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이 들린다.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뒤섞여 무어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있으면 한 데 뭉쳐 덩어리진 목소리들을 따로 떼어 들을 수 있었다. 귓가에 손을 올리고 섬세하게 소리들을 분류하여 담아낸다. 그러면 하나, 하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선명하게 귀에 담겼다.
아빠, 안아줘. 엄마 저거 사줘. 어린아이의 떼를 쓰는 목소리와 그래 그래, 어르고 받아주는 어른의 목소리. 잘 휘저어 녹인 사탕 같아. 그리고 단단하게 굳겠지.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 다리 아프지 않아? 손잡고 걷자. 다정하게 사랑을 속닥거리는 연인의 목소리, 이건 꼭 솜사탕 같고. 폭신폭신 가볍고 사르르 녹을 것만 같아. 친구들이 왁자지껄한 목소리도 들렸다. 이번엔 저거 구경해. 내가 이기면 이따 네가 한 턱 내기다.
축제의 밤이었다. 이곳이야 매일이 축제인 것처럼 유흥으로 가득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1년에 몇 번 안 되는 ‘진짜 축제’가 열리는 날은 한 층 더 했다. 붉은 등만 가득하던 곳에 오색의 등이 걸리고 모든 가게가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색스럽게 흐르던 음악도 이 날만은 북소리에 모두 먹히고 호객을 하는 목소리는 간드러지는 투 대신 씩씩하고 커다랗게 들렸다. 여기 손님, 한 번 들렸다 가십쇼. 이 문어다리가 아주 맛있다니까요?
지글지글한 소리,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지는 음식 냄새. 하지만 냄새만으로 허기가 채워지진 않는다. 오히려 허기를 실감하게 하지. 그래서 주린 배를 감싸고 다리 밑에 몸을 구겨 앉았다.
한쪽엔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있고 그 옆으로 흐르는 강에선 더러운 냄새가 난다. 코가 마비될 것만 같았지만 그조차도 이미 익숙했다. 마을로 돌아갈 순 없었다. 가봤자 모두의 분위기에 찬물만 끼얹겠지. 그래서 대신 이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돌을 쌓아 만든 다리 아래는 강 옆이라 그런지 유독 한기가 느껴졌다. 축제의 뜨거움도 이곳은 다른 세상이라는 양 차가운 돌에 기대어 밤을 쳐다보았다. 회색의 돌, 회색의 강, 길게 늘어진 검은 그림자와 까만 밤. 이 세상의 색이라곤 검거나 회빛이거나 이 두 가지가 전부인 것만 같지. 짧은 손발을 쭉 펼치면 어둠에 삼켜진 듯 똑같이 무채색으로 보였다.
그래서 내가 챠콜(charcoal)인 거야.
세상이 두 가지 색인 게 아니다. 세상에서 허락된 색이 이 두 가지뿐이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몇 번을 곱씹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죽는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텐데.
그럼에도 죽지 못하는 것은…… 죽으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살려고 생각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대포알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빛이 한 줄기 어둠을 가로지르며 떠올라 이윽고 피어났다.
불의 꽃이었다. 그리고 빛의 꽃이었다.
그저 새까만 줄로만 알았던 하늘에 빛이 수놓였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름다워서 지독하게 느낄 만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풍경을 보는 순간 뺨이 젖어들었다. 허락된 것 외의 색을 봐버린 전율과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저 빛에 영영 닿을 수 없을 거란 좌절 때문이었을까. 그저 아름다운 것을 본 감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석상처럼 굳어 몇 번이나 한 줄기 궤적을 그리고 피어나는 꽃을 보았다.
내가 ____ 생각한 것은,
……
……
……──꿈?
이건 꿈일까. 아주 이상한 감각이다. 재생된 필름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과거의 나로 의식만 옮겨온 것 같기도 했다. 나의 일이지만 나의 일이 아니었다.
그야 지금의 난 저런 어린 애가 아닌걸.
한 번 스스로를 자각하고 나니 경계가 분명해졌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 아주 과거의, 내가 죽으려고 생각했던 그 과거의 일.
그러나 구분 지었다고 하여 감정까지 잘라낼 수 있진 않았다. 그 때의 감정이 파도쳐 밀려왔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쳐 이미 다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닥으로, 퍼석퍼석하고 따가운 모래바닥으로 잡아당긴다. 사람들에게 부정당하고 세상에 부정당했다.
어째서 살아야 하지? 의문이 매일같이 머리 위를 짓눌러오던 나날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누구도 답을 주지 않아 괴롭던 나날들. 그런데도 답을 찾아 헤매던 것은 분명, 아무도 긍정해주지 않는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나가고 싶었기에.
고개를 들었다. 빛이 있었다. 그림자조차 들어올 자리가 없는 어둔 다리 밑에서 어둠과 하나가 되어가던 내게, 아이에게 빛이 보였다.
똑같이 어두운데도 이상하게 밝던 하늘. 꽃과 달과 별이 빛나던 그 하늘을 향해 아이가 손을 뻗었다. 일어나 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 다시 한 발. 발목을 붙잡으려는 어둠을 떨쳐내고 걸어 나가는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없이 상냥한 빛.
이 빛을 놓치기 싫다고 필사적으로 뻗은 손을 잡아준 이가 있었다. 그 손에 별을 담아준 이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질문에,
-어째서 살고 있어, 나?
