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목새마을에서 지낸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어요. 한 번 적응하고 터를 잡고 나니까 어찌나 세월이 빠르던지. 팔름 씨에게 처음 전망 좋은 2층집을 소개받았을 땐 깜짝 놀라기도 했었는데요. 리브랑 둘이 각자 방을 고르고 소파며 식탁이며 가구부터 차근차근 채워 넣는 사이 이곳이 새로운 우리 집이라는 것에 적응했어요.
이사 온 첫날엔 새 집 냄새가 빠지라고 온 창문과 문을 다 열어 바람이 통하도록 둔 채 마을 분들에게 인사를 다녔어요. 팔름 씨를 따라서 자기소개를 하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씀드리고, 한 분 한 분이랑 악수도 했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마을 풍경을 눈에 담아두었던 기억이 나요. 한 달 전 장갑을 사간 손님을 기억하는 사장님부터 시작해서 명물 빵집, 성실한 채소가게, 생선이 들어오는 날 따위를 메모하며 상점가를 구경하고 지리를 익히고 다음날엔 리브랑 같이 식기며 생필품들을 또 한가득 사오고, 며칠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바빴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리브는 본격적으로 목새 체육관의 인수인계 준비를 하고 저는 저대로 목새 연구소에 들어가는 일을 상담하고, 서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가는 한편으로는 함께 사는 일에 차근차근 익숙해져 갔어요.
아무래도 3개월이나 함께 생활을 하고 심지어 같은 방을 쓰기까지 했으니까 걱정했던 것보다 공동생활은 금세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오히려 리브랑 방을 따로 쓰는 게 쓸쓸해서 종종 찾아가기도 했어요.
물론 익숙한 한편으론 3개월 사이에도 몇 번이나 반복하던 사소한 다툼도 있었지만요. 의견이 맞지 않아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고 토라지고 그래도 결국은 화해하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지나갔는지는 제 5년 넘은 다이어리를 보면 될 거예요. 리브도 종종 슥 보고 가니까요.
아, 하지만 최근에는 아니네요. 근래의 제 다이어리는 늘 방 책장 깊숙한 곳에 꽂혀 있어요. 다이어리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니는 버릇 좀 고치라고 투덜대며 챙겨주던 리브 말을 갑자기 듣게 된 건 아니에요. 그냥, 리브도 읽으면 안 될 이야기가 생겼을 뿐이죠. 신기하죠? 이제껏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생겨버리고 말았다는 게.
언젠가 예전에 말이죠. 리브가 했던 말이 있어요. “꼭 서로 모든 걸 알아야만 해? 그렇게 해야만 친해지는 게 아니잖아.” 그 당시의 저는 리브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런가? 하지만, 좋아하면 더 알고 싶어지잖아. 더 알려주고 싶잖아. 하고
지금이라면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아요. 그 때 리브의 의도와 지금 제 이해는 분명 다르겠지만, 저의 마음을 리브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친밀한 사이로 남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는 거죠.
아니,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요. 알려주고 싶지 않았어요. 제 마음을.
분명 리브를 아주 곤란하게 할 테니까요.
14살의 디모넵에게 올리브는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19살의 디모넵에게 올리브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여기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을까요?
・
・
・
「디모넵은 연애 안 해? 좋아하는 사람 없어?」
「에, 갑자기요? 음~ 그치만 특별히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언니가 행복해 보이는 거 보면 저도 궁금하지만요. 제게도 저런 표정을 짓는 날이 오는 걸까요? 간질간질하고 두근거리기도 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있자 오드리 언니는 씩 웃으면서 제게 속삭여왔어요.
「마음의 준비는 미리 해두지 않으면 불시에 찾아온다고?」
하지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에요. ‘특별히 좋아하는’ 건 어떤 기분인 걸까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오드리 언니가 말한 것처럼 어느 날 불시에, 운명처럼 찾아오는 걸까요?
막연히 가상의 누군가를 떠올려보려고 해도 말이죠. 떠오를 리가 없잖아요.
“벚꽃 잎이다!”
언니랑 오랜만의 데이트를 마치고 목새마을로 돌아오자 분홍꽃잎의 바람이 저를 반겨주었어요. 너른 대지 위에 잔잔하던 목새마을이 이렇게 봄철이면 분홍색으로 물들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에요. 리브와 이곳에 이사 와서 갓 심었던 벚나무 묘목이 점점 다음해에는 더 늘어나 지금은 역사 근처 산책로까지 쭉 이어지게 되면서요. 마을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지 뭐예요. 여전히 북쪽으로 한 지대 올라가면 봄이 와도 눈이 쉽사리 녹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고 예쁜 거 아닐까요? 눈벚꽃이라고요, 후후.
막 기차에서 내려 테리와 함께 산책로를 따라 목새체육관까지 걸음을 옮겼어요. 봄바람이 기분 좋아 얼마든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리브 생각도 났고요.
리브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봄을 맞은 목새 체육관은 새로운 도전자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요. 그 중 리브의 배지를 얻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어요. 관장에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난이도 조절 하는 게 어려워서 모두를 울려버리거나 반대로 너무 쉽게 배지를 주거나 해서 골머리를 썩히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느새 베테랑 관장님이라 이거죠.
타이밍 좋게 목새 체육관에서 막 도전자가 나오네요. 저 표정은~…… 배지를 얻었구나! 긴장이 겨우 풀린 듯 삐질삐질한 얼굴을 하면서도 손에 쥔 걸 만지작거리는 게 무사히 실력을 증명한 모양이에요. 친구와 같이 왔는지 나란히 옆을 지나는 덕에 저는 우연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글쎄,
“목새 체육관 관장님 정말 강하더라. 꼼짝없이 지는 줄 알았어.”
