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어느 먼 옛날, 실은 그렇게 멀지도 않을지 모르는 옛날, 먼 것은 시간이 아니라 거리일지도 모르는 어느 먼 곳에 빨강망토가 살고 있었어요.
빨강망토는 마을에서 알아주는 유능한 사냥꾼이었답니다. 그녀가 늘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붉은색의 망토가 실은 사냥감들의 피로 물든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요.
빨강망토는 소문에 대해 맞다 아니다 한 마디도 답한 적이 없어요. 어쩌면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다 무섭게 보이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던지도 모르죠. 마을에선 빨강망토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빨강망토가 사는 마을의 바로 옆에는 커다란 숲이 있었어요. 빨강망토가 늘 사냥을 하러 들어가는 그녀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곳이죠. 마을보다 훨씬 좋아하는 곳이기도 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숲에 위험한 늑대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늑대는 사람들을 마구 해치고 다른 동물들을 겁주고 숲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해요.
하지만 아무도 그 늑대를 잡지는 못했다고 해요. 듣기로는 무척이나 영리하고 영악하다던가. 사람들의 덫이며 함정을 유유하게 간파하고 꼬리 한 번 보이지 않는다네요.
사람들은 결국 빨강망토를 찾아왔어요. 제발 저 늑대를 좀 잡아달라고. 늑대를 죽이든 숲에서 몰아내든 해달라고. 빨강망토는 기가 찼죠. 이제 와서 날 찾는 거야? 뻔뻔하기도 해라.
하지만 빨강망토는 거절할 수 없었어요. 마을의 인정을 받는 것,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그녀의 오랜 바람이었거든요.
어쩌면,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마을 사람들도 날 인정해줄지 몰라.
기대를 조용히 품으며 빨강망토는 제 얼룩덜룩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았어요. 망토를 깊이 눌러쓰는 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죠.
그럼 우선은 늑대를 유인할 거리입니다. 늑대는 아주 영악하고 영리하다지만 그래도 늑대인걸요. 늑대가 좋아할만한 맛있는 베이컨을 잘 구워두고 덤으로 버터향이 듬뿍 나는 빵도 준비했어요. 둘 다 빨강망토가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이네요. ……정말 늑대를 유인할 거리야? 자기가 먹으려는 게 아니라?
어쩌면 빨강망토의 도시락일지도 모르겠네요. 빨강망토는 유능한 사냥꾼이지만 자기 사냥감을 그 자리에서 요리해 먹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래서야 배가 고프잖아요? 힘이 나지 않을 거예요.
뭐 중요한 건 베이컨과 빵이 아주 맛있을 거란 뜻이에요.
거대한 애검이 등에 묶여 흉흉하게 빛나는 것만 빼면 한 손엔 소풍바구니, 다른 손은 룰루랄라 길 가던 꽃을 꺾어들고 산책이라도 하는 듯 여유로운 걸음걸이네요. 그야 이 숲속은 그녀의 손바닥 위나 다름없는 걸요. 그 사이 늑대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요.
그러고 보니 어째서 빨강망토는 이제까지 한 번도 늑대를 만나지 못한 걸까요. 마을 사람들이 늑대 때문에 못살겠다고 우는 소리를 한 건 제법 오래됐는데. 어쩌면 늑대도 빨강망토의 명성을 듣고 숨어다닌 걸지도 모르죠. 그렇게 생각하니 빨강망토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기분이 좋아진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죠. 하루 종일 커다란 숲을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이 잡듯이 뒤졌지만 빨강망토는 늑대를 만날 수 없었어요.
아무리 숲이 넓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죠. 정말 늑대는 있긴 한 걸까요?
빨강망토는 슬슬 다리도 아프고 피곤해져 일단 잠깐 쉬기로 했어요. 참고로 빨강망토의 집은 숲 안쪽에 있답니다. 이쯤 되면 빨강망토가 마을 사람인지 숲속 사람인지도 의아하죠.
