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딘테그로 : 혁명의 도화선 25

22. 마녀와 생쥐

: 카리스 라이프니츠 더보기 ──그야, 카리스 라이프니츠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눈을 뜬 자신의 모습이 이전과 다르다면 느낄 지극히 인간적인 당혹감이었다. 유명한 고전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글의 일부를 발췌해 말해보자면,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지난 밤사이에 한 마리 작고 귀여운 생쥐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가 되리라. 귀엽단 말에는 부정을 표할지도 모르겠으나. 커다랗고 넓은 귀, 제 의지를 벗어나 움직이는 꼬리, 조막만한 손발에 손가락과 발가락은 다행히도 다섯 개씩 달려 있다. 두 발로 서서 걷기에는 무리가 없었으며 어쩌면 귀와 꼬리가 달린 것 외엔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 줌 크기밖에 되지 않는 이 모습을 온전한 인..

21. 스포트라이트

: 로블렛 H. 베리 더보기 빛이 켜진다. 조명이 테이블을 비춘다. 머리 위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내리꽂는 빛. 무대 위의 한곳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누군가는 스포트라이트가 익숙했고, 누군가는 아주 조금 몸을 빼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리에 남아 2인극을 펼친다. 물론 실제 극은 아니다. 그저 여자의 이미지가 그랬다. “네 잔에 독을 탔다. ──라고 한다면, 너는 믿을 것인가?” 홍차의 김이 어둠 속에서 촉촉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들려오는 말에 일순 멈추었던 손이 장미잼을 한 스푼 넣어 휘 휘 저었다. 머금자 쌉싸름한 단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 상태로 시선을 들면 감정의 편린조차 비치지 않는 시린 눈동자가 응시해오고 있었다. “저를 흔들어서 이득이 없는데도요.” “이득이 있다면 할 것 같고?” 이..

20. 재의 향

: 개인로그 더보기 Q. 이곳은 아무도 없는 흰 방입니다. 당신 혼자뿐입니다. 긴장을 풀고…… A. 흰 방은 싫어요.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여자는 그 심상을 거부한다. 단호한 목소리, 여자의 시선은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조차도 거부하듯 눈을 감고야 만다. 눈꺼풀이 만들어내는 새까만 풍경으로 도주한다. ─안정적인 환경 제공 실패. Q.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A. 모르겠어요. Q. 좋다거나 싫다거나. 편안하다거나 갑갑하다거나. A. 좋지도 싫지도 않아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요. Q. 정말 싫지 않습니까? A. ……말하기 피곤해요. 누적된 피로, 대화 거부, 단절. 그녀는 몹시 지친 것 같았다. 최소한의 겉치레까지 포기하고 무력하게 고개를 숙인다. 라벤더 컬러의 머리카락이 비처럼..

19. 운명이 안긴 곳

: 니케 아트로포스 더보기 「하지만 가장 비싸고 안온한 새장 아닙니까.」 그 말을 내뱉으며 남자는 이죽거리고 웃고 있었다. 이를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서 짜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비에모드가 기억하는 남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닿지 않을 하늘을 향해 손 뻗던 어리석은 이상의 말로가 바로 이럴까. 그의 날개는 끝이 잘려 더 날지 못한다.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색을 몸에 두르고 남자는 그랬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신이 그의 죽음까지 품고자 하였다. 흑도 백도 아니던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직은 소년이라고 불러도 좋던 그 시절의 니케 아트로포스는 덜 익은 과일 같았다. 다른 말로는 풋내라고 하자. 까마귀도 쪼아 먹지 않을 떫은맛의 소년은 다음, 또 다음을 노리며 형형한 눈을 빛내며 위를..

18. 작은 사자를 졸업하는 당신에게

: 크피르 F. 렌하르트 더보기 작은 사자를 졸업하는 당신에게 La vare. 인베스의 축복이 내리길. 생일 축하한답니다. 졸업 후에 바로 견습 기사로 들어오는 줄로만 알았는데 상반기의 입단 기사에 당신이 없더군요. 당신이 떨어졌을 것 같진 않은데…… 라고 말하면 부담을 주는 게 되어버릴까요? 정말 떨어졌다면 역시 교리 시험이 문제였을까.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주세요. 실패는 다시 도전하기 위한 발판이라 하잖아요. 다른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좋겠네요. 호칭은 당신 말처럼 직접 만나는 날에 들려주기로 할게요. 재회한 당신이 여전히 작은 사자일지, 혹은 갈기를 키운 멋진 큰 사자가 되어 있을지. 생일 선물도 고마워요. 제법 센스가 좋지 않던가요. 액세서리는 거의 하지 않는데 당신이 준 걸 하고 있으니 마음이..

