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손에 들었다. 한 모금 차를 마시면서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어. 자연스럽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손바닥에는 그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잘 먹었어?”
“응. 맛있었어, 엄청.”
설거지를 마쳤는지 옆으로 같은 찻잔을 들고 그가 앉았다. 이쪽을 향해오는 온화한 시선에 찻잔을 들지 않은 손을 쥐락펴락하다가 잿빛 도는 머리로 손을 뻗었다. 조금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웠지만 역시 꿈에서 본 털의 감촉과는 달랐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아주 이상한 꿈에서 만졌던 그를 닮은 늑대의 감촉과 말이다.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 늑대와 사람만큼의 차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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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조금 긴 임무였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겨우 그리운 곳으로 돌아와 별 것 아닌 대화를 나누며 그의 요리를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렇게 피곤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마치 누군가 일부러 재우려는 것처럼 의식이 잠시 정전되었다가 돌아왔을 때, 나는 전혀 낯선 곳에 있었다.
사방이 희고 넓은 영문을 알 수 없던 곳. 그 때는 당황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다시 떠올려보면 일부러인 듯 대단히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악취미인 것 같은 화려한 조명이 여럿, 그리고 시선을 앞으로 하자──,
웬 케이지가 2개?
철제의 우리였다. 그다지 낯선 건 아니었다. 이렇게 커다란 건 드물지만 사나운 짐승이나 변이종을 운반할 때 곧잘 쓰던 거니까. 그렇다면 혹시 투기장에 끌려온 걸까?
“이트바테르에 갔던 게 꿈이거나, 이게 꿈이거나. 둘 다 꿈이 아니라면, 루가 그새 나를 팔아넘기기라도 했나.”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 그리고선 왼쪽의 우리에 다가갔을 때 그 안에 있는 거대한 늑대를 보고 절대 지금이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그렇잖아. 만약 꿈이 아니라면 멀쩡히 내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늑대로 변해? 사일란이 변이종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아 이 말은 절대 불가능하진 않을 것도 같단 의미다.
오른쪽 눈동자가 왼쪽보다 옅은, 푸른 기 도는 잿빛 털의 늑대. 나는 제법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반대로 눈앞에 벌어진 현실도 빠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 이 안에 들어가 있는 거야? 누가 족쇄 같은 걸.”
풀어줘야지. 풀어주는 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자 슬그머니 곧잘 짓던 미소─늑대인 채로─를 보이는 그를 보고 조금 기가 찼던 것 같다. 금세 더 기가 찰 일이 생겨버렸지만.
무슨 뜻이냐 하면 늑대인 그를 풀어주고 나니 오른쪽 케이지에는 사람 모습인 연인이 있었다는 거다.
“…조금 섭섭한걸, 에슬리. 나보다도 그 늑대 걱정만 잔뜩이라니.”
뭘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자연스럽게 태클부터 걸어버렸다. 그는 양 손에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 또한 익숙한, 마력을 차단하는 마법사용의 수갑이다. 열려 있던 왼쪽 우리와 다르게 이쪽은 심지어 자물쇠로 잠가놓기까지 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늑대는 풀어놓고, 마력을 차단한 마법사는 가둬놓다니. 무슨 속셈인 걸까.
또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늑대가 그를 굉장히 경계하고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연인은, 내가 아는 루 모겐스는 동물이 잘 따르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굉장히 잘 따르는 늑대가 그에게는 이를 드러낼 정도로 적대심을 내보였다. 거기에 대응하듯 그도 몰래 속삭였지.
‘그 늑대, 조심하는 게 좋은 것 같아.’
쌍방으로 이래서야 동족혐오 같은 걸까. 자기가 자기를 싫어하는?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오른쪽 우리의 그가 루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도, 나를 보는 시선도 같았으니까. 몇 가지 작은 위화감─가령, 생각보다 그가 우리 안에서도 느긋하게 있다거나 종종 서늘한 태도가 보인다거나 하는─은 있었지만 그 작은 위화감을 붙잡고 그를 의심하기에는 자고 일어나서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이 아주 수상하고 의심스러웠다.
다만 우리 안의 연인을 의심하지 않던 것과 상관없이 늑대를 향한 신뢰 또한 그대로였다. 그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지. 내 감은, 그리고 애정은 한 사람을 향하게 되어 있으니까.
