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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10.31. 무인지(無人地)의 사원

ㅡ보드기마을 아르바이트 더보기 모래톱길은 예부터 오아시스 주변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었다. 그야 이렇게 굴러다니는 게 흙과 모래와 바위뿐이라면, 꿈트렁처럼 흙이 주식이 아니고서야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이 아닐만도 했다. 특히나 희나리 사막의 북부는 마루길과 인접해가면서 불어오는 춥고 짠 바닷바람과 덥고 건조한 사막의 바람이 밤낮으로 뒤바뀌어 조금 더 가혹한 기후를 자랑했다. 거대한 강줄기를 끼고 규모를 키워나가는 아토시티나 도원림 가까이 평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모아마을과는 달랐다. 보드기마을이란, 그 이름이 붙기까지도 참 쉽지 않은 여정이었던 것이다. “얼터스톤이 돈이 된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누가 이런 데서 살 생각을 했겠어.” “가끔 이 안쪽에 있는 사원을 구경하겠다는 괴짜 학..

038) 10.30. 자존심

ㅡ나나 진화 더보기 강렬하게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차례 대지를 휩쓸고 지나가면, 그 위를 오간 수많은 존재가, 또 흔적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는 일이 순식간이었다. 사막이란 곳이 그랬다. 바다와는 다른 의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이었다. 우리가 발 디딘 이 아래엔 또 얼마나 많은 잊혀진 것들이 잠들어 있을까. 사막을 걸을 때면 그래서 늘, 무덤 위를 걷는단 생각이 들곤 했다. 가끔은 그 사실에 숙연한 묵념을 보냈고 가끔은 아찔한 공포를 느꼈다. 경이롭기도 했다. 무엇이든간에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위는 차라리 좋단 말이지. 바다 위에 섬이 있다면 사막에는 바위가 있지. 함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한 좋은 포석이야.” 트레이너의 느긋한 목소리에 꼬시레는 불만스럽게 바위로 된..

037) 10.30. 유령과 도깨비

ㅡ아이 귀하 더보기 이것은 능란이 텐트를 팔기 전, 마지막으로 사막의 밤을 오컬트 소년과 보낸 이야기다. 처음 캠프에 합류했을 적부터 유난히 커뮤니케이션이란 것을 모르는 채 정말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변을 둥실둥실 다니던 소년은, 본래 애들이란 바깥에 방목해놓고 있으면 알아서 쑥 커서 돌아온다는 지론을 가진 능란의 눈에 크게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발끝이 땅에 닿고 있지는 한지 의심스럽게 흘러흘러 다니는 소년이었지만 그래 봬도 캠프에서 아주 멀어지지도 않았고─툭하면 미아가 되어 캠프도 잃어버리는 소녀나 멋대로 외박해버리는 가출소년 등과는 다르게─마치 행성의 위성쯤 되는 것처럼 땅에 아주 발붙이진 못하면서도 그 주위를 빙빙 맴도는 게 이 정도면 하고 싶은 대로 두면 되겠지 태평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036) 10.28. 달걀로 바위 치기 : 모아체육관 도전

ㅡ모아체육관 챌린저 클래스 더보기 ──자, 오늘도 브리핑이다. 능란은 손뼉을 치며 자신의 포켓몬들을 모았다. 극히 최근에 파티에 합류한 꼬시레, 샤샤는 수줍음 많게 다른 포켓몬들을 피해 반쯤 모래에 묻혀 있었다. 촉촉하게 자신을 감싸주는 습지의 진흙이 아니라 물기 한 모금 없이 퍽퍽한 모래땅이라니. 여전히 속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꼬시레였지만 낯선 포켓몬들로 둘러싸인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들 사이에서 몸을 숨기는 게 급했다. 그런 꼬시레의 등을 간간이 긁어주며 늘봄에서도 는개에서도, 그리고 모아까지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파티에게 능란은 면목 없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기기 힘들 것 같다는 거야.” 일주일 가까이 고민한 결론이었다. 꼬시레를 데려왔으니 된 거 아니야?..

035) 10.26. 민들레 홑씨와 모래바람

ㅡ모아마을 아르바이트 더보기 올해로 갓 18살이 된 리모는 보드기 마을 출신으로 이곳 희나리 사막을 중심으로 하는 모래톱길의 로버스트 드라이버를 맡고 있었다. ‘로버스트 드라이버’란 즉 그의 짐 리더로서의 이명이면서 동시에 사막의 조난자들에겐 구원자나 다름없는 강직한 구조대원 자체를 나타내는 이름인 것이다. 그가 단순한 짐 리더로만이 아니라 이곳 모래톱길 모두의 신뢰를 받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아버지에게 배웠다는 정비와 운전 솜씨를 뽐내는 소녀에게 핸들을 맡기고 들레씨와 능란은 각각 조수석과 뒷좌석을 차지했다. 제일 어린 친구에게 운전을 시키다니 조금 면목이 없었지만 두 사람 다 버기카 면허 같은 건 없으니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정작 소녀는 운전이 당연해 보였다. 애초에 직접 자신의 자동차를 정비하고..

