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피르 F. 렌하르트
뱉어내는 한숨이 새벽 공기를 따라 흐릿하고 희게 퍼진다. 밤을 물들이기엔 터무니없이 희박한 색이었다. 제 머리색과 같다. 전부 물들이기엔 턱없이 옅었다. 비애의 정의와 같다. 네 심장이 일출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방향을 가리키고, 새 신에 싸인 네 두 다리가 움직이는 동안 새벽녘과 함께 지워질 뿐이다.
희뿌옇게 번져가는 두 색의 눈은 너를 보면서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명한 후작가의 장자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빠르게 발전해가는 도회지의 번화와는 거리가 먼 고즈넉한 시골이었으나 그만큼 한가로움과 여유가 있었다. 고향을 사랑했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묻힐 때까지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이라 하더라도 행복했을 것이다. 하늘이 높은 것만 알면 만족할 수 있는 삶이었다.
불행이란 타인과 비교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제가 불행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부족함 없이 자라면서도 가지지 못한 것이 많았다. 어쩌면 가지지 못한 건 딱 하나뿐이었으나 가장 가져야 할 것을 놓쳤다. 저의 탓은 아니다.
정의가 흩어져 사라진 인간은 어떻게 될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의 정의 대신 타인의 정의를 좇는다. 아주 오래된 정의일수록 좋았다. 모두가 인정하는 선일수록 알맞았다. 교리는 삶의 지침이었다. 나도 심장이 뛰고 있을까? 손바닥 아래 두근거리는 박동이 들린다. 너와 마찬가지 박동이다. 그런데도 같지 않다.
그간 아주 느리게 호흡했다. 네 호흡의 속도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이 없어도 인간은 살 수 있다. 원하는 것이 생기면 인간은 살게 된다. 여기 교리를 따르지 않는 어린양이 있다. 양을 거부하는 어린 사자가 있다. 겁쟁이 사자도 양철 나무꾼도 시작은 나에게 없는 것을 깨달으면서였다. 네가 찾는 답, 네가 찾는 정의, 의문을 깨닫고 만 네 심장이 이끌어나갈 길이 사뭇 두렵다.
가슴을 누르던 손이 도장을 대신 움켜쥐었다. 뒤틀린 미소를 눈에 담으며 옅게 웃었다. 너는 인베스에게 불신한 적 없다고 하나 불신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끝내 붉은 과실을 깨물고 만다면 이 이상 어린양의 거죽을 뒤집어씌우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관계에 도장 찍지 못할 수 있다는 희미한 예감이 스쳤다. 아직은 성마른 것이었으나.
“누군가는 텅 빈 가슴을 지고 살아가기도 하지요. 그 텅 빈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당신과 제가 다른 것처럼. 다만 당신이 채우려하는 그것이 도저히 신의 뜻 안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애석하겠어요.”
“인베스의 가르침은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일깨워주기 위함이 아니었을 텐데, 가르침과 배움이 언제나 같지는 않다는 걸 몸소 보여주네요.”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겠군요, 렌하르트.”
“당신이 찾고자 하는 답이 무엇일지, 증명하고 싶은 길이 어떤 것인지. ──제게도 보여주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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