───돌이켜보면 결국 이 때부터 나는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을 뿐 우리 안의 루를 의심하고 있던 셈일까.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안의 루가 진정 내 연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채였으니. 말하자면 생각을 유보해둔 채 움직였다.
그 유보는 꼭 어서 열어보라고 유혹이라도 하듯 제일 처음 들어간 방에서 열쇠를 주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오른쪽 케이지를 여는 열쇠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마치 열쇠를 줍지 않은 듯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안의 루가 진짜 루라면 내 경계와 신중을 이해할 거야. 나중에 사과하면 돼.”
어차피 그 또한 우리에서 나오는 게 그다지 급해 보이지 않았고, 뭐랄까…… 아마 이 또한 감이었겠지. 열 필요 없다고. 혹은 열어선 안 된다고. 그렇게 믿고 행동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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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 아이는 어리광이 아주 능숙했는데.”
“무슨 얘기?”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그는 옅게 기분 좋은 기색을 내비치며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 몸을 일으켜 그 정수리에 키스를 하자 쿡쿡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보답이라는 듯 그의 팔이 허리를 감는다. 물음에 난 고개를 흔들었다.
“루도 어리광부리는 게 능숙해졌다고.”
“그럼. 같이 익숙해지기로 했잖아. 너는 아직도 어색한 것 같지만.”
아직도 어색하단 그 말에 달리 대꾸는 못하고 자연스레 입술만 내밀었다. 나도 차차 늘고 있어. 이보다 더 늘어나면 루를 곤란하게 할 거라고?
그러고 보니 단순히 경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질투하고 불쾌해하던 늑대, 그러니까 연인이 귀여웠는데. 좀 더 빨리 확신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열쇠를 얻은 다음에 뿌듯하게 앞발을 내밀던 늑대를 떠올리며 나는 조금 더 그 털의 감촉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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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연인과 늑대 모습의 연인, 당황스러웠지만 무엇이 되었건 중요한 건 이 상황에서의 탈출이었다. 하얀 공간이 가진 꿍꿍이를 모르는 채 나는 빠르게 닫힌 방들을 조사해나갔다. 가장 오른쪽 방을 먼저, 다음은 중간 방을, 하지만 중간 방은 잠겨 있어서 다시 가장 왼쪽 방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주를 하고 큰 방으로 돌아와 가운데 방의 열쇠를 찾아 마지막 방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건 ‘신주’라고 하는 묘한 주술과 변이종 토벌일지에 적힌 늑대의 기록, 그리고 제물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안의 그가 적어준 기묘한 이름…. ‘Loo Mogens.’
그에게 이름을 적어달라고 한 건 확신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바라던대로, 혹은 내게 일부러 가르쳐주려는 듯 잘못된 이름을 적어주었다. 덕분에 감에 근거를 더할 수 있던 건 다행이었지만, 이 뒤로는 다른 것 때문에 굉장히 고민했다.
「네가 이 곳에서 나가고자 한다면, 내게 대가를 바친다면 내보내 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가란 너, 혹은 제물이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대가를 바치라고 하였다. 멋대로 데려온 주제에 잘난 듯이 말하긴. 그러면 무엇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신주를 진짜 대신 이용한다는 것까진 이해했다. 신주가 제물을 대신해 희생되리란 거겠지. 하지만 어떤 이름을 적어야 하지?
“머리 쓰는 건 내 역할이 아닌데.”
반드시 최선의 답까지 도달해야 했다. 그 사이에 몇 갈래나 있는 비슷하고 아주 틀리지는 않은 애매한 답이 아닌 가장 좋은 답을 골라내야 했다. ‘우리’가 함께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
만약 신주가 정말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면 신주에 내 이름을 적어도 문제없을 터였다. 이곳에 우리를 부른 변덕스러운 신에게 잠깐 내 행세를 한 신주를 바쳐 돌아갈 길을 열어달라고 하면 아주 간단한 문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은 건,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아가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고민하는 동안에 늑대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그야 늑대는 말할 수 없지만─다만 내 곁에 있어주었다. 동물이 나를 따르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 아마도 처음으로 짐승이 가진 털의 감촉이나 체온을 한껏 만끽했다. 그러면서도 깊어지는 생각에 몇 번이나 한숨을 뱉고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그에게 기댄 채 중얼거렸다.
