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을 가득 채웠던 수증기가 넘실넘실 거실로 퍼졌다. 촉촉하고 따뜻한 공기는 소파에 앉아 뒹굴거리던 에슬리에게까지 닿아 자연스럽게 재채기가 나올 듯 코끝을 간질였다.
나도 씻어야 하는데……, 생각만 하면서도 소파에 파묻히듯 기댄 자세가 편해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의 눈앞으로 젖은 멍멍이가 지나갔다.
정확히는 구부정한 자세로 덥수룩한 머리카락까지 푹 젖어 물기를 뚝뚝 흘리는 거대한 멍멍이, 를 닮은 애인.
허리의 끈도 제대로 묶지 않아 아슬아슬한 목욕 가운 한 장만 느슨히 걸치고 카펫 위로 뚝뚝, 제가 어딜 돌아다니는지 발자취를 알리듯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어슬렁어슬렁 걷는 저 사람. 어디로 보나 고의성이 다분했다.
그도 그럴 게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가서 차게 식힌 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어슬렁어슬렁 씻기 전에 읽던 책을 주워들어 대충 걸터앉는 내내 몇 번이고 시선이 그녀에게 닿길 반복하는 게 아니겠어. 꼭 무언가 기대하는 눈이기도 했고 혹은 뻔뻔하게 요구하는 눈이기도 했다. 색이 다른 두 눈은 그러다 에슬리와 눈이 마주치면 우연인 양 가늘게 휘어 웃음 짓길 반복했다. 미소의 너머에 적힌 메시지는 ‘내가 신경 쓰여?’ 바로 그것이었지.
그래도 책은 젖으면 안 되니까 부엌 의자에 비스듬하게 걸쳐 앉아 팔을 앞으로 쭉 뻗고 독서를 시작하려는 능청스러움에 결국 넘어가는 건, 언제나 그랬듯 에슬리였다.
“빨리 이리 와.”
“응? 왜애~?”
“이제 와서 시치미 떼지 말고.”
“아하하. 들켰어?”
들키긴 뭘 들켜. 알아달라고 그렇게 시위를 해놓고. 에슬리의 볼멘소리에 내가 그랬어?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것까지 어쩜 이렇게 얄미운지. 얄미움은 그를 감싸는 수건에 고스란히 담아주어 그다지 상냥하진 않은 손길이 젖은 머리카락을 털기 시작했다.
카펫 위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연인은 새삼 컸다. 소파에 앉은 그녀가 머리를 만져주기에 딱 좋은 높이. 이럴 때가 아니면 루 정수리는 구경도 못하지. 새삼스런 감상을 하며 에슬리는 그새 또 어깨까지 자란 곱슬머리를 열심히 닦아주었다.
“기관지도 약하면서, 이렇게 돌아다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맨날 그래.”
“기관지가 약한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감기에 걸릴 만큼 몸이 약하지도 않은걸.”
“그래서 이렇게 다녀도 괜찮단 거야~?”
“으음~…안 돼?”
이게 다 귀찮아서 그러는 거지. 어딘지 느슨한 그의 나사는 이렇게 생활 곳곳에서도 엿보였다. 다 읽고 나면 읽고 난 자리에 그대로 쌓이는 책이라거나 외출하고 돌아오면 의자에 걸리는 겉옷, 쓰고 남은 약초가 그대로 말라가는 테이블, 자기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던가. 이게 자기 나름의 정리정돈이라는 논리를 펼치며 걱정 마, 괜찮아, 웃어넘겼지.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까지 알 턱이 없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지만…….
“루는 나를 잔소리쟁이로 만들어.”
“에슬리도 나를 그렇게 만드니까 똑같네.”
기껏 한 불평이 고스란히 돌아온다. 생각해보면 그 부분은 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소홀한 건 어디 연인만 탓할 게 되지 못하지.
할 말이 없어진 에슬리는 얌전히 그의 머리를 마저 털었다.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연인의 입에서는 나른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 좋아, 루? 슬쩍 묻자 응, 무척. 하고 답이 들렸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에슬리는 그의 머리칼 위로 살짝 코끝을 부비다 쪽 소리도 나지 않는 깃털 같은 입맞춤을 남겼다. 머리카락 위에나 간신히 닿았을까. 연인은 절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이상하지. 익숙한 샴푸 냄새일 텐데 그의 냄새와 섞여 설레는 향이 되어버린다. 그 향을 조금 더 맡고 싶어서 에슬리는 그의 머리가 뽀송뽀송하게 다 마를 때까지 한참을 수건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 또한 이 시간을 좋아함을 숨기지 못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