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말은 하나도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어. 그야 언제나 루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엄청나게 엄청 새삼스러운 말이기도 했어.
아무렇지 않게 “나도 좋아해.” 하고 말했지만 내 좋아해는 루의 좋아해와 달랐으니까,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어.
루에게 친구로 있겠다고 해놓고 한 순간도 루의 친구가 아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내내, 아주 오랫동안 있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 어떻게 전해야 할까. 이미 한 번 멋지게 실패했던 거잖아? 그러니까 두 번째야말로 좀 더 예쁘게, 멋지게 하고 싶었어. 아니, 그냥 내 ‘좋아해’가 루에게 닿길 바랐어. 알아주길 바랐던 것 같아.
다시 생각해도 처음의 고백은 너무 엉망이었는걸. 하나도 멋없고.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얼결에 내뱉고 싶은 말이 아니었는데. 아주 소중하고 소중한 말이니까, 또 특별한 말이니까 조금 더 정성을 담아 말하고 싶었어.
생각해보면 그 땐 좋아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었네.
아니, ──사랑해?
……부끄러워.
그랬는데, 거기서 그렇게 꾹 짜내듯 말하게 될 줄이야. 루 탓이야. 알고 있어? 루가 간절히 말해오니까, 아주 간절하게 나에게 마음을 말해주니까 루의 진심 앞에서 내 진심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비록 그 날의 진심은 서로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우리. 그 때 진심을 나누었지?
~~~으, 떠올리니까 역시 안 되겠어! 부끄러워…!
그 날 같이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만약 그러고서 같이 조사하러 나갔으면 참지 못하고 몬스터에게 몸통박치기를 했을 거야. 외나무다리에서 몬스터랑 같이 데굴데굴 떨어지길 택했을지도 몰라. 그래도 다 옛날 일이다, 그치? ……얼른 그렇다고 말해, 지금도 엄청 부끄럽단 말야.
다 옛날 일이지. 괜찮지 않았던 나날들조차.
루에게 우리의 마음이 다르단 말을 듣고 나서 말야. 그래도 나는 루가 소중하니까, 루도 내가 소중하다고 말해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괜찮다고 이대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몰라. 어떤 마음이든 루의 곁에 계속 있고 싶었거든.
하지만 정작 곁에 있으면서 내내 헤맸어. 그렇다면 우리의 거리는 몇 발짝 사이가 가장 알맞은 걸까 하고. 너무 가까이 가선 안 돼. 그랬다간 친구로 있을 수 없게 돼. 너무 멀면 싫어. 루의 온기가 닿지 않아.
그렇다면 여기서 한 발짝 더. 앞으로? 아니면 뒤로.
자는 얼굴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몇 발짝 사이일까. 손끝에 키스를 받는 건 몇 발짝이면 되지. 멋대로 품에 들어가도 되는 걸까? 이렇게 꼬옥 껴 안겨서, 괜찮은 걸까. 이런 거 친구인 걸까.
루가 예전부터 스킨십에 허물없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를 의식해버리고 마는 건 전부 내가 불순한 탓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예전에 들었거든. 비사우에서는 번뇌를 버리고 진리를 얻기 위해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명경지수라고 해. 어려운 말도 알지?
거리가 멀어지는 건 서운하고 쓸쓸하지만 우리의 거리가 내게 너무 힘들지 않도록 잠깐 수련을 하고 오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모처럼 배도 타보고 말야.
언제 떠날까. 언제가 가장 좋은 타이밍이지? 그 고민만 두 달은 했던 것 같아. 이미 기사단에 내놓을 휴가서랑─장기 휴가가 안 된다면 사직서라도 내려고 했지─, 운항 스케줄이랑 비사우 지도랑 다 챙겨놓고 여행에 들뜨려고 했어.
그 전에 멋지게 다시 좋아한다는 말도 하고.
내가 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루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고 또 사랑받는 사람인지 루는 잘 모르는 루를 알려주고 싶었어.
쉽지 않은 일이었어. 루에게 다시 한 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동시에 루의 옆에 남기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으니까.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고민하고, 혼자서 얼마나 끙끙거렸는지 몰라. 비록 친구 자리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렇게 옆에 있을 수 있는데 포기해야 할까? 흔들리기도 했어.
그렇지만 역시 하나를 포기하더라도 다른 하나는 포기할 수 없었어. 나는 루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길 바랐거든.
겨우 그 하나로 루가 가진 고뇌나 죄책감이나 불안정함이나 여러 마이너스로 고인 감정들이 날아가거나 사라지진 않을 거야.
그래도, 단 하나라도 좋으니까 루에게 쥐어주고 싶었어.
뭘 쥐어주고 싶었던 걸까. 돌이켜보면 아주 막연한 행복감이었던 것 같아. 응, 루가 기뻐해주길 바랐어. 행복하길 바랐어. 나로 인해.
나로 인해 행복해진다면 아주 슬플 것도 같았지만.
모순적인 감정이지. 하지만 그랬어. 루가 만약 나로 인해 행복해진다면 그건 더없이 기쁠 테지만 동시에 나를 더 욕심나게 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아니어도 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루는 사랑받을만한 사람인걸.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바람을 풀어주고 갈망을 포기하고,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었어. 그러다가도 루가 돌아봐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거리를 좁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어.
그렇게 결심했던 날이야, 2년 전의 오늘은. 그 밤은.
다시 한 번 물어볼까.
그 날의 내가 루의 눈엔 어떻게 보였어?
이상하진 않았을까. 어색하진 않았을까.
사실 난 그 날의 내가 잘 기억나지 않아.
