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기 개인로그
「나는 인류의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라리사 소워비는 기억력이 썩 좋지 않았다. 전부는 해독되지 않던 그 독이,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물질이 아니, 엄밀히 말해서 오드와 관련된 것만 녹여버리는 물질이 오드의 보균자 뇌까지 녹여버리곤 하던 것인지 그래서 나빠진 게 기억력인지 주의력인지 둘 다인지. 어느 쪽이든 무언가를 주의 깊게 기억하는 일이 서툴렀다.
그렇지만 그날의 목소리는 누가 카세트테이프에 넣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되곤 했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잊어버리려 하면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24기 훈련생들이, 25기 연합군으로 선발된 이들이 기억에 남는 커맨더의 말을 반복하던 탓에 강제로 외운 건지도 모르지. 그날의 연설은 그랬다.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던 훈련생들에게 섣부른 불을 지폈다. 미숙함은 과감한 용기와 도전,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신과 갈망 따위로 포장되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죽었지만 인류는 패배하지 않았다. 그들이 죽어 인류가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인해전술이라는 유구한 방법이다. 5년의 시간동안 라리사 소워비는 그 전 24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찬 이별의 물결에 휩쓸렸다. 어릴 때는 기억하는 게 괴로워 차라리 잊고 말았는데, 전장에서는 그 정도 감상에 젖을 새도 없어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헤어졌던 27명의 친구들과 재회할 수 있던 건, ──축복이라 해도 되는 걸까.
고요한 밤, 라리사 소워비는 다음 휴가를 상상하고 있었다. 바다는 어때? 지겹다고 하지 말고. 아프리카 쉘터 외곽은 무척 무더웠다. 미지근한 피부 위로 공기가 두터운 옷을 입히는 것 같았다. 물속이 간절하면서도 동시에 이 자리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여기, 네 곁에 남을래. 예민한 청각으로 숨소리를 헤아린다. 하나, 둘, 셋, 넷……. 28명의 알파3팀. 1년 간 변동 없음. 축복일까? 불안이 마음 한구석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무럭무럭 자랐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잃어버리고 손에서 놓고 미련하지 않게 굴고, 그것들이 다 익숙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웬걸, 그 반대다. 더 미련해졌다. 이 완벽함이 언제 깨질까 두려웠다. 죽지 마. 아무도. 철없는 바람이다.
「그만한 힘을 손에 쥐고도 세상을 구할 용기가 없다면 손에 닿는 주변이라도 지켜내도록.」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용기가 아니라 사랑이란 걸 알았다. 이 세상 전부를 사랑하는 마음이어야지만 영웅도 될 수 있다. 영웅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손닿는 주변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는 싶었다. 어떤 짐승이든 간에 제 보금자리는 애착한다. 여러 번 집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소라게는 다음 집은 절대 잃지 않기 위해 제 살을 집에 접붙인다고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게 제 살을 잡아먹는 일이 되더라도.
야영지의 조명 너머,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과거, 대기오염이 심각하던 도심에서는 꿈에도 그리지 못하던 풍경이라고 했던가. 밤하늘이 캄캄한 바다를 닮아 있었다. 그렇지, 처음으로 바다에 잠기던 날 그 심해가 꼭 이랬다.
「정말 오래는 못 기다려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아.」
──않을게.
그 날 아냐를 보내주고 왔다. 함께 바다에 가자던 약속을 돌고 돌아 지켰다. 바다 아래는 생각한 것처럼 두렵지 않았다. 발목을 잡는 무시무시한 것도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도 생명이 숨 쉬고 있어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사실은 잠깐, 이대로 여기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더는 고독에 혼자 발 담그지 않는다. 아직 먼 이별까지, 가까운 빛까지. 돌아가면 차갑게 식힌 젤리를 먹을까.
「나도, 면허…… 딸 수 있어?」
「해봐.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어.」
포장된 도로를 마음껏 달렸다. 도시에서는 이 속도는 무리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인간의 문명만 남은 그 땅은 캐리어에게도 차별 없이 열려 있었다. 빠르게 스치는 바닷바람이 기분 좋았다. 다음날, 라리사는 운전강습책을 주문했다.
「나쁘지 않군요. 이 ‘물멍’이라는 것도.」
「깨닫는 게 느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까, 특별히 팀 오메가로 오게 해줄게. 제안은 서럽게 차였다. 바다는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왜 시시콜콜한 걸 따지는 거야. 대신에 준 소라에서는 파도소리가 들렸다. 파도소리와 함께 그가 뱉어내고 간 이야기도 들리는 것 같았다. 늪처럼 허우적거릴법한 이야기들, 좀 더 두고 가도 돼.
