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꽃을 꺾었나 52

48 언젠가 만약에

: 아케치 요아케 더보기 “언젠가 세이라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네에에~?” 어느 따사로운 오후, 도쿄 시내 중에서도 조금 한적한 편에 속하는─관광객보다는 동네 주민들이 잘 아는 맛집의─오챠노미즈 역 골목의 카페에서 드물게 큰 소리가 났다. 얼른 제 입을 손으로 가린 세이라는 이렇게 갑자기요? 난데없이 향해오는 화살표에 아연한 듯 눈만 커다랗게 깜빡였다. 스푼을 입에 문 채 건너편의 요아케는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하고 어디까지나 가정임을 덧붙여 알렸다. 세이라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길 수도 있잖아. 아니, 생기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니까? 세이라가 얼마나 착하고 예쁜데. 잠시만요, 요아케 씨. 누굴 향해 말하는 거예요~ 한 차례 호들갑이 지나가고 나서야 요아케가 포크로 갈아탔다. 좋아하는..

47 좋은 일이 있었어

: 타카하타 이노리 더보기 코이노보리가 펄럭이는 어린이날이었다. 날씨가 맑아 기분이 좋았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아이들과 함께 특별한 뜨개 교실을 열었다. 자신이 만든 걸 뿌듯하게 품에 안고 돌아가던 아이들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세이라도 가게를 조금 일찍 정리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고 있을까? 이제 저녁 시간은 무얼 할까 고민하던 중 전화기가 울렸다. 「세이라, 지금 집에 있어~?」 “네에. 있는데요?” 「그럼 나 5분 뒤에 도착할 거니까.」 “네에. ──에?” 네에에~??? 제 목소리가 커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너머의 상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희미하게 들리는 콧노래를 두고 세이라는 허둥지둥 집안을 돌아봤다. 주말에 춥다고 꺼내두었던 두터운 담요는 소파에 널브러진 채였고 ..

46 가을이 세상에 노란 필름을 씌울 때

: 타카하타 이노리 더보기 가을이 세상에 노란 필름을 씌울 때 안녕하세요, 이노리 군.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지요. 산책을 나갈 때마다 사박사박 밟히는 낙엽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주더랍니다. 이노리 군은 요즘은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그야 얼마 전에도 보았으니 새삼스러운 질문일지 모르지만 모처럼 편지잖아요. 소리 내어 말하는 것 말고 문장으로 적어보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렇게 편지를 적다 보니 문득 생각났는데 늘 소리가 안 나오는 건 저였으니, 글을 적는 쪽도 저였고 상대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라고요. 물론 타인의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글로 적어 남는 것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답장을 써달란 말은 아니에요? 제 편지를 읽으며 어떡하지 고민하는 당신의 표정이 선해요. 후후, 당신은 당신..

45 베일 아래의 꿈

: 타카하타 이노리 더보기 ──꿈속에서 말이죠. 노래하듯 흥얼거리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상대의 답이 돌아오기 전에 선수를 치듯 이어졌다. “꿈속에서 이노리 군이 어느 대감집 자식이었어요. 아주아주 높은 자리였죠.” “꿈에 내가 나왔어?” “나왔어요. 주연이었답니다~” 간장을 발라 구운 떡을 김에 하나씩 싼다. 김에 싸는 속도와 건너편에 앉은 이의 입에 들어가는 속도가 엇비슷했다. 얘는 제법 다네. 우물거리며 나오는 말에 세이라는 그렇죠? 하고 빙그레 웃었다. 단맛 나는 간장을 썼거든요. “간장이 단맛도 나?” “설탕이 없던 시절엔 여러 곳에서 단맛을 찾았다고 해요.” 헤에, 하고 감탄하며 그가 그래서? 뒷이야기를 채근한다. 손은 부지런히 떡을 싸며 세이라는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꿈속에서 본 풍..

44 신년맞이 기차여행 上

: 타카하타 이노리 따르르르르르릉.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공을 때린다. 하루에도 수많은 열차가 왕래하는 도쿄역에서는 한 시간에 열 번이 넘게 울려 퍼지는 소리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초읽기를 하는 안내방송을 따라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뛰어가는 사람들도 매시간 보이는 풍경이었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역무원은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남녀를 발견하고 출발 준비를 하는 차장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이 이번 열차의 마지막 탑승객 같다.“세이라, 얼른~”“가, 가고, 있어요.”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발걸음은 역무원이 보기에도 불안불안했다. 긴 스커트 아래 얼핏얼핏 비치는 발목 스니커즈는 자주 신지 않은 티가 보였고 계단을 밟는 걸음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백팩을 맨 남자는 ..