그냥 루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것만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거든.
그래도
우리 이야기의 처음만큼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
어느밤이었어. 아주 익숙한, 그리고 특별한, 특별해진.
그 날처럼 말해볼까?
“루, 별을 보러 가지 않을래?”
이번에는 루가 먼저 올라가서 기다려줘. 있지 나, 할 말이 있거든.
당신과 나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는 어느 궤도 위야. 아니, 지붕 위지.
거기는 어때, 루? 혼자 머물기에 밤공기가 쌀쌀하진 않아? 오늘은 얼마나 별이 빛나고 있을까. 나는 잘 보여?
잘 봐줘. 여기 있는 나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나를.
2년간 굉장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수많은 이야기를 쌓았어. 우리의 시간을 종이로 남겼더라면 벌써 책장 하나가 꽉 찰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
시간이라는 건 정말 신기하지. 그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언제 이렇게 왔을까 싶을 만큼 순식간인데 남겨진 발자국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발자국 아래 꼭꼭 고이고 모인 시간들이 있어서, 우리가 담겨 있어서 늦은 실감을 해.
하늘을 나는 고래를 보고 온 걸 기억해? 루는 천 밤을 자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천 밤이 되기 전에 만나고 와버렸네. 루의 밤과 내 밤을 합쳐서 천 밤이었을까. 마법이 있는 세계인데 동화 속 같은 기적은 어째서 이렇게 마법과 다른 느낌일까. 파란 하늘을 바다 대신 헤엄치고 구름 속으로 풍덩 빠지던 지느러미를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아. 내 옆자리의 루도.
이르게 피는 꽃을 보러 남쪽 섬까지 다녀왔어. 남쪽은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며? 출발할 때만 해도 겉옷을 여몄는데 섬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벗어던진 뒤였지. 충분한 햇살과 담뿍 흐르는 물을 머금고 1년을 여유롭게 사는 꽃들의 땅은 얼마나 풍요가 넘치던지. 어떤 걱정 없이도 단향을 마음껏 뿌리고 유혹하는 꽃들이 신기할 정도였어. 있지, 다음엔 좀 더 남쪽으로 가볼까?
작년의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나? 기억이 안 나. 눈보다 더 반짝반짝한 기억으로 가득한 하루였거든. 함께 만든 트리, 나눠먹은 요리, 깜짝 선물, 선물이 만들어낸 마법까지. 있지, 루에게 선물 받은 머리핀 가끔 기사단에서 달고 있으면 다들 놀란 눈으로 보지 뭐야. 챠콜이 이런 것도 해? 하고. 너무하지 않아?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치만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했어. 내가 이런 모습도 한다는 건, 나를 이런 모습으로 만드는 건 루니까. 그 머리핀은 아직도 내 보물이야. 루가 내 보물인 것처럼.
어느새 한 바퀴, 발자취를 돌아봤어. 다시 가을밤이야, 루. 천칭자리의 별이 우릴 바라보며 빛나고 있어.
작년의 나는 루에게 무슨 말을 했더라? 올해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을 했겠지. 언제나 루에게 하는 말은 같은걸.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사랑해줘.
───더없이, 더 많이.
돌아보면남은 발자국, 그 아래 꾹꾹 고이고 모인 시간들 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담긴 감정일 거야.
반짝이는 것이 전부 아름답지는 않기도 해. 그 안에는 굳어지지 않는 불안정함이 있었고 녹아내리지 않는 불안도 있어. 슬픔이 앙금처럼 굳어 굴러다니기도 하고 서운함이 끈적거리며 발목을 잡을지도 몰라. 고통스러운 날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예쁘지 않은 이것들조차도 기억하고 싶은 ‘우리’인 거지?
아무것도 버리지 말라고 해준 루니까, 이런 감정조차도 당신으로 인해 생긴 것이니까, 버리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아.
있지, 루. 지금의 나는 어때? 이런 나도 사랑해줄 거야?
어떤 표정인 나를 가장 좋아해? 어떤 나를 가장 사랑해? 어떤 나든 전부 사랑해?
나는 있지, 전부가 좋아.
전부의 루를 줘.
항상 기쁠 수는 없고 내일 또 행복하리란 법도 없어. 늘 곁에, 라고 말하면서 말처럼 늘 서로의 곁에 있지 않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곁에 없을 때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닿지 않을 때 닿고 싶단 생각이 들어. 아쉬움조차 애틋하고 사랑스러워져.
그렇게 나는 내일을 기대해.
예전에는 영원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어. 지금의 이 감정도 언젠간 빛바랠 거라고, 별 없는 밤처럼 캄캄해지고 말 거라고 두려워했어.
요즘은 말야. 영원 같은 건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세상에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이미 끝난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러니까 영원 이상의 염원을 바라고 내일 또 행복하자는 약속을 나누고 매일매일 손을 맞잡고 확인하는 거겠지.
우리는 쭉 부족한 사람일 거야. 당신의 불안정함은 언젠가 굳어 단단해질 것이 아니고, 내 불안은 어느 날 씻은 듯 사라지지 않아. 그냥 그런 사람인걸.
그런 우리이기에 서로를 더 필요로 하고 채우려는지 몰라. 함께 있는 걸로 완벽해지지 않아도 좋아. 그저 내 빈 조각을 맞춰줘. 아무것도 버리지 말고, 전부로 채워줘.
루 덕분에 욕심낼 줄 알게 됐어. 기대하고 기다리게 되었어. 바람을 움켜쥐고 갈망을 포기하지 않고 보다 간절히 마음을 원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