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ection blue

002. 삶의 값어치

천가유 2024. 11. 24. 03:17

For. 아드리안 베르체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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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신이 불가한 환자, 아동 학대 및 착취, 자살에 관한 묘사가 나옵니다.

 

#.1

20년 전 마물 사태로 콜크 영주 파울로 위실은 하나뿐인 후계자를 잃었다.

우선은 이 명제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파울로 위실은 후계자를 잃었다. 그러나 그 말이 후계자가 죽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 프레데릭 위실은 용맹하게 검을 들고 나섰다가 반 송장이 되어 돌아왔다. 반도 후하다. 따지자면 90%는 송장이었다. 이대로 영주 노릇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콜크 영지는 영주 자리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잃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분명 숨이 붙어 있었다.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2

극심한 부상을 입은 아들이 영지의 모든 치료사를 동원하고 종교에 의지해도 회복될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파울로 위실은 실의에 빠져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았다. 그는 셈이 빠른 남자였다.

우선은 영지에서 마력량이 우수한 아이들을 모았고 그 아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위실 가문에 충성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용인들처럼 하루 종일 마당을 쓸거나 접시를 닦거나 마구간을 돌보지도 않았다. 그 대신 숨만 붙은 시체를 보살펴야 했다.

하루 종일 약초 향이 감도는 캄캄한 방 안에서 2명의 사용인이 떨어지지 않고 환자를 돌봤다. 그리고 도련님을 위해 마력을 써줄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3

론은 영지에서 가장 뛰어난 마력량을 가진 아이였다. 마력을 측정하던 마법사조차 이 아이는 수도의 마법학교에 보낼 인재라고 칭찬했다. 제대로만 배운다면 영지의 흥복이 되리라. 그러나 남작은 소중한 인재를 영지 밖으로 유출 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물며 제대로 써줄 생각도.

필요한 건 오직 마력뿐이다.

 

#.4

어느 날 프레데릭 위실에게 여동생이 생겼다. 여동생의 첫번째 임무는 안구만 움직일 수 있는 오빠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마력증폭제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5

[마법 가정교사 구함 - 콜크 영지, 위실 가]

한 장의 광고문이 정보길드를 통해 인력소로 퍼졌다. 보수는 형편없었고 대우도 마땅치 않았다. 눈치 있는 자라면 알아서 피할만한 구인 광고, 즉 우아한 축객령이었다.

보란듯이 구색만 갖춘 구인광고가 남자의 흥미를 끌었다고 한다. 의외로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있던 모양이지. 수업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기간, 마법을 배울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던 소녀에게는 꿈만 같이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음으로 가진 비밀, 일탈, 온전히 자신만의 추억, 시체 같았던 삶에 활력이 돌았던 잠깐의 순간이다.

사람은 한 때의 추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그 경험을 리안 님이 가르쳐주었다.

 

#.6

과도한 마력 사용은 어지럼증과 오한을 유발했다. 온몸의 핏기가 가시는 서늘한 감각이 덕분에 여자는 매일 같이 익숙했다. 타의에 의해 마력이 끌어올려져 밑바닥까지 긁어내 사용된다’. 그러고 나면 차갑게 식은 몸뚱이가 도통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시체는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밤, 떠올렸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무엇일까.

그렇게 슬픈 삶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작저의 사용인들은 다음 대의 가주가 될 줄만 알고 여자에게 친절했고 진실을 아는 일부 사용인들은 영지를 위해 희생하는 여자를 연민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모두에게 아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동그란 마롱 글라세를 입안에서 녹이며 여자는 때론 행복이라거나, 정말 원하는 것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떠올리다가 곧 가라앉혔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비록 닥쳐오는 삶의 풍파가 한 번 더 여자에게서 선택권을 앗아가고 운명에 휩쓸리도록 만든다 해도.

 

#.7

황궁에서 열리는 축하연을 앞둔 어느 날, 남작이 그녀를 불렀다.

백작 이상의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 네겐 그 정도 가치가 있어, 메이데이. 자랑스런 내 딸.”

, .”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도 말거라. 정 안 되면 다른 수도 있으니.”

다른 수? 내내 고개 숙인 여자가 힐긋 양부를 쳐다봤다. 파울로 위실은 잠시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축하연에서 공개될 정보 여하에 달렸지만, 이만하면 오래 기다린 것 같으니내년쯤에는 결혼식을 올리도록 할까.”

누구의? 물음이 맴돌았다. 입 열지는 않았다.

프레데릭과 결혼해서 진짜 가족이 되는 거다. 메이데이.”

, 라버니와요?”

대화 중 처음으로 내뱉은 반문, 남작의 눈이 추궁하듯 양녀를 향했다. 여자는 다시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신은 또 내게 죽여달라고 할까.

 

#.8

남작을 아버지라 부른 적은 없었다. 그는 가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여 년,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함께 보낸 명목상의 형제는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듯 동정해 마땅했다. 우리는 운명공동체였다.

프레데릭 위실은 때론 죽고 싶었고, 때론 세상을 저주했고, 때론 제게 얽매인 가짜 여동생을 동정하다가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 몸을 질투했고, 그러다가도 사랑해주었다.

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질문에 메이데이는 답한 적 없었다.

죽여드릴까요?

거부당했다. 오빠의 자존심이라고 했다.

 

#.9

은인과 재회했다. 세상에 나쁜 일이 찾아오면 그다음에는 좋은 일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 말이 진짜였구나. 기뻤다. 오랜만에 웃음이 났다.

 

#.10

재회한 은인은 제게 또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날 기회, 다른 선택,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정말 바라는 것을 고를 수 있게……. ──정말 바라는 것이란 건 어떤 것일까.

 

#.11

지나쳐온 삶의 여러 갈래를 때때로 여자는 상상했다. 그때 수도원으로 따라갔더라면 어땠을까. 이렇게 마력을 많이 갖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혹시 남작님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그래서 리안 님을 만난 적 없더라면, 어쩌면 더 좋은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이 그렇게 싫지도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고, 이해해버리는 순간 느낄 결핍을, 갈망을 메이데이 위실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이보다 나은 삶을 욕심낼 만큼 자신의 삶에 값어치가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었다.

 

 


사실 001보다 이쪽을 먼저 쓰기 시작했는데 글이 진도가 잘 안 나가서...

쓸수록 너무 그먼씹 같기도 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좀 더 공들여서 후반부도 잘 부풀리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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