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루버 (+위키링 친밀도 로그)
“설마 정말 그걸로 제 소원을 이루어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루버 씨?”
막 치료를 마친 폴라와 위키링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포켓몬을 볼에서 꺼낸 에셸은 방금 전 입꼬리만 억지로 당겨놓고 이걸로 됐겠지, 안도하며 무표정으로 돌아온 루버를 지그시 응시했다.
“안 되나요?”
알 거 다 아는 15세의 트레이너는 생각보다 뻔뻔한 면이 있었다. 덤덤하게 돌아온 반문에 당연히 안 되죠! 에셸이 힘주어 말한다.
“제가 보여준 건 시범이었고, 방금 전의 그게 ‘활짝’은 아니잖아요. 아니면 설마~ 루버 씨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는 거기가 한계인가요?”
──눈도 전혀 웃지 않고, 땀방울까지 붙여 놓고, 제가 보고 싶은 건 당신이 즐거워서 짓는 미소였는데. 본인도 웃었다고 하기엔 부족한 걸 알고 있잖아요. 에셸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루버는 폴라를 얹은 채 한 발, 두 발 슬금슬금 멀어지고 있었다. 그야 갑자기 웃으라고 해도 뭘 어떻게 웃으란 건지.
“거기 살금살금 도망가는 루버 플라이트 씨.”
움찔, 걸음을 멈춘 그의 두 손을 감싸 쥔 에셸은 한껏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배틀이 끝난 다음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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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홍차에 건조베리열매를 띄운다. 그의 붉은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색감이었다. 곁들이는 간식은 대개 마들렌 등의 플레인한 맛을 선호하나 오늘은 서로 배틀을 통해 에너지를 쏟은 참이니 피로슈키를 얻어 왔다. 물이 끓는 동안 오븐에 살짝 데운 피로슈키를 그에게도 하나,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혀둔 불켜미에게도 하나 나눠주었다.
라이지방의 대표적인 가정식인 이것은 집집마다 내용물이 조금씩 달라지곤 했는데, 오늘 구매한 집은 살짝 매콤한 맛인 듯 했다. 매운맛도 거리낌 없이 먹는 위키링은 방석 위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피로슈키를 흡족하게 먹었다. 이건 에셸의 집에서 먹던 것과 맛이 달라. 그게 이 불켜미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에셸이 집에서 먹던 피로슈키는 고기는 소량, 그보다는 버섯과 치즈가 듬뿍 들어가 눅진하고 마일드한 맛을 뽐냈다. 달리 말하면 그는 매운맛에 약하단 뜻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에셸은 제 몫까지 위키링에게 넘겨주고 홍차를 홀짝였다.
“자 그래서…… 제 요구사항은 분명 ‘활짝’이었을 텐데요, 루버 씨.”
“그랬죠…….”
“루버 씨가 보인 미소는 정말 활짝이었나요?”
“…….”
어떻게 하라고는 안 했잖아요. 침묵 끝에 나온 답에 에셸은 바로 그게 문제예요.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이래서 계약서는 잘 써야 하는 법이다. 처음부터 조건을 확실히 걸었다면 루버가 빠져나갈 구멍도 없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억 단위의 돈이 오가는 거래도 아니고 캠프에서까지 철저하고 싶진 않다는 것도 에셸의 본심이었다. 에셸은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아이는 치사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랍니다.”
루버에게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른에게 예의를 지키도록 교육받았다고 했지. 작금의 상황은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속내를 뻔히 알면서 에셸은 웃음을 삼켰다. 짓궂게 구는 건 이쯤 해두어야지.
“소원, 생각해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말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격식을 갖추고 예의를 차리는 건 좋다. 당장에 에셸부터가 그랬으니. 하지만 갑자기 바뀌어버린 태도는 생각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가.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해주세요, 라는 소원을 말해볼까도 싶었지만…… 역시 바꾸길 잘했다.
에셸이 루버에게 바라는 건 웃거나, 말을 편하게 하거나, 그런 겉으로 보이는 요소가 아니었다.
“캠프는 즐거운가요?”
제 몸보다 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어른스럽게 구는 이 아이가 어깨에 짊어진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 뚱한 표정의 아이에게서 본 적 없는 표정을 이끌어내는 것. 에셸이 정말 요구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돌아오는 답에 귀를 기울이며 에셸은 위키링을 무릎에 올리고 그 손을 물티슈로 닦아주었다. 폴라는 피라슈키가 마음에 들었을까? 콩 한 쪽도 나눠먹으면 친구가 된다는데. 정말 상성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이미 폴라를 친구로 점찍은 위키링을 위해서라도 오늘의 배틀이 안 좋은 기억을 더한 것만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음 배틀까지 서로간에 멋진 경험을 쌓아서── 재회할 수 있다면.
아직 성장 중인 트레이너로서.
“다음번에 또 이겨서 소원을 들어내지 않을 수 없네요. 저와 또 배틀 해주실 거죠?”
아직 한 사람 몫은커녕 반쪽도 안 되는 트레이너지만 말만은 청산유수였다. 은근히 도발하는 투에 루버는 어려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제가 이길 거예요.”
“그럼 루버 씨는 미리 소원을 생각해둬야겠네요.”
이길 생각이 없는 건가? 쪼아오는 시선에 에셸은 해명도 하지 않고 홍차를 홀짝였다. 이기려 하면 질 것이오, 지려 하면 이길 것이니. 아, 이 말이 아니었나? 중요한 건 다음. 다음 약속이다.
“나중에 위키링과 폴라가 진화하면 다시 한 번 배틀해주세요.”
에셸은 빙그레 웃었고, 루버는 묻지 않을 숭 없었다.
“위키링이 언제 진화하는진 알고 말하는 거죠?”
“──아?”
갈 길이 구만리인 트레이너였다.
3개월에 걸친 루버 스마일 대작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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