034) 10.25 계산 없는 애정의 힘

ㅡ는개마을 아르바이트 더보기 한주의 중간을 찍는 수요일 밤, 사위는 캄캄하게 어둡고 밤바다는 그 새까만 해저에서 무엇이라도 튀어나올 듯 불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닷속의 무언가가 마을을 덮치지 못하게 등대를 세운 걸까. 등대에서 쏘아져 나오는 빛이 어둠을 물리치도록 말이다. 제 몸조차도 분간이 가지 않아 무용한 시력을 버려둔 채 귀만 기울이면 그나마 파도가 철썩, 또 처얼썩하며 공포를 씻어내고 대신 설렘을 안겨주기도 했다. 대나무 숲에서만 지내던 여자는 파도 소리만한 음악이 또 없었다. 푸실에서 시작한 여정이 다님길을 전부 밟고 어느덧 모래톱길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능란은 여전히 는개마을 근처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땅거미 습지에서 만나고 싶은 포켓몬이 있던 탓이..

033) 10.23. 몽상가(夢想家)

ㅡ렌카 귀하 더보기 당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 입을 열자마자 꺼낸다는 말이 이것이었다. 저와 상관없는 분야까지 시시콜콜 비교하고 재고 따지며 질투하는 세상에 다시 없는 옹졸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잘하고 싶은 일이야 있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그 잘하고 싶은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바로 옆 사람이 나보다 잘할 때, 그것이 운이든 실력이든 노력이든 그저 잘하고 싶다는 의지만으로는 어떻게서도 격차를 메울 수 없을 때, 좌절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그러니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축일 것이다. 이럴 때 옛 명언이 하나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인간은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불행해졌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써볼까? “인간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적 관계를 형..

032) 10.20. 몰입(沒入) : 는개체육관 도전

ㅡ는개체육관 챌린저 클래스 더보기 몰입하는 것도, 노력하는 것도 재능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캠프의 선두를 달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몰입의 천재들이었다.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래. ‘필사적’이라고 말하는 찰나. 눈부셨다. 우러러보았다. 이 말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찔린다면 상당수에 속하지 않는 소수 인원일 테니 걱정하지 말자. 전부라고는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몰입을 볼 때마다 ‘나도 저렇게 뜨거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어린 CEO의 눈도 같은 가치를 발견했던 것이겠지. 그가 후원하기로 한 인물들이 능란이 가리킨 상당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 말을 꺼낸 인물은 어떠한가. “하고 싶다는 건 반대..

031) 10.20. 꽃과 태산

ㅡ이치이 귀하 더보기 화랑지방에서도 긴 세월을 자랑하는 능가는 가문의 대표가 바뀔 때마다 그 성격은 조금씩 달라질지언정 절대로 변치 않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도화무늬가 새겨진 기와다. 마을에서도 동편, 넘어가면 해안절벽이 나오는 그 언저리에 지어진 으리으리한 기와집은 수리와 보수, 증축을 이어나가면서도 그때마다 쌓아올리는 기와에는 반드시 도화무늬가 들어가도록 하였다. 현재의 도화무늬 기와집은 특히 몇 대 전인가 심어둔 오얏꽃과 복숭아꽃이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어 마을 사람들의 자랑이 되었는데 때문에 능란은 꽃 피는 그 시기를 어린 시절부터 늘 손꼽아기다리곤 했다. 는개마을은 가온시티가 지금처럼 번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화랑지방으로 들어오는 배가 제일 먼저 닿는 곳이었다. 그야 물론, 무역선들도 이..

030) 10.19. 첫째의 자리

ㅡ모모 진화 더보기 용건을 마친 형제는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 질 녘이 가까운 시간, 능란은 형제를 배웅하기 위해 도시의 외곽으로 나왔다. 휘황찬란하던 건물의 조명을 벗어나자마자 응달진 거리는 적막이었다. 공중날기 택시를 부르는 형제를 지켜보던 능란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갑자기 불러냈는데 먼 길 와줘서 고맙단 거야.”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한 인사치레를 하고 그래.” 우리 사이에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정말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녀석이다. 우리가 그런 표현을 하기에는 그간 조금 어색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그마저도 전부 능란 혼자 의식해서 어려워하던 것뿐으로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던 걸까?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형제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딱! 하는 경쾌한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