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의* 이어지는 로그는 백결 님의 coc 시나리오 '단 한번의 믿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 *
이번엔 바라는 대로 되었어?
바라던 대로 당신을 봐주었을까?
틀리지 않고 나를 위하고 당신을 위하는 선택을.
* *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눈발이 날려들었다.
“지금부터 루 모겐스를 참수형에 처한다.”
피의 향기, 사람들의 절규, 아비규환인 그 사이를 유유히 흩날리는 송이송이 눈발이 펼쳐지는 광경을 꿈결처럼 만든다.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우뚝 선 두 귀의 왼쪽에서는 사명감과 충성으로 뜨거운 목소리가, 다시 오른쪽에서는 마치 영원의 서약이라도 하듯 열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도 그녀의 의사는 없었다. 재판장에 오른 순간부터 그랬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자리를 잃은 패 취급이었다. 주어진 현실을 한 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비집고 들었다. 스스로 무대 위에 올랐다.
───후둑, 뚝.
“에, 에슬리 님! 위험하지 않습니까!? 손가락이 다 잘릴 뻔했습니다!”
“시끄러워!”
그녀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잡은 칼날이 목적으로 한 차가운 남자 대신 뜨거운 피로 적셔 든다. 울지 못하는 그녀 대신 젖어드는 꼴이다. 형편없이 달랑거리는 손가락을 주먹으로 말아 쥐면 온몸의 열도 피도 잃어버린 채 홀로 겨울성의 동상이 되길 자처하던 남자가 그제야 깨어진 얼굴로 다급히 다가왔다.
조금 전의 순교자 같던 낯은 어디로 갔어? 그를 밀어내고 대신에 검을 뺏어든다.
거기서 기다려. 당신은 이 다음이야.
여자의 화는 아직 식지 않았다.
“모두 동작을 멈춰!”
한 때는 생사를 오가는 전장을 호령했던 목소리다.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주목하면 한 번 더 잘 벼려진 목소리가 은색의 검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선포하였다.
“폐하께서 신뢰하는 나다. 내 명령이 곧 폐하의 명이야. 나를 따르지 못하겠다면 다시 말해 폐하의 선임을 의심하는 행위로 받아들여도 좋은가?”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허름한 죄수복 차림은 그녀가 무언가를 선언하고 선포하기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서슬 푸른 눈동자가 장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면 피에 취하기라도 한 듯 살육을 일삼으려던 기사들이 하나, 둘 검을 거두었다.
이윽고 모든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에슬리는 꽂아 넣은 검을 뽑아 허공을 횡으로 그으며 곧은 선을 그렸다.
“이 이상 무의미한 피는 흘리지 않아. 이곳에는 사악한 이교도들도 있지만 무고한 나의 영지민들도 있다. 영지민을 수호하는 것은 나의 책임. 나를 또 한 번 책임감 없는 영주로 만들지 마.”
모두 포박해, 한 자리에 모아. 나지막한 명령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순식간에 반항하는 자들을 밧줄로 구속해 자리에 있던 모든 귀족들과 군중, 병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망연히 서 있던 남자에게 돌아갈 눈이 생겼다. 어떤 것으로도 흠집 낼 수 없는 단단한 검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수은의 시선과 맞닿았다.
“당신이 말해. 골라내. 무고한 자와 무고하지 않은 자를.”
잔혹한 일이었다.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과도 같았다. 당신 손으로 직접 죽을 자와 살 자를 가려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선택 하나에 인간의 목숨이란 것이 가볍게 오갈 것이다.
어쩌면 이제까지도 그가 해왔던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뇌하고 괴로워하고 서서히 제 디딜 곳을 잃어나가며 내몰리던……, 그럼에도 에슬리는 제 말을 거두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그에게 전했다.
어서 해. 당신을 위해서야. 그리고 나를 위해서야.
이윽고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
・
・
저 자는 무고합니다. 저 자는 이교도입니다. 고작 그 단순하고 단조로운 문장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저울질이 전부 끝났을 때 남자는 땀으로 목욕이라도 한 듯 식은땀에 흠뻑 젖어 휘청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사들의 불만 가득한 시선을 에슬리는 무시했다. 대신에 바닥을 나뒹구는 황가의 문장이 박힌 뱃지를 주워들어 낡은 죄수복 위에 달고, 검을 말아 쥔 손에 한 번 더 힘을 집어넣었다.
권위란, 권력이란 이런 것들로부터 나온다. 전부 감옥에 처넣어. 냉랭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을 다물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 둘 나섰다.
“그 자는 어쩌실 겁니까, 대장.”
“이교도의 끄나풀입니다. 주군을 배신한 자입니다!”
“그 자가 영주로 있는 사이 죽어나간 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맞는 말이다. 에슬리는 부정할 수 없었다. 배신당했고 기만당했다. 제가 소중히 일군 영지 또한 그에 의해 엉망으로 짓밟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가 참을 수 없던 것은──……, 짝!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죽은 눈을 한 남자의 뺨에 너절하게 핏자국이 묻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붉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억지로 견디는 시선 끝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맹목해달라고 했지. 믿어달라고 했어. 선택해달라고, 의지해달라고 했어. ……그 결과가 이거야?”
“나를 두고 죽으려 했어, 루 모겐스. 이걸로 우리 더 이상 서로에게 빚은 없는 걸로 해.”
“그리고, ……살아.”
“나를 위한다면,”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살아.”
한 발자국의 거리가 두 사람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사이를 새하얀 눈의 결정이 춤추며 날아들었다. 곧 녹아내릴 듯, 혹은 부서져 내릴 듯 하잘 것 없이 연약하고 가련한 것이었다.
간단히 짓밟혀버리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손쉽게 부서지는 것은 눈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덧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분명 우리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쯤이면 제대로 말해줄 수 있을까. 똑바로 들려줄 수 있을까. 당신을 사랑한다고.
죽음을 앞에 두고 당신에게 짐이 될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고, 삶이 내려온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당신과 아직 더 살아갈 수 있음에 안도했다고. 당신과 살길 바랐다고.
“투옥시켜. 걱정하지 않아도 직접 폐하의 앞에 나서 폐하의 신뢰에 상응하는 충성을 보이겠다. 그러니 그 때까지는 내 일에 불신하지 말고, 의심하지 마. 너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믿어라.”
──있잖아.그 때 루의 손을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함께 도망가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라도, 조금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바라면 안 될까? 당신과의 미래를.
내일이면 루슬리가 700일인데 사랑한단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니(훌쩍훌쩍) 원래대로라면 엔딩 2로 kpc가 로스트지만 그 상황에서 pc가 kpc가 죽는 걸 손 놓고 보고만 있었을 것 같지 않아서... 이렇지 않았을까~ 해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