“게다가 쳐다보는 시선… 되게 무섭지 않아?”
“맞아. 분명 웃고 있는데 눈빛이 날카로워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랬던가? 그야 리브, 기분을 따라서 안대를 벗고 배틀을 하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은 조금 놀랄 수도 있지만 특별히 무서운 생김새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 뭐어, 관장님의 위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어요. 저도 처음에 관장님들과 대면했을 때 그 위압감에 밀리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다들 리브를 잘 모르네. 괜히 제가 다 아쉬운 기분이더라고요. 리브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멋진지 모른다고요.
“아, 리─브─!”
체육관으로 들어가자 리브는 다음 도전자가 과연 관장 앞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 지켜보던 중이었어요. 그러다 저를 알아차리고 돌아보는데,
‘이상하다. 왜 갑자기……?’
──오드리 언니와 도전자들이 연이어 이상한 소리를 한 탓이었을까요? 언제나 보던 표정이 어쩐지 유난히 크게 다가오는 기분 있잖아요.
바로 오늘 아침에도 본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설기도 하고. ……갑자기 쿵, 하고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이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그 얼굴이, 표정이 문득 당연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속수무책으로 설레고 만 거예요.
리브는 단지 평소처럼 웃어주었을 뿐인데도요.
어쩌면 이건 우연처럼 아주 불시의 일인 동시에 예언처럼 대단히 예고된 일이었어요.
무슨 뜻이냐고요? 그야, 아주 오래 전부터…… 제게는 리브 이상의 사람이 없었단 뜻이에요.
깨닫지 못했던 아주 오래 전부터 리브는 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 애정의 색이 달라진 지금도.
저는 되도록 이 감정을 숨기고 싶었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저는 감정을 숨기는 일에 서툰 모양이에요.
・
・
・
“너…… 요즘 왠지 이상하지 않아?”
“엑,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그, …내 과민반응이라면 상관없지만 묘하게 날 피하는 것 같은데.”
나한테 뭐 서운한 일이라도 있었어? 하고 물어보는 시선에는 벌써부터 미안한 듯한 기색과 의아함이 담겨 있었어요. 리브가 의아해도 어쩔 수 없지.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인데. 저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우물우물거리다 슬쩍 눈을 피하고 말았어요.
이건 리브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리브가 신경 쓸 일도 아닌데.
리브를 향한 감정인데 왜 신경 쓸 일이 아니냐고요? 제 이 감정에 리브는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는걸요. 당연한 일이에요. 저만 잘 하면 되는 거라고요. 저만 잘 하면.
그러나 한 집에 사는 이상 무한정 도망칠 수야 없겠죠. 낮에는 이렇게 저렇게 서로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지만 외박을 할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정말 외박이라도 했다간 더 걱정할 테고요. 하는 수 없이 미적미적 밤늦은 시간에 들어오자 리브는 기다렸다는 듯 거실 소파에 앉아 절 쳐다봤어요. 저는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는 기분이었죠.
자, 우리 대화라는 걸 해보자.
하고 자리를 펴는 리브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요?
“나, 독립할까?”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온 말이라곤 이런 것이었고 상처받은 상대의 표정에 순식간에 부정했어요. 리브는 정말 내가 너에게 뭘 잘못했니? 하고 자기 얼굴을 쓸어 문질렀는데 답답하고 속상한 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게 아닌데. 정말로 아닌데.
하지만요. 하지만,
리브는 저를 가족처럼 아껴주고 좋아해주는걸요. 그런 리브에게 제가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려봤자 서로 불편하게 할 뿐이에요.
저도 리브가 아주 좋았고 지금의 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 꾹 참으려 했고요.
“……리브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그러나 다 틀려버리고 말았어요.
심혈을 기울여서 쌓아올린 마지막 블록이 이제껏 쌓아올린 전부를 와르르 무너트리듯이, 기껏 잘 구운 스펀지케이크가 한 순간에 뭉개지듯이 간단히 또 허무하게, 덧없을 만큼.
궁금했어요.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나 봐요. 굳이 열지 않아도 뻔한 상자를 열고 만 판도라처럼 해선 안 될 질문을 하고 말았어요. 제 한 마디에 리브가 어디까지 다 알아차렸는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어요. 너……, 그 한 마디와 함께 주춤거리고 자기 입을 가리는 모습에서 다 보였는걸요.
이런 걸로 속내를 숨기기엔 우린 너무 서로를 잘 알게 되었던지도 몰라요.
기묘한 것은요. 차라리 리브에게 다 들켰다고 생각하고 나자 마음이 홀가분해진 거예요. 아, 더는 숨길 것도 없어졌구나.
5년 사이 제 키는 거진 20cm를 더 자랐고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은 과거의 리브만큼 길어졌어요. 더는 어른들 사이에서 마냥 아이 취급을 받지 않아요. 잘 자랐구나. 에 뒤따르는 말은 이렇게 예쁘게 자랐는걸. 누구든 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거란다.
정말요? 정말일까요? 그럼, 리브는 어때?
당황해서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피하는 리브에게로 한 걸음에 다가가 섰어요. 소파의 한 축이 두 사람 분의 무게로 기우뚱 내려앉으면, 한쪽으로 묶은 머리카락도 그만큼 어깨를 따라 기울었죠. 불도 켜지 않고 기다린 리브가 나빠요. 어두우니까 잘 보이지 않잖아요.
저는 이렇게 리브를 보고 있는데. 눈을 또렷하게 뜨고요.
“내가 만약 리브를 좋아한다면, 어떨 것 같아?”
역시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저는 정말로, 몹시도, 이 마음을 리브에게 전하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