43 당신은 저를 볼 수 있고, 저는 말할 수 있어요

: 타카하타 이노리 이삿짐 정리가 끝나면 휑한 내부가 조금은 채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방문한 그의 집도 여전히 살풍경하기만 해서, 세이라는 잔소리를 하는 척 한참 신이 난 기색으로 이곳저곳 구석구석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여기엔 이걸 놓고, 저기엔 그걸 두고, 이런 것도 괜찮지 않으려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어딘가의 예술가처럼 팔짱을 끼고 턱을 짚으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자세가 제법 웃겼다. 답지 않게 움푹 팬 미간에 주름부터 말이다.“이노리 군 생각하기에는 이 칸에 액자를 두고 아래 칸에 화분을 둘까요. 아니면 아래 칸에는 인형을 두고 위 칸에…….”“으응, 잘 모르겠는데. 세이라 보기 좋은 걸로 하면 되지 않을까?”집주인의 고민은 그녀와 조금 달랐다. 지난번에 깨달은 건데, 겨울의 맨바닥은 ..

42 미지근한 온기

: 타카하타 이노리 曖昧な温もり “이렇게 놀아주는 친구는 나밖에 없지?”“한가한 친구가 이노리 군밖에 없는 건 맞는 것 같아요.”“……쳇.”가볍게 땅을 발로 차며 그가 툴툴거린다. 웃음을 삼킨 세이라는 그의 팔을 당겨 입구를 넘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놀이공원이었다. 놀이동산이라고도 하고 유원지라고도 하는 바로 거기다. ~랜드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리는데 이번에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랜드 중에서도 초대형 메이저, 바로 그 『디즈니랜드』다.덧붙여 두 사람 다 와본 경험은 있다. 이번에는 즉, 완전 생초짜! 는 아니란 뜻이다.“디즈니랜드는 해마다 시즌마다 테마가 바뀐다고 해요. 그래서 아예 1년 이용권을 끊는 사람도 있다는 거 있죠. 지난번에 본 거랑 다를 거예요. 후후, 기대되지 않나요?”“놀이공원을 ..

41 잼 뚜껑과 조깅화

: 타카하타 이노리 호박 파이를 먹었다.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빼빼로도 먹었지. 또 뭘 먹었더라? 아무튼 많이 먹었다. 디저트만 먹은 것도 아니다. 세 끼 식사도 충실히 했다. 요즘 세이라의 취미는 요리였고, 가정식 외에도 여러 가지 메뉴에 곧잘 도전했다. 1인분보다 2인분을 만드는 쪽이 편했다. 좋았다.결과는 당연했다.“살쪘어.”머리 위로 덤벨이라도 떨어진 듯, 충격 받은 얼굴로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친구의 발언에 세이라는 으슬으슬 추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가요? 으음…, 잘 모르겠는데. 그보다 이노리 군, 지금 몇 시라도 생각하는 거예요. 원체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생활을 하는 편이라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다.하품을 하자 흰 입김이 샌다. 어느새 새벽..

40 쿼터 아이스크림

: 타카하타 이노리 할로윈이 지나고 불쑥, 이노리가 아이스크림 한 통을 들고 찾아왔다. 그가 먹을 걸 들고 방문하는 일이야 빈번했고 그 메뉴가 뜬금없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11월에 아이스크림이네요, 이노리 군.”“먹고 싶어서 사왔어~”지나가다 아이스크림 광고라도 본 걸까? 이왕 살 거면 일주일 전에, 그러니까 10월 31일에 샀으면 좀 더 저렴했을 텐데. 세이라는 절약가였고 이런 소소한 것에서 아주 조금, 아까움을 느꼈다. 동전을 하나, 둘 모으는 게 제법 뿌듯한걸요. 그라면 이유를 두고 아주 단순하게 ‘그 날은 호박파이를 먹었잖아.’ 정도로 답하겠지.그래서 세이라는 호박파이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쿼터 사이즈 아이스크림 통을 열게 되었다.열자마자 보인 것은 꼭 짠 것처럼 초록이 반, 갈색..

39 펌킨 할로윈

: 타카하타 이노리 “이런 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입어달라고 부탁하니 입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보통 할로윈에는 멋진 분장 하지 않아? 그 말에 세이라는 멋있는 분장을 하는 그를 상상해 보았다. 살짝 웃음이 샜다.“장화 신은 고양이님이라면 귀여웠을 것 같아요~”“그것보다 더 멋진 건 없어?”툴툴. 혹은 퉁퉁. 나 아주 불만이 많소, 하고 그는 젖살이 다 빠진 홀쭉한 볼에 바람까지 넣고 흘겨보았다. 그러나 시선 정도로 그녀의 철쭉 같은 미소가 깨지진 않았다. 난장이보다는 장화 신은 고양이가 나을 것 같아서 기껏 제안해주었더니. 사실 세이라 눈에 그는 일곱난장이가 더 잘 어울렸다. 메카에게 부탁하면 이노리를 닮은 일곱난장이 로봇을 만들어줄까.“왕자님이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