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언니의 펜이 리듬감 있게 데스크를 톡톡 두드려요. 다른 한 손으로는 계산기를 툭툭 두드렸는데요. 제가 숫자를 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오더라고요. 정말 이만한 에너지가 프라네타에게 잠재돼 있다고?
놀라는 제 눈치에 언니가 눈꼬리를 예쁘게 접었어요.
“들어봐, 디모넵. 라이지방은 안 그래도 자원이 부족한 곳이잖아. 어느 지방을 가도 여기만큼 뭔가 내세울 자원이 없는 곳은 없었어. 예를 들어 알로라는……”
우리 지방은 다른 지방에 비해 역사가 짧으니까 그 뒤쳐진 만큼 따라잡기 위해서는 지역발전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게 도저히 이 땅이 가진 자연적인 힘만 가지고는 어려운 거야. 그런데 여기에 만약 프라네타의 에너지를 끌어온다면? 그 힘을 가공해서 동력원으로 바꿀 수 있다면, 엄청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는 언니의 얼굴은 솔직히 말해서 “라이지방을 위해서”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그 힘을 ‘가공’한다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가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그 힘으로 ‘강해지는 것’에도 관심이 있어 보였고요.
어쩌면 그렇게 해서 마이너 포켓몬도 메이저 포켓몬도 없는 평등을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요.
“실례잖아. 난 제대로 「공생」을 생각하고 있는데.”
“헤헤.”
하지만 진실이 어느 쪽이든 제가 언니에게 뭐라 말할까요. 언니가 가진 지적 호기심에 공감해서 오늘 이 자리까지 함께 연구해온 것인데요. 물론 제 관심 분야는 프라네타의 에너지를 이렇게 저렇게가 아니지만요. 그래도 언니와 함께 하고 싶었어요.
텅 빈 연구실, 연구원들이 남긴 사직서나 사퇴서만이 쓸쓸히 쌓인 입구의 상자, 널브러졌던 서류와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연구 자료들, 나야 박사님이 남긴 몇 십 년 세월의 정수, 언니가 이어 받고 싶었던 것들.
그러나 한 순간의 실수로 그릇된 것이라 낙인 찍혀 지금은 이 연구실에 불이 켜진다는 것만으로 아니꼽게 보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있어요. 우리는 그 시선들을 견디고 있고요. 버려진 연구실을 치우고 정리하며 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사람이 불쌍하다? 아니면 아깝다? 그도 아니면──,
지금 오드리 언니는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서 즐겁게 배우고 익히고 성장해나가고 있어요. 겨우 언니가 바라던 ‘나만의 것’, ‘나다운 것’의 피스를 하나씩, 하나씩 모아서 자신을 채우고 있죠. 그 표정이 정말 즐거워 보여서, 또 애틋해 보여서,
저는 언니와 함께하는 일에 아무런 불안도 위기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2.
달리아 씨에게 연락이 왔어요. 「최근 라이지방에서 주기적으로 어떤 에너지원이 관측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번엔 몇 년 만이었죠. 그렇지만 더는 서운함 같은 건 느끼지 않으니까요. 그보다 제게 이런 소식을 전해준다는 건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인정받은 것 같기도 했어요.
라이지방의 지도를 펼치고 달리아 씨가 알려준 관측 지점을 표시했어요. 한 번은 서리산맥 근처, 한 번은 소소리 숲, 한 번은 겨루마을. 아주 희미하게 누림마을 근처. 관측된 에너지원의 그래프를 살피고 파동을 연구한 자료도 넘겨받았어요.
꼭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독특한 힘, 그 힘이 나타나는 순간 주위의 시간이 멎어버리는 듯 했다는 사후보고, 뒤늦게 따라가 보면 중력이 기이하게 뭉개진 것 같은 땅의 흔적, 뒤집힌 냄새.
이를 테면 깨어진 세계의 입구가 잠시 나타났던 듯한…… 전설 속의 기라티나가 지나간 것만 같은 자국들.
기라티나가 왜 이곳에? 무슨 목적으로? 정말로 그 포켓몬은 존재하나?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났어요. 하지만 지금의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잖아요?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앎을 추구하는 것. 진실을 깨치는 것.
이번에 펜을 쥔 건 저였어요. 화이트보드의 가운데 선을 긋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었죠.
“깨어진 세계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 세계와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어요. 다만 서로 다른 차원이어서 두 개의 차원이 겹쳐져 있을 뿐이죠. 그리고 이 세계의 부정, 오염, 붕괴 같은 것들이 전부 깨어진 세계로 흘러가서 이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준다고 해요.”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에너지가 모여 있다는 거지?”
깨어진 세계엔 아무것도 없다면 어차피 그곳의 에너지는 놀고 있는 거잖아. 언니의 말은 늘 경쾌하고 명료하다니까요. 저는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어요. 만약 그 입구를 이쪽에서 열 방법을 찾는다면, 안정적으로 입구를 고정시킨 채 그곳의 ‘놀고 있는 에너지’를 가공해 이용할 수 있다면, 물론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는 일이죠.
“정 안 되면 기라티나라도 잡지 뭐. 뭘 주저해. 이건 기회라고.”
오드리 언니가 이렇게 말할 때면 무엇 하나 어려울 것 없고 아주 단순하고 간단해 보인다니까요. 우리가 시도해서 실패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손해 볼 것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언니는 평소엔 쉽게 보이지 않는 누그러진 미소를 그렸어요.
“헤이거가 있는데 내가 무모한 짓을 할 리 없잖아.”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치사하지 않나요. 정말 부정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갖고 있어서, 저는 넘어갈 수밖에 없던 거예요.
“아, 그치만 우리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들 듣기 전에 걱정부터 할 게 뻔하니까 모두에겐 비밀이야. 디모넵도 올리브 씨에게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네-에.”
리브에게도 비밀을 가져버리는 건 조금 죄책감이 드는 일이었지만, 나중에 다 끝나고 나면 설명해줄 계획이었어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