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이른 아침의 이슬을 맞이하러 가는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막 돌아가던 길에 에슬리의 눈을 사로잡은 건 비죽비죽하게 솜털이 난 채 길게 목을 뻗은 파란 꽃들이었다. 오늘은 얘네를 가져갈까. 그러고 보니 오늘이 아마도 300이었던 것 같다. 날짜를 헤아리던 에슬리는 괜시리 혼자 멋쩍은 기분이 되어 목가를 문지르며 꽃을 꺾었다.
이제 해가 뜨기 전에 나갔다 오긴 무리였다. 한 번 가볍게 걷고 오면 그것만으로 더운 기분이 되어 한 번 물을 끼얹고 그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찬물을 뒤집어 쓴 덕에 식은 피부가 가까워지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가 팔을 뻗어온다. 시원한 게 기분 좋았던 걸까. 폭 안겨 익숙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묻어나는 체취에 에슬리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린다.
“있지, 루. 오늘도 사랑해.”
속삭이면 잠결에도 들렸는지 부드럽게 펴지는 눈썹 위로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 에슬리는 한 번 더 잠에 빠졌다.
───자고 일어났을 땐 아마도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옆자리의 그가 없었다. 오늘은 진료소를 여는 날이었던가. 더워.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치우며 멍하니 있다 탁자부터 시선이 갔다. 오늘로 26번째였던가. 이제 곧 한 달을 채울 다이어리는 하루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팔을 쭉 뻗어 펼치자 먼저 쓰고 갔는지 그의 글씨가 보였다.
다이어리 위로 새겨진 그의 글씨를 손끝으로 더듬어 읽어 내리면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당겨 올랐다.
「오늘이 우리가 만난 지 300일이나 된 날이라는 거 알고 있어?」
“응. 나도 기억하고 있었어.”
기분이 좀 이상해. 그 말은 제가 자주 하던 것이어서 키득거리고 웃음이 흘렀다. 루, 말이 옮았어? 비슷한 점이 기록으로 남는 게 이걸 작성하는 즐거움 중 하나다. 다이어리에 담긴 그의 메시지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읽던 에슬리는 이윽고 맨 마지막 문장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내가 요란스럽게 데이트 신청하더라도 못 이기는 척 받아줘.」
못 이기는 척은 뭐야, 못 이기는 척은. 언제는 거절이라도 했던 것처럼 적어두었네. 테이블 옆의 펜을 더듬어 뽁 소리를 내며 뚜껑을 입으로 뽑아 그 위에 제 문장을 끄적였다.
루가 요란스러운 쪽이니까 내가 얌전한 쪽인 거야. 생각하며 다 적은 다이어리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면…… 그렇지. 데이트 준비를 해야지.
언젠가 읽은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다.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정확히 이런 문장이었던가? 꼼꼼히 읽은 것도 아니고, 다시 확인하러 갈 정성도 없어 대충 넘긴다. 중요한 건 내용이다. 에슬리는 거기서 말한 여우의 기분을 십분 이해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옷장을 연다. 두 사람이서 외출하는 걸 데이트라고 부른다면 데이트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예고장 마냥 두고 가면 평소보다 아무래도 신경을 쓰게 된다.
요란스럽게 신청하는 데이트는 뭘까. 생각에 잠기며 옷을 고른다. 옷을 고르면 다음은 친우에게 배운 대로 머리카락을 살짝 땋아보았다. 이제 제법 능숙해진 손재주로 귓가 너머로 머리를 넘기면 다음은 또…… 이것저것을 신경 쓰다 시계를 보면 슬슬 그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창문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면 진료소를 나가는 손님들이 보였다. 언제 올까~ 지금일까? 조금 나중일까~? 제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운다. 으, 에슬리는 금세 아까의 여우 말을 취소하기로 했다. 행복하지만 동시에 조금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빨리 보고 싶은데. 기다리기만 하는 건 지루한데. 침대 위에 얹어진 두 손에 꾹 힘이 들어간다. 다리를 앞뒤로 휘적휘적 저으며 여름의 길어진 해를 보며 얼마나 있었을까.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풀어지려던 몸이 다시 꼿꼿해졌다. 문이 열리고, 그의 발소리가 들린다. 에슬리? 하고 들려온 목소리는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다이어리를 확인했을까? 문 밖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두근두근한 기분을 억누른 채 예고한 것처럼 얌전한 척을 하고 앉아 있자 조금 뒤 문이 똑똑 두드려졌다.
들어오세요. 답지 않게 존대까지 써가며 있자 문이 열리고 한껏 미소를 머금은 그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조금 머쓱해진 그녀와 달리 그는 한결같이 능청스러운 빛으로 다가와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에슬리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사할 수 있는 영광을 주겠어?”
어째서 매번 이렇게 뻔뻔한 걸까. 그와 달리 뉘엿뉘엿 져가는 하늘과 비슷한 빛이 되어가며 에슬리는 기다렸다는 듯 억누르지 못한 미소와 함께 답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