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탄생 50

48.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 #어린_자캐와_지금의_자캐가_만난다면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어 섬세하게 짜인 그물 끝자락에 방울져 고이던 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한다. 제 몸을 희생해 퐁, 터지고 만 그것은 이윽고 하나 대신 전체가 되어 울림을 널리 퍼트렸다. 오케스트라의 첫음과 같았다.수면 아래로 잠겨 있던 의식이 첫음과 함께 떠오르면 그곳은 방이었다. 기억에 선명한 곳인 동시에 그리운, 제 유년기가 고스란히 담긴 아스테반 가의 방. 마지막으로 들른 기억이 언제였더라. 발홀에 입학한 뒤로는 들를 일이 없었고 아카데미를 졸업 후 에인헤리에 입대하면서는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방을 옮기자는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더는 쓰지 않게 된 곳이었다.그런데 왜 여기 서있는 걸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방안에는 아인델이 있었다. 그러니..

소멸, 탄생 2020.06.11

46. 아름다운 것, 손에 닿는 것

: 르윈 알렉시아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있다면 혜성이라 답할 것이다─, 라고 누군가 말했었지. 천문학자였나. 스스로를 불태우며 깎아나가면서도 멈추지 않는 빛무리. 꼬리를 길게 빼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저 우주를 가로질러 제 궤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혜성.아인델은 우주의 이치에 밝지도 않았고 혜성을 보며 뽐낼 대단한 지식이 있지도 않았다. 혜성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도 글쎄, 간단히 동의하지 못했다.그녀에겐 더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손닿지 않는 광활한 우주의 빛이 아니다. 뻗으면 닿을 가까이에 있는 반짝임이다. ──빛나는 것은 아름답지. 그 빛이 손에 잡힌다면 더욱 아름다울 거야. 아인델 아라크네 아스테반은, 트리플에이의 삶은 그러하였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손을 뻗었고 그 욕..

소멸, 탄생 2019.10.27

45. 나는 아직 전부의 너를 모르지.

: 후이 이샤오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물음표를 따라 섬세한 턱 끝이 기우뚱 기울었다. 어째서 제 옆의 아이가 돌연 이렇게 뻣뻣해져버리고 만 것인지 여기 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봐도 아인델로서는 짐작 가는 일이 없었다.“왜 그러니, 후이?”“아뇨아무것도요영화엄청기대되네요그죠?”그러나 아무리 봐도 기대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기이하다는 그녀의 시선에 후이는 도통 여길 보지 않는 먼 시선으로 어서 자리에 앉자고 재촉만 할 뿐이었다.입구를 나란히 걸었다. 걷는 사이 다시 한 번 추측해보았다. 돌이켜보면 아주 평범한 일과였다. 얼마 전 개봉한 액션 영화의 시사회 초대권이 손에 들어왔고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은 인물에게 보러 가겠느냐 연락을 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종종..

소멸, 탄생 2019.10.08

44. C+

: 장 디뉴엘 “지저분한 얼굴이구나.”꼭두새벽부터 이루어진 회의에서 돌아오자마자 장이 제 파트너에게 들은 첫 마디였다. 장의 얼굴이 단숨에 팍 찌푸려졌다.새벽 순찰조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는 급작스럽게 호출이 있었다. 덕분에 눈 뜨자마자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직 꿈나라인 파트너를 내버려 둔 채 가이드 회의를 치르고 돌아온 참이었다. 회의 자체는 순조로웠지만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는 정보가 또 하나 늘어나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듣는 말이라곤, 겨우 잠을 깨운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아인델의 고개가 느긋하게 기울었다. 빈 손이 뻗어와 수염으로 까끌거리는 턱을 더듬었다.“네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지 않니.”그야 시국이 어느 때인데, 대외적 이미지..

소멸, 탄생 2019.10.08

43. 좋아해주기만 하면 안 되겠니.

: 장 디뉴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저 좋아해주기만 하면 안 되니?”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이 소리로 빚어져 흘렀다.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낯이었다. 눈썹과 눈썹 사이의 골이 깊었다. 붉게 물든 눈가가 유독 도드라졌다. 온통 하얀 빛인 얼굴이라 더 그랬을까.지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무거워 입술 사이로 새는 한숨만이 갈 곳 없이 흐트러졌다.순간의 전부가 여름 한낮의 아지랑이 같았다. 아스팔트가 들끓도록 찌는 태양빛 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더없이 비현실적이었다. 흘러가는 장면을 차라리 거짓이나 신기루라고 의심하는 쪽이 합리적일 것이다.작은 손바닥이 뺨에 얹어졌다. 언젠가는 손톱을 세우며 상처입히기에 급급했던 손이, 평균보다 조금 낮은 체온의 손가락이 뺨을, ..