스스로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어서.
하늘에서 빛이 부서져 내렸다.
내리는 빛무리 사이에서 나는 더 이상 어둠속이 아니었다.
*
……잠에서 깼을 땐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지금이 몇 시쯤이지? 시간 감각마저 날아가 빛이 들어오는 창을 향해 몽롱하게 눈을 깜빡이다 겨우 몸을 움직였다.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거실로 나가자 맛있는 냄새와 함께 그가 보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막 접시를 내려놓다가 눈이 마주쳤다. 온화함을 담은 눈동자가 당연하게 누그러져 휜다.
그의 눈동자에서 빛을, 그리고 애정을 보았다.
“일어났어? 너무 곤히 자길래 안 깨웠는데. 산책도 가지 않고 에슬리가 나보다 늦게 일어나다니 드문 일이…… 에슬리?”
“어?”
당황한 기색으로 다가와 그가 눈가를 만진다. 그제야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하고 한 줄기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어라, 웬 눈물이지?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가운데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서운 꿈이 아니었어. 무서운 꿈같은 게 아냐. 아직까지 멍한 머리를 가볍게 젓고 그의 옷자락을 당겨 기댄다. 조금 더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꿈에서 루를 만난 기분이 들어.”
“나를? ……꿈에서까지 볼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어?”
나는 늘 네 옆에 있는데. 서운한 건지 장난을 치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조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진다. 온기가 증명해주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그래서 조금 슬픈 꿈이었지만 이제 괜찮다고 걷어낼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꿈속에서부터 깨어날 때까지,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바라진 적 없던 시절이 있다. 걸음걸음마다 모래밭이 기다리고 있어 푹푹 꺼지기만 하던 삶이었다. 아무리 발자국을 남기려 해도 바람 한 번에 흔적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던 나날이었다. 어째서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어? 왜 죽지 않지? 답을 찾아 아주 긴 시간을 헤맸다. 누군가 나를 바라주었으면 좋겠어. 모랫더미에 파묻힌 가장 밑바닥의 바람을 스스로는 꺼내지도 못한 채였다.
길고 긴 시간을 지나 그를 만나고 나서야 헤매던 답을 얻었다. 의미를 찾았다.
“루를 만나서 다행이야.”
캄캄한 어둠속에서 바닥만 보던 아이에게 별을 선물해줄 사람이 생겼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포기하지 마. 하고 내게 들려줄 수 있었다.
*
어느덧 1년이었다. 그와 함께 있길 바랐지만 그와 함께 있을 수 없어 떠나려고 했던 밤, 그러다 손을 잡혔던 그 밤으로부터 1년을 꼬박 채워 돌아온 두 번째 밤이었다. 또 다시 별이 반짝인 밤이었고 가을의 찬 공기보다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가 더 깊은 밤이었다. 그렇게 함께 새벽을 맞았고 새 날을 맞았다.
믿기지 않고 놀랍기만 한 나날들, 당연한 것처럼 찾아오는 내일이 실은 당연하지 않음을 잘 알기에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 1년이 지났음에도 감정은 퇴색되는 일 없이 선명하였고 오히려 몇 번을 덧칠해 더 깊게도 느껴졌다.
신기해. 누군가에게 이만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감정이란 게 어떨 땐 가뭄이 든 것처럼 하나도 없으면서 어떨 땐 주체하지 못할 만큼 넘쳐버리기도 해. 루에게는 늘 수많은 처음을 받아. 알고 있던 것조차도 새롭게 느껴질 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익숙해져서 더 자주 말해줄 수 있는 게 좋아. 키스가 자연스러워져서 몇 번이든 닿았다 떨어져서 좋아. 맞닿았다 떨어질 때 간지럽게 다가오는 숨도, 그 때에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볼 수 있게 된 것도.
지금도 이렇게, 그의 표정을 보며 내가 짓고 있을 표정을 떠올린다. 감정이나 마음이나 하는 것이 두 사람이 함께 키우면 굉장히 부풀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있잖아, 루. 1년을 돌아서 1년만큼, 1년보다 더 사랑하고 있어. 더없이 많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랑을 루에게 느껴. 정말로 루에게 욕심쟁이가, 어리광쟁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아. 그래도 괜찮다고 해줄 거야? 내게 더 바라도 된다고, 들려줄 거야?”
가지 말라고 붙잡은 건 루니까, 나를 여기 두는 책임을 져줘야 해. 까만 눈동자에 욕심을 담아 빛낸다. 그를 향해 웃는다. 그의 답을 기대하며 이제 남은 전할 말이라곤 아주 짧고 단순한 한 마디뿐이었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루.”
다른 어떤 것으로도 빗댈 수 없고 오로지 그에게만 전할 수 있는 한 마디였다.
루슬리가 사랑한지 1년! 제가 한 3시간 후의 이 시간에 답을 받고 머리가 새하얘져서 벼랑 위의 포뇨를 반복재생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던 것도 벌써 1년 전이네요.
1년을 기념하며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희망을 들려주는 에슬리랍니다. 꿈속에서 어린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루를 봤어. 같은.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이라는 건 고정된 게 아니니까 1년이 지났어도 에슬리는 여전히 가끔 불안하고 때론 걱정하고 혹은 불신하고 두려워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그대로인 채 있답니다. 사랑해서 갖는 감정이라고 알고 괜찮으려고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