「받아라.」
「뭐야?」
넘겨진 건 어느 겨울 바다 사진이었다. 그때쯤 해안절벽과 바다의 색만 보고도 라리사는 어디의 바다인지 알 수 있었다─아니다, 사실 뒤에 적혀 있었다─. 사진은 좋지. 나도 사진 찍는 거 취미인데. 그런데 왜 사진만 줘? 같이 들어가. 너 진짜 날 물귀신처럼 데려가려고…… 그 날은 제법 복수를 했을까.
「술 마시고……, 헤엄쳐도 돼?」
「뭐 어때, 아직까지 캐리어가 물에 빠져 죽었단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조금만 더 잠수했다가는 최초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전에 번쩍 건져졌다. 그리고는 모래사장에 앉아 다시 또 한 잔, 외로운 게 싫은 두 사람이 만나서 나란히 외로움을 달랬다. 블루 라군의 색이 오세아니아 바다에 퍽 잘 어울렸다. 정겨운 고향의 추억이다.
「내일은 같이 바다, 갈 거야?」
「그, 내일은 당장 어렵고……」
그보다 저, 공사 말인데요. 쉘터 바깥에서도 사람은 살았다. 평범하게 살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왜 도와주고 싶었던 걸까. 대단하고 거창한 마음은 아니었다.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고, 그 마음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포기하지 않길 바라서.’
「그래서 보는 놈들마다 족족 바다에 가자고 부르던 거야? 아이고.」
「앗, 일어나면 무너져. 기다려.」
내가 1년 동안 조르는데도 안 가주다니. 그럼 조른다고 다 들어주겠냐. 바로 눈앞에서 조르는 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도 참 설득력이 있다. 그의 몸 위로는 모래로 만들어진 펭귄 가족이 줄을 이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봐. 셔터음이 울리고 다음 편지 내용이 결정된다.
필름이 돌아가듯 빼곡히 들어찬 기억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좋은 추억만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이를 테면 안경 쓴 펭귄인형 하나를 위해 비워둔 4년의 자리라거나 그 자리를 채우는 빽빽한 담배 연기나 좁아들지 않는 물리적 거리 등이 있다.
「그때도 지금도 네가 말을 잘 들어서 마음에 들어.」
싫어하는 건 하지 않아. 불쾌함을 이해해. 나는 여기서 괜찮은데, 괜찮지만── 너는 어때?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소문은 꾸준히 귀에 들어왔다. 대체로 남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소문들은 하나같이 좋지 못한 것투성이였다. 누가 페어를 잃었다더라. 누구는 제대를 하고 누구는 사살되고. 흉터가 남고 신체를 대신하고, 커맨더에게 우수함을 입증 받은 기수라서 그랬을까, 살아남으려면 그만큼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던가. 페어의 사살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드물지도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던 그 순간의 마음은 누구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10단계 된다면 말야…….」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앞이나 봐요.」
정식 발령이 나고 근 5년을 빠짐없이 함께했다. 5년 동안 나눈 대화가 사전 한 권을 이룰 정도다. 먹는 것을 따라가고 함께 자고 일어나고 사격을 배우고 수영을 가르치고, 모르는 것 빼곤 다 아는 사이가 되어가는 동안 아직도 듣지 못한 확답.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어. 그야 나는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걸. 그래도 계속 생각해. 닥쳐온 적 없는 만약의 순간을. 그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그리고 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끝끝내 살아남아, 승리로써 존재를 증명해라.」
‘죽어도 좋다고 생각해, 네가 무사하다면.’
벌써 한참 전이 되어버린 훈련소 입소 당시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당신은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나요?’ 지금도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나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어서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인간임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살아있으면 그게 바로 존재한다는 증명, 너를 위해 죽는다면 그 또한 내 쓰임의 증명.
「본인의 눈으로 재앙의 끝을 보겠다는 각오로 임하라.」
이 재앙이 끝나면 넌 무엇을 할 거야? 난 무엇이 되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까? 미래라는 것. 글쎄, 당장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다만 바라건대──
모두가 잠든 밤, 라리사 소워비는 다음 휴가를 상상하고 있었다. 역시 바다가 좋겠어. 같이 바다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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