소멸, 탄생 2019.07.24

42. 금빛 맹수의 입안이었다

: 유해리 아인델에게 유해리의 금빛 눈동자는 원석과 같았다. 태양이라기엔 이렇게 날카롭고 갈고 닦이지 않은 자연 본연의 것일 수 없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도 그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에 손을 다치고 말.그런 유해리의 눈이 제 앞에서는 꼭 이빨을 감춘 야수처럼 순한 빛을 보이는 건 아인델의 소소한 만족 중 하나였다. 이 아이는 맹수지만 나를 물지 않아. 제 앞에 무릎 꿇는 이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오만한 여왕은 그래서 유해리라는 맹수의 입안에 손을 집어넣길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카메라 앞에 선 유해리의 눈은 맹수를, 짐승을, 포식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저를 주인으로 모시던 눈이 이 순간만큼은 깔보는 것 같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됐건 그녀에게서 ..

소멸, 탄생 2019.07.24

41. 梅雨

: 니케 송이송이의 붉은 꽃이 모두 떨어지고 꽃가지 끝에서 동그란 과실이 맺혔다. 봄이 지났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다시 알을 키운 과실 위로 지치지도 않는 듯 이슬비가 떨어졌다. 가느다란 빗줄기는 끊어질 듯 끊어지는 일이 없이 온종일 맺힌 열매와 잎과 가지를 적시고 땅으로 스며 진창을 만들었다. 이 비가 모두 그칠 즈음이면 매실이 익을 것이었다.츠유梅雨의 계절이었다.지구에 비해 한참 작은 행성이었지만 메데이아에도 사계절이란 것이 있었고 장마의 계절 또한 있었다. 이 작은 행성에 장마 시기의 양상 또한 지역별로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지역은 마치 빗소리가 북을 때리는 것처럼 시끄럽고 요란하게, 무수히 많은 화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따갑고 매섭게 쏟아진다던가.그러나 이 지역의 장마는 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흘러..

소멸, 탄생 2019.07.12

39. 오랜만이란다, 예수.

: 독고예수 “나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갈 거야. 나는 괴물이야. 우린 괴물이야, 아인델. 그래도 끝까지 가야지. 혼자 걷게 된다고 해도 가야지. 미안하다는 말은 안할게. 너는 분명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해 줄 거니까.”그 때, 어둠속에서 들려오던 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덤덤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고, 동시에 많은 것을 집어삼켰던 극도로 억눌린 목소리를. 네가 잘 참는 아이가 되길 바랐던 게 아닌데. 힘들 땐 힘들다고, 도움이 필요할 땐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랐는데.그 때, 하지만 너는 힘든 건 내가 아니라고 도와줄 테니 돕게 해달라고, 내 생각보다도 더 굳건히 서 말했을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아이가 너를 돕겠다고 해주었을까.그 때, 나도 한 번쯤 말해보는 게 좋..

소멸, 탄생 2019.05.26

38. 작은 깨달음을 얻었어.

: AU개인 미션+율릭 함메르쇼이 *난데없이 가이드가 되어버린 감각은 그저 기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가이드가 되었다고 해서 특별히 무엇인가가 달라진 느낌이 곧장 들지 않기도 했다. 아직 능력을 쓰지 않았고, 능력으로 인해 찾아오는 광기가 없었다. 다만 제 손바닥을 펼쳤을 때 은색의 실이 휘감기지 않는 것만이 묘하게 위화감을 자아냈다.가이드가 되었다는 감각보다도 센티넬이 아니게 되었다는 감각을 느꼈다. 거기에 든 감상은 ‘서운함’. 인간은 이렇게도 모순적이다.센티넬이 됨으로써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다고 느꼈다. 찾아오는 광기 앞에서 센티넬에겐 가이드가 필요했다. 홀로는 완벽할 수 없음이 나를 구성하는 본질의 일부가 되었다. 완전무결을 꿈꾸는 제겐 맞지 않는 일이었다.그럼에도 센티넬이 된 것은 나..

소멸, 탄생 2019.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