 사람을 폭 감싼다.
“제→니→이↗?”
“아하하핫, 에헤, 너무 좋아서 그런가봐♬”
그녀의 말투를 따라하며 올려다보자 그녀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제 위에 올라탄 채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아, 잠깐만. 간지러워. 키득키득 웃으며 긴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마구 흐트러지기를 몇 번 안 되겠다 하여 에잇하고 제니를 끌어당겨 위치를 바꿔버렸다. 이제 어떻게 해줄까. 히죽거리고 웃으며 토끼 귀 같이 양끝으로 쫑긋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아주다 그대로 동그란 머리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나란히 누워버렸다. 지금의 이 온화한 시간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런 불안도 걱정도 가질 필요가 없다니.
제 옆에 누운, 깜빡거리는 자수정 빛깔의 눈동자를 응시하자 문득 아주 오래 전의 빛바랜 줄 알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지. 이제는 기억도 가물거리는 옛날이지만 아직 자신이 사일란이란 게 알려지기 전에는 다른 아이들과 손을 잡고 뛰어놀고 그러다 돌아와 앞치마를 한 품에 폭 안기기도 했었다. 그 때 그 다정하던 기억을 되새기며 어딘지 낯간지러운 기분을 꾹 누르고 살며시 제니의 이마와 앞머리의 경계선 부근에 쪽 뽀뽀를 해보았다. 받는 게 아니라 해주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기분이 간질간질하다.
“제니 덕분에 나도 누군가 껴안아주었던 적이 있던 게 떠올랐어.”
고마워, 잊어버릴 뻔한 걸 떠올리게 해줘서. 멋쩍게 흘러나온 말에 네가 또 웃어줄 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