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시간이면 오래된 저택의 복도 한편에서 흰 발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은 그늘을 벗어남에 따라 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 불이 켜진 촛대,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와 서늘한 무표정까지 찬찬히 형태를 갖추어나갔다. 저택에 사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낡은 그림 속 인물과 꼭 닮은 소녀다.
그림 속 소녀는 저택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초상화는 아니라고 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걸리게 되었는지, 누구를 그런 것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오래도록 복도 한편에 방치되어 왔다. 점차 그 자리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는 것조차 잊혀질 만큼.
빈 방이 많은 서관의 복도는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았다. 덕분에 바닥에 얕은 먼지가 깔려 있기도 빈번했다. 그 위로 맨발의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발자국의 주인이 그림에서 걸어 나온 소녀라는 것은 아직 수다쟁이 하녀들도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놀라지 않아?”
설마 하녀들보다도 저택의 꼬마 도련님이 제일 먼저 알게 될 줄이야. (아마도) 유령을 앞에 두고도 무서워하긴 커녕 호기심을 보이며 눈을 빛내는 도련님에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 도련님이 학구열에 불타는 나머지 밤잠도 곧잘 거르고 책을 읽거나 별을 보는 것은 소녀 또한 알고 있었지만, 이 아무것도 없는 허한 복도를 밤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것도 모자라 저와 대면하고선 반가움을 표하기까지 할 줄은.
2.
저택의 도련님─, 이름은 루라고 했다. 루 모겐스. 아직은 어려서 정식 후계자가 아니지만 조금 더 자라면 미들네임을 받을 거라고 하였던가. 그렇게 길어지면 기억하지 못해. 그런 점에서 한 음절로 끝나는 아이의 이름이 소녀는 마음에 들었다. 이거라면 또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루. 짧아서 마음에 들어.”
“하지만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 아, 그렇지. 내가 지어주는 건 어떨까?”
“이름 같은 건 덥썩 붙이는 게 아냐. 나를 당신의 개나 고양이 정도로 여기는 거 아니지?”
없다고 불편하지도 않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건 눈앞의 소년이 전부였고, 세상에 사람이 두 명 있다면 호칭은 너, 혹은 당신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녀의 답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는 듯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곧 활짝 휘어진다.
“개나 고양이보다 훨씬 좋아해. 나에게 너와 대화하는 건 특별한걸. 그러니까 말을 건넬 때 부를 이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특별하다고 해도, 결국 특별하지만 비슷하단 뜻 아냐? 어째서 부족할 것 없는 도련님이 이런 먼지투성이 복도까지 찾아와 유령과 떠들고 싶어 하는지. 소녀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천진난만한 미소가 빛이 날 것만 같이 눈부셨다. 그 미소에서 소녀는 저에게 익숙한 별빛을 떠올렸다. 밤하늘의 비밀을 품은 것만 같은.
소녀에게 태양빛이란 잊혀진 추억 중 하나로 어떤 것이었는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기도 했고. 어쩐지 이 아이의 빛을 따라가면 잃어버린 기억이 떠오를 것도 같은,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기분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러다 내가 기억을 되찾으면서 이름도 떠올리면?”
짓궂은 질문을 하자 소년이 허를 찔렸다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무슨 답을 낼까. 조금 흥미진진해져 지켜보자 곧 답이 나왔다.
“그 땐 네가 골라줘. 어느 쪽으로 불러주면 좋을지. 아니면 둘 다 이름으로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이름이 길어지면 난 또 잊어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뭐 좋아. 지금은 하나도 없으니까.”
제 답이 어떠냐는 듯 반응을 기다리는 표정에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만다. 개나 고양이, 라고 했지만 이럴 때 보면 강아지는 그인 것만 같아. 미소를 입에 건 채 소녀는 검지를 까딱였다.
“촌스런 이름은 싫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받을 거니까. 내 마음에 들 만한 걸로 붙여줘.”
3.
──슬리.
어디선가 이름이 불린 기분이 들어 문득 고개를 든다. 그러나 스산한 바람 한 줄기만 지날 뿐, 텅 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였더라, 불러주던 목소리. 무어라 불렀지?
에슬리.
맞아, 에슬리. 떠올림과 동시에 구름에 가린 듯 흐릿하던 기억이 선명해진다. 세 음절을 입에 담으며 부드럽게 휘어지던 눈꼬리. 올려다보던 시선. 다정한 음성. 아직 잊지 않았어. 기억하는걸.
그치만, 잊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또 사라질 텐데. 돌아오지 않을 텐데.
남겨질 텐데.
“……루.”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라고 할 게 아니었다. 이렇게 잊히지 않을 줄 알았다면. 오늘로 며칠이 지났더라. 아니, 몇 달인가. 몇 년인가. 혼자 걷는 복도는 감각을 어지럽혔다.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복도, 벗어날 수 없는 서관 4층.
「내 방도 구경할래?」
「난 이 복도에서 못 나가.」
「못 나가? 왜?」
이만큼이 내게 허락된 공간이라서 그럴까. 이유 같은 건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설명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그럴 리 없다며 그는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복도가 끝났다. 아무리 걸어도 닿지 못하던 복도 너머 문을 지났을 때 멍해진 그녀를 보고 그는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었지.
그 뒤로 함께 기억을 찾기 위해서 저택의 곳곳을 탐험하고 들어가선 안 된단 말을 들은 방들을 들쑤시고 도서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책을 꺼내고, 함께 걷고 또 걸었다. 혼자 복도를 배회하던 때와는 달랐다.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아주 오랜만에 시계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아가는 끝에 반드시 좋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하나씩 잊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지끈하던 심장의 통증과 어두워지던 그의 표정. 당신의 이런 표정을 보겠다고 기억을 되찾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루가 앞으로도 쭉 내 이야기 상대가 되어준다면 기억 같은 건 찾지 않아도 좋아.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답답하던 복도를 벗어나 함께 잔디를 밟으며 밤 산책을 하고 별을 보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그랬는데,
「당분간은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아.」
「왜?」
어느새 달이 비추는 밤이면 그와 만나는 게 당연해졌던 그녀에게 난데없이 떨어진 이야기였다.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나. 방학이면 돌아올 거고, 졸업하면 또 언제든 만나러 올게. 담담하게 말하던 그와 달리 그녀는 ……생각보다 더 충격이었을까. 슬프단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달래고자 허둥대기도 했지.
알았어. 꼭 돌아와야 해. 기다릴 테니까. 애써 주먹을 움켜쥐고 답하였지만 정말 돌아올까? 또 남겨지진 않을까.
──또?
비어있는 기억의 조각이 달그락 소리를 낸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기분을 느끼며 에슬리는 천천히 그림 너머로 발을 뻗었다. 사뿐하게 그림에서 내려오자 액자에 기대 쪼그려 있던 인영이 고개를 든다.
“에슬리.”
서서히 지나가는 구름을 따라 흰 달빛이 유리창 너머에서 쏟아진다. 빛을 받으며 아이가, 아니 남자가 익숙한 듯 낯선 미소를 짓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그녀가 잘 아는 눈높이보다도 한참 위에서 멈춰서 에슬리는 또 한 번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가 멈춰있는 동안에도 그는 나아가고 있음을. 그가 몇 번을 돌아오든 끝내 그녀는 또 남겨지고 마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