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딘테그로 : 혁명의 도화선

04. 죄가 된다면

천가유 2021. 10. 24. 21:07

 

: 로블렛 H.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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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면 비에모드 라반둘라는 로블렛 H. 베리를 좋아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저뿐이겠느냐만은 그렇기에 당연한 수순처럼 비에모드 또한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 대한 호와 불호의 경계는 첫인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로블렛 H. 베리는 그 점에서 첫인상을 좌우하기에 좋은 여러 가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큰 키, 그 높이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는 우아하고 곧은 행동거지, 또렷하게 올라간 사나운 눈꼬리, 사파이어를 닮은 푸른 눈동자는 겪은 적 없는 시린 겨울 하늘을 떠올리게 한다. 알고 있는가? 지나치게 차가운 것은 반대로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진다. 그가 머금은 온도가 그랬다. 입술을 떼는 순간 귀를 사로잡아버리는 무게감 있는 중저음과 그이기에 소화할 수 있는 유난스러운 연극 투까지. 그 중 대미를 장식하는 건 등을 덮는 순백의 머리카락.

전설 속의 만년설을 연상케 하는 네게 매료되지 않을 법을 몰랐다.

어쩌면 신화 속의 사제가 오르던 산이 눈 덮인 산은 아니었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높을 이유가 없다.

색이 그 사람을 나타내는 전부는 아니다. 네가 가진 장점, 너의 매력은 외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색은 틀림없이 너를 더욱 좋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너를 앞에 두고 종종 죄인이 된다.

생각도 죄가 된다면.

상상한다. 너른 대지에 펼쳐지는 꽃의 바다, 그를 비추는 건 네 눈을 닮은 푸르른 새벽 달. 너와 길 위를 걸으면 두 색의 꽃이 마치 오랜 약속에 경의를 표하듯 갈라진다. 한쪽은 희고 한쪽은 흰색은 되지 못한 연보라색이다. 하나를 등지고 하나를 우러러 서서 나는 경배한다.

와주시겠나요? 제가 있는 곳까지.”

놀랍게도 가진 적 없는 색을 질투한 적은 한 번이 없었다. 그러나 제 것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어째서 사랑해야 할까. 사랑할 색이라면 눈앞에 있는데. 내 눈이 네게 오래 머묾을 너 또한 알 것이다.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답니다.”

탐하지 않는다. 샘내지 않는다. 다만 동경이었고 애정이었다. 순리와 같은 사랑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주 작은 궁금증이 색을 탁하게 만들기도 했다. 네게도 희지 못한 면이 있느냐고. 혹시나 네 어머니와 같은 괴물을 안고 있진 않느냐고.

사람은 누구나 추악한 면을 갖고 살아가지 않나.

너의 고결하지 못한 면까지 알고 싶다면. 이는 경배함일까. 아니라면,

마음이 죄가 된다면

침묵 가운데 씻어 내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