그런데 이상해요. 숲속 작은 집에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굴뚝에서 연기도 나고 안쪽으로 커튼이 쳐진 창문에서 불빛도 비쳐나오지 않겠어요?
긴장한 빨강망토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안쪽에서 콜록거리며 잠긴 목소리가 들렸어요.
빨강망토야 왔니?
빨강망토는 물었죠.
넌 누구야?
그러자 목소리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천연덕스럽고 슬프게 콜록거리는 소리가 또 들리지 뭐예요. 또 그녀의 침대는 멋대로 이불 덩어리가 불룩 솟아 있었어요.
너라니, 네 할머니가 아니니.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 할미의 병문안을 와준 거지?
빨강망토는 더 기다리지 않고 바구니를 툭 바닥에 내려둔 채 검을 뽑아들었어요. 그리고 이불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죠.
딱 한 마디 덧붙이고요.
난 할머니 같은 거 없어.
여긴 내 집인데 대체 무슨 소리람. 어이를 찾을 수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거겠죠. 빨강망토의 대검이 막 이불과 침대를 반으로 잘라내려던 때에 이불 속의 누군가가 얼른 몸을 빼내었어요.
바로 늑대였답니다.
쫑긋하게 선 회색의 귀, 회색의 털, 그녀를 다 덮치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몸체에 어딘지 좀 낡은 녹색의 털코트를 걸친 늑대였어요.
이제까지 털 한 가닥 보이지 않던 늑대가 바로 여기 있을 줄이야. 처음으로 본 늑대에 빨강망토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그를 찬찬히 살폈어요.
늑대는 대검을 두 손으로 든, 마을에서 제일가는 사냥꾼을 앞에 두고도 여유롭기만 했답니다.
동화책도 안 봤어? 이럴 땐 없어도 있는 척을 해야지.
설마 늑대에게 동화를 따라하지 않았단 태클을 받을 줄이야. 어이 옆에 어처구니도 같이 떨어트리는 빨강망토를 두고 늑대는 얇은 입꼬리를 당겨 올려 웃었어요. 그의 긴 손가락 끝이 열기가 새어나오는 벽난로를 가리키네요. 시선을 옮기자 반질반질하게 닦인 둥근 냄비가 불에 달궈져 있네요.
벽난로에 스프를 끓여두었으니 빵과 같이 먹는 게 좋아. 잘 먹고 잘 자라렴. 언젠가 내가 잡아먹을 수 있도록.
대체 무슨 헛소리야. 빨강망토의 의문은 해결해주지 않고 늑대는 그대로 유유히 집을 나가버렸어요. 대체 어떻게 멋대로 들어오고 뭘 멋대로 나가는 걸까요. 누가 보내주기나 한다고.
하지만── 어쩐지 늑대를 쫓을 의욕이 들지 않은 빨강망토는 얌전히 떨어진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리고 식사 준비나 하기로 했답니다. 냄비에서 풍겨오는 스프의 냄새가 너무 좋았던 탓인지도 몰라요. 앞서도 말했지만 배가 고픈 채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까요.
늑대가 만들어준 스프는 대단히 맛있었답니다. 뱃속이 무척이나 따뜻해져서 그 날의 빨강망토는 아주아주 따뜻하고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어요. 늑대 냄새가 밴 이불이 찝찝했던 것만 빼고요! 정말 영악하고 얄미운 늑대가 따로 없죠.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고요? 그러게 말이죠.
과연 빨강망토는 무사히 늑대를 퇴치하고 마을의 일원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늑대의 바람대로 잘 자라 꿀꺽하고 늑대의 먹잇감 중 하나가 되었을까요.
물론 어느 쪽도 아닌 결말이 될 수도 있겠죠.
가령 늑대의 목에 예쁜 노란색의 목줄을 채워버린다거나, 서로가 소중해진다거나 말이에요.
결말은 조금 더 나중의 이야기예요. 오늘은 일단, 늑대를 상대로 과자를 주지 않으면 장난을 쳐버린다! 하고 말하는 것부터 할까요? 늑대는 빨강망토를 위한 과자를 준비해두었을까요? 기대되는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