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챕 개인로그
시야: 홀로그램 크리처(대형)
“페어도, 동료도 모두 쓰러졌습니다. 현재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괴이화의 리미트를 해제하여 스스로 침식률을 높이십시오.”
(훈련 종료 후 모든 캐리어는 연구소로 이송되어 혈청 투여 및 안정 절차를 밟습니다.)
【라리사 소워비 훈련생, 훈련을 시작합니다.】
【현재 침식률 22%…… 2단계.】
대체로 이 정도 선이었다. 경고 레벨의 직전. 훈련소에 오기 전에도 검사를 받으면 2단계를 웃돌았다. 조금 더 안정시킬 수는 없어? 듣는다고 마음처럼 안 됐다. ──들을 의지는 있는 거냐고. 이 말은 누가 했더라. 라리사는 늘 불안정했다. 머물던 시설이 인력 부족을 구실로 침식률을 방치하기 일쑤여서 5단계까지는 혈청을 주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다 머리카락이 혼자 움직이기 시작하고 환청이나 환각이 들린다고 불안을 토로하면 우는 아이를 어르고 사탕을 물리듯 주사를 놔주었다. 달래주는 거였나. 겁먹은 건 아니고? 쟤는 왜 가만히 있는데 침식률이 오르는 거야. 나도 궁금해.
거대한 검은 입자를 앞에 두고 머리카락을 점점 늘려나갔다. 바닥을 기며 뻗어나가는 그것의 위로 독소를 머금은 물방울이 영롱하게 떠올랐다. 현재 침식률 5단계.
──스스로 침식률을 높이십시오.
한 체의 대형 오드와 혼자 싸워서 살아남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게이트 오픈을 두 차례나 겪었으면서도 실제로 오드를 본 기억은 불분명해서─그야 그곳은 난장판이었으니. 괴물을 눈앞에 두기보다도 괴물이 만들어낸 피해에 휘말리는 일이 더 컸다─아니, 어쩌면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고. 검은 입자로 이루어진 몸체가 빌딩처럼 커다랗다면 오드가 나타났다는 생각보다도 모래 폭풍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는 쪽이 쉽다. 대형 오드는 라리사를 앞에 두고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집중했다. 더 많은 기포, 더 길고 굵은 촉수, 옭아매고 휘감아 쓰러트릴 힘, 쓰러진 적을 녹일 힘.
초커의 게이지가 차오른다. 침식률 6단계. 물속에 들어온 듯 귀가 멍멍해진다. 흐려지는 자아를 수면 아래로 밀어 넣고 생각을 단순화 하려고 애썼다. 눈앞에 적, 쓰러트려. 적, 쓰러트려. 적. 복잡한 생각이야말로 이 순간의 독이다. 촉수들이 멋대로 날뛰려 하지만 아직은 고삐를 놓아줄 수 없다. 조금만 더, 쥐고 있어. 아직 일러.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에 터트려. 아슬아슬한……어디까지 올려야 하지? 어디까지 올려도 되지? 이럴 때 내 고삐를 잡아줄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닌 누군가. 의존할만한 타인.
──훈련 메시지는 늘 조건의 제시가 부족하다.
「페어도 동료도 모두 쓰러졌습니다.」
나는 왜 쓰러지지 않았어?
「현재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나는 왜 더 싸워야 해?
쟤는 왜 가만히 있는데 침식률이 오르는 거야. 낭비 아냐? 가뜩이나 혈청이 부족한데. 차라리…….
생각은 독이다. 괜한 생각에 빠질 게 아니다. 그래야만 하니까. 그러기 위해 ‘투자’받았잖아. 의문을 죽이고 훈련에 임한다. 침식률 7단계. 롤러코스터를 타면 이런 느낌일까? 낙하하는 감각, 물에 잠기는 것과는 또 달랐다.
「라리, 넌 정말 소중한 존재야.」
생각은 독이다. 사고하려 하지 마. 스스로 헤엄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도록 부유하는 해파리처럼, 힘들여 움직이지 마. 하얗게 지워. ‘해당 훈련은 교관들의 감독 하에 안전하게 이루어지며……’, 안전매뉴얼을 읊는다.
「사실 좀 무서워요. ……그렇죠?」
무서워. 당연해. 어제의 훈련생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한 걸까. 어째서 이런 훈련을 해야만 하는 걸까. 사고는 곧 의문으로 이어진다. 의문은 정직함을 요했다. 모두가 쓰러진 자리에서 홀로 침식률을 높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즉, 다시 말해──
아아, 뭘 질질 끌고 있어. 다들 알고 있잖아.
《동족을 학살하고 인류를 수호하라.》
더는 억누르지 못하겠는 순간, 폭발하듯 힘을 터트린다. 무아와 함께 침식률이 한 단계 더 상승한다. 영롱하게 떠오른 비눗방울들이 일제히 터지자 세상이 이지러지듯 녹아내렸다. 그 독이 스스로의 몸까지도 침범해 녹인다. 그치만 오늘은 돌아가야 해. 조금만 더, 버텨.
【──훈련을 종료합니다.】
미션에 성공했다는 알림을 끝으로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서는 아, 뒤늦게 깨닫는다.
‘침식률, 높이라고 했지. ……오드, 쓰러트리라고는 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무리였던 거야. 맥없는 미소, 이어지는 퓨즈의 끊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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