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투명한 창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기온이 분명히 달라졌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창문에 손을 짚으면 그 온도차가 더욱 선명해졌다. 따스한 안과 서늘한 밖. 안쪽이 제 영역이 될 줄은 예전이었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 그러나 지금은 제법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따스한 물에 목욕을 하고 나오면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집, 신선한 우유 한 잔에 취향껏 설탕도 꿀도 코코아 가루도 타 마실 수 있다. 얼마 전 산 살짝 씁쓸한 맛의 코코아를 데운 우유에 녹여 휘 휘 젓던 에슬리는 곧이어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잠든 연인을 발견하였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수건과 아직 물기가 조금 남은 잿빛의 머리카락. 젖은 탓인지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이 도는 게 감긴 눈꺼풀이 그리는 온순한 곡선에 더해 어딘지 과거의 그를 떠올리게 하였다. 눈 감고 있을 땐 어릴 때랑 똑같은 인상인데.
-그렇지만 눈꺼풀이 올라갔을 때의 그가 주는 시선도 좋아해.
짓는 표정에 따라 인상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고 그를 보며 배웠지. 제 앞에서 유순한 척하던 표정이나 유해하게 웃던 표정이나 혹은 곤란한 듯, 동요 서린 표정 따위를 떠올리며 곱게 감긴 속눈썹으로 손을 뻗다가 그대로 멈춘다.
모처럼 기분 좋게 잠든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목욕의 열기가 남은 탓인지 집안의 온기 덕인지 발그레한 뺨에 뽀뽀해주고 싶은 기분도 꾹 참았다.
‘귀여워.’
그가 들었으면 무슨 반응을 보였으려나. 대신에 지금의 온기가 날아가지 않도록 그의 어깨 위로 젖은 수건 대신 담요를 덮어주고 이어 손가락 사이에 걸린 펜도 조심스레 빼내어주었다.
머리도 다 안 말리고, 또 뭘 쓰던 중이었을까. 힐끔 그밖에 알아보지 못할 글씨들을 들여다보던 에슬리는 해석을 포기하고 대신 그의 등에 제 등을 맞붙여 기대었다. 구부정한 자세가 굳어진 그의 위로 슬쩍 무게를 실으며 따뜻한 우유를 홀짝, 다시 홀짝.
우유와 코코아의 고소하고 단 냄새, 물기가 조금씩 마르며 풍기는 촉촉한 냄새, 서로 같은 비누의 냄새, 그 사이로 다른 체취, 하나하나의 냄새를 기억하며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부스스하게 굽은 등이 펴지는 기척에 히죽 미소가 비집고 나온다. 고개를 돌리자 어딘지 멋쩍은 기색으로 웃는 그가 있었다. 그새 마른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헝클어트리며 깜빡 잠들었네. 흘러나온 목소리에 더 안 자도 돼? 되묻자 그가 품 안으로 그녀를 당겨 왔다.
언제 나왔어? 머리는 잘 말렸어? 확인하듯 그의 손이 이번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잘 마른 머리카락을 흡족해하며 새로이 말을 덧붙였다.
“그럼 같이 자러 갈까?”
오늘은 평소보다 제법 이르네. 해가 짧아진 탓일까. 그는 낮보다 밤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지만, 나른하게 접힌 눈꼬리에 잠기운이 묻어나는 기색에 좋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아까 하지 못했던 키스를 그의 뺨에 남기었다. 일순이지만 잠이 달아난 표정이 되는 그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고 그녀만이 볼 수 있는 표정을 또 하나 즐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