“언제든 있지. 자기를 희생하는 건 가장 편한 방법이야. 그렇게 하면 스스로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거든. …후회보다는 책임이 덜한 걸까.”
사실은 그럴 생각이 없음에도 그 말을 입에 담은 건 조금 짓궂은 행동이었던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표정으로 내 옷자락을 무는 그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었지. 풍성한 털은 언제 만져도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이었다. 나보다 체온이 높은 상대와 접하긴 또 오랜만이라 그 온기에 제법 안정을 받았다. 그리고 의지를 다졌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좀 더 무거운 책임을 지고 하는 일이야. 루가 소중히 해주는 나니까.”
뒤이은 말은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그에게 들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도망치지 않고 힘낼 테니 당신도, 괜한 생각은 하지 말라고.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하는.
──그렇게 호기롭게 던진 첫 결과는 좀 아득한 것이었지만. 우리 안의 ‘누군가’가 그가 아니란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로 고통스러워하는 걸 듣고 싶진 않았다. 그의 몸일지도 모르는 몸에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선 얼마나 헤맸더라. 종이를 가지러 갔다가, 없는 마력을 긁어모아 몇 개나 되는 신주를 만들었다가, 우리 안의 ‘누군가’에게 가서 탐색전을 벌이기도 했다.
애초에 말야. 왜 이렇게 말을 꼬아놓은 거야. 원망도 좀 했다. 잘못된 이름을 적으면 이름을 댄 사람이 신주를 대신한다. 옳은 이름을 적으면 신주가 그 사람의 몸을 대신한다. 헷갈리는 게 당연하잖아. 한 번 잘못된 답을 냈다가 그의 괴로운 목소리를 들어버렸다. 두 번 틀리면 어떡하지, 내 잘못으로 그를 잃으면 어쩌지. 두려웠다. 몹시도 두려운 일이었다. 주저하고 망설이고, 그만 괴롭히고 얼른 답을 내놓으라고 어딘가에서 유유자적 보고 있을 신의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신은 저 위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면 나는 필사적으로, 또 필사적으로 발버둥칠 뿐이고. 발버둥치는 건 익숙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간절하니까.
“내가 편할 수 있는 길은 힘내서 피했으니까, 칭찬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겨우 마음을 정하고 마지막으로 고른 종이인형을 조각상에 넣었다. 조각상은 기다렸다는 듯 매정하게 입을 닫았고 동시에 뒤쪽 방에서 비명인지 웃음소리인지 알 수 없는 절규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안심해도 되는 걸까? 나는, 최선의 답을 찾았을까?
그렇게 불안에 잠길 즈음……,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에슬리.」
그제야 나는 다시금 의식을 앗아가려는 강제력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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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꿈이되 꿈만은 아니었던 이상한 경험이었다. 깨고 나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그를 붙잡은 채 현실감을 채워나갔다. 돌아왔어. 일상이야. 그가 곁에 있어. 괜찮아. 조금씩 채워나가던 현실감의 마지막을 허기로 채운 건 참 다운 일이었다.
“정말 루와 서커스단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끔찍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내가 말한 게 루는 들리지 않았던 걸까?”
너와 함께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그라면 이렇게 답할까. 그리고는 또 내가 약한 짐짓 곤란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넘어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넘어가버리는 내가 나쁘지 그저.
개를 키워볼까. 하고 든 건 그다지 맥락 없는 발상이었다. 그 때의 털의 감촉이 묘하게 자꾸 손에 남기도 하고, 동물에게 사랑받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네 란 생각이 든 덕이다. 하지만 동물을 들여 봤자 날 좋아해주지 않으려나. 루 쪽으로 가버리면 그건 재미없는 일이 될 테고.
“동물에게 질투하는 자괴감도.”
역시 사양이다. 혼자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젓자 그가 응? 하고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으응, 아무것도. 느릿하게 답하고는 대신이라는 듯 장난처럼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나른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익숙하게 그의 머리에 다시 키스를 남겼다. 오늘도 변함없는 소중한 일상이었다.
아 즐거웠어요. 에슬리가 뒷사람이랑 달리 처음부터 냉정했던 게 재밌었다. 이후 티알 갈 때마다 에슬리의 감은 대체로 귀신 같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