17. 항복 문서

더보기 인베스의 종이되 그의 검 되는 신성 기사단, 이하 아스칼론은 진영의 패배를 인정하고 세크레타 기사단에게 항복하였음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로써 세크레타를 향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그의 요구에 응할 것을 아스칼론 각 기사들에게 명합니다. 우리는 인베스의 영광이 세크레타로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새천년의 여명이 그들로부터 빛나게 될 것을 시인합니다. 우리는 쿠스토스의 법도를 성실하게 이행하며 이후 세크레타의 마땅한 조치를 따를 것을 보장합니다. 만일 이 규정을 따르지 않는 기사가 있을 경우 아스칼론은 그의 대표가 그들에게 적절한 다른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같은 쿠스토스의 신념 앞에 검을 바친 기사로서 정의로운 전쟁론의 원칙을 따라 세크레타 측에 인도적 예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5000..

16. 강요, 선택, 마땅한 권리

: 프레이즈 에버리스 더보기 -왜 나는 탄생부터가 타인의 욕망을 위해 내려지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을 강요받나? 진심은 가장 가파른 다리에서 튀어 오른다. 정제되지 않고 터져 나온 날 것의 말에 너를 통해 거울을 보았다. 너와 내 가진 것 중 온전히 우리가 선택한 것은 몇이나 될까. 쥔 것 없이 작은 손을 응시했다. 죄책감에 잠기고 죄악감에 시달리며 남을 향한 가시보다 더 많은 가시를 스스로 꽂아 넣어, 작은 몸이 가시투성이였다. 가시를 눕히는 법도 배우지 못해서, 네 숨통이 조여드는 것을 보기만 한다. 누군가는 네게 책임을 져야 했다. 가르쳐주지 않은 것, 배워 마땅했던 것. 네가 선택한 것과 선택할 수 없던 것 사이에서.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냐,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가 그렇게 봐서는 안..

15. 새어나온 말

: 크피르 F. 렌하르트 더보기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나왔으나 쪽빛보다 푸르다. 옷을 염색하는 염료란 흔하지 않은 재료다. 더군다나 푸른색이라고 하면 자연에서 그 색을 얻기가 더 어렵다. 그런 중에 청대란 아주 짙고 아름다운 푸른색을 뽑아내기에 알맞은 재료였다. 스케마의 한 영지는 염료가 될 쪽을 재배하곤 했다. 시기가 되면 한아름 수확한 청대를 끓이고 짜 푸른색을 추출해, 염색한 푸른 천을 바깥에 말리면 푸른 하늘 아래로 제법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렇다면 쓰임을 다한 청대는 어떻게 될까? 버려지겠지. 그것은 더는 푸르지도 살아있지도 않다. 어떤 철학자도 말하였더란다. “제자로만 남으면,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 시대는 언제나 더욱 뛰어난 것을 바란다. 청을 뛰어넘는 람. 구시대를 넘어서는..

14. 영웅들에게 축복과 안식을

: 추모로그 더보기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 인베스에게. 오늘 당신의 자녀가 긴 안식을 위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수고한 영웅들에게 축복이 따르길. 그들이 어머니의 은총 아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잘 들어라. 내가 먼저 가도 절대 기 죽으면 안 된다.” 정말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던 건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물어볼 때 적절한 말 하나 고르지 못하더군요. 앞으로는 단원들에게 미리 유언장이라도 적어두라고 할까요. 너무 사기가 떨어지려나. 그래도, 인생에 한 번뿐이잖아요. 행운보다 귀중한 마지막으로 남길 말. 마지막까지 우리를 골 때리는 기사단이라 부르더랍니다. 기억해두세요, 남은 경들. 먼저 간 단장이 관속에서도 이마를 짚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