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실과 씨실이 교차되어 섬세하게 짜인 그물 끝자락에 방울져 고이던 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한다. 제 몸을 희생해 퐁, 터지고 만 그것은 이윽고 하나 대신 전체가 되어 울림을 널리 퍼트렸다. 오케스트라의 첫음과 같았다.
수면 아래로 잠겨 있던 의식이 첫음과 함께 떠오르면그곳은 방이었다. 기억에 선명한 곳인 동시에 그리운, 제 유년기가 고스란히 담긴 아스테반 가의 방. 마지막으로 들른 기억이 언제였더라. 발홀에 입학한 뒤로는 들를 일이 없었고 아카데미를 졸업 후 에인헤리에 입대하면서는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방을 옮기자는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더는 쓰지 않게 된 곳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서있는 걸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방안에는 아인델이 있었다. 그러니까─, 10년도 전의 아인델 아스테반. 아직 아라크네의 이명을 얻지 않은.
아이가 하던 일이란 나이에 맞게 놀거나 공부가 아닌 짐을 싸는 것이었다. 작은 캐리어에는 반듯하게 개킨 옷들과 손에 익은 필기구 등 삭막하기 짝이 없는 꼭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그나마 어머니가 준 목걸이를 비롯해 반짝이는 것 몇 가지가 보석함에 담겼을까. 그렇구나. 막 자신이 센티넬임을 깨닫고 발홀에 입학하기 전날의 그녀다.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키 차이는 머리 하나를 겨우 웃돌 정도였으나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와 군에서 10년 가까이 보낸 성인의 외형차는 적지 않았다.
그랬기에 아이도 아주 놀라는 대신 사랑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겠지.
“어머나, 내게 미래의 경고라도 해주기 위해 왔니?”
10년이란 세월 동안 스스로 많이 변화하였음을 알았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과 맞닥뜨리는 현실의간극은 제법 깊었다.
──귀염성 없는 아이였구나, 과거의 나는.
그제야 당시 어른들이 저를 예쁘지 않은 눈으로 보던 게 이해가 되었다. 당시의 아인델이란 그런 시선을 두고 ‘아이란 꼭 어른보다 미숙해야만 사랑해줄 수 있는 편협한 어른들’이라 평가하였는데─진실을 말하자면 지금도 아인델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다─고작 13살의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듯 저리 오만한 시선을 하는 건 그보다 10년의 경험을 축적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몹시고깝지 않은 것이었다.
10년 전의 저는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내가 무언가 경고한다면 들을 거니?”
“들을지 듣지 않을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것 같아.”
정말로─,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귀엽지 않은 아이였다.
아이는 도통 미래에서 온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짐을 싸는 속도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눈앞에 설령 권총을 든 강도가 있다고 해도 태도는 같았겠지. 허세나 배짱, 평온함의 가장 따위가 아니었다. 총과 칼, 미래의 제 발언 따위가 결코 나를 해치고 나를 뒤흔들지 않으리라고 앎에서 나온 태도였다.
안다고 믿었다. 그 때는, 그리 믿었다. 그 자체가 오만함인 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인델은 10년 전의 제게 해줄만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울 일이 생길 거란다. 몇 번이고. 실수를 하고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질 날도 생겨. 제어할 수 없는 환경과 너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도 해. 그건 무척이나 짜증스럽고 불쾌하지.”
“네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네가 사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하는 날이 이어질 거란다.”
“결코 숭고하지 않은 진흙탕 속의 싸움과고난이 기다릴 거야.”
그제야 짐을 싸던 아이의 움직임이 멎었다. 잘 보면 그저 일을 마쳤을 뿐이었다. 작은 캐리어를 빈틈없이 채우고 지퍼를 닫으며 천천히 미래의 저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얼핏 지겨움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열셋 어린애가 지을 표정은 아니다.
“미래의 나는 어린애를 겁주고 저주하기 위해 온 것이니?”
드물게도 아인델이 두 번 웃었다.
정말 귀엽지 않다. 겁박처럼, 저주처럼 들리는 미래시에 주춤하긴커녕 그런 말로는 나를 흔들 수 없다고 뻣뻣하게 목을 세우는 꼴이 왜들 그렇게 저를 꺾으려 들었는지 이해가 됐다.
실제로도 이 작고 하얀 아이는 아직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고결했다. 앞으로도 상처입지 않을 거라고 꺾인 적 없는 오만을 품기에 마땅했다.
그렇다면 10년 뒤의 아인델은 어떻지? 아이를 겁주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있겠니. 진실로 말하건대 나는 결코 네게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란단다. 내 말이 그저 겁박으로 끝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겠지.”
10년 사이, 몇 번이나 울고 제 무력함에 환멸을 느끼고 저지른 실수에책임을 통감하고 제어할 수 없는 환경과 컨트롤 되지 않는 감정에 두려움과 짜증, 불쾌를 기억하며 결코 고결할 수 없는 길을 밟았다. 눈앞의 아이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는 10년 전과 같이 순수할 수 없다. 말린꽃에서 사라진 향을 더듬는 애틋함만이 남았다.
그런 현재의 아인델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단지 나를 보라고.
그제야 아이가 흥미를 보였다. 캐리어를 침대 곁에 가지런히 세워두고 제 미래에게 정중하게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 위에는 우유가 두 잔 놓였다. 이 때만 해도 스스로 커피를 내릴 줄 몰랐지. 지금으로 말하자면 빈말로도 요리를 잘한다고 할 수 없는 그녀가 유일, 남을 대접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인델 표 카페 아인슈패너가 있다.
네게도 그런 미래가 찾아올까. 나와 같아지는.
무얼 읊어주어야 좋을지 곱씹으며상처 하나, 흉터 하나 없는 민들레 솜털 같은 13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 몸에는 고통의 기억이 없다. 예정된 고통을미리부터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상처를 통해 성숙해진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처는 인간을 성장시켜줄지 모르나 그것은 정당한 배상일 뿐이다. 성숙을 위한 과정에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누설할 미래가 아이에게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올지 아인델은 알지 못했다. 슈퍼컴퓨터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오만 가정을 다 해낼 리 만무했다. 경솔하게 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네가 자랐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이 날 이 때까지 지나쳐온 시간 중 한 톨의 후회도 없느냐 한다면 그럴 리가. 아마 두 손으로 다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은 후회스런 나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직전의 제 생각과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말한다.
그 굴곡과 상처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노라고.
너도 저와 같을 거라고.
이곳은 꿈일까? 혹은 이 또한 자기장의 현혹일까. 제가 떠드는 이 말들이 진실로 먼 과거의 제게 닿을까. 현재에 영향을 미칠까. 행위에 의미가 있을까.
현실의 그녀는 어떤 기묘한 자기장 안에 있었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힘의 파장을 조사하기 위해 진입하여 그간 겪어온 어떤 전장보다도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이상한 일들을 겪었다.
남은 여정은 길지 않았으나 그 사이전에 없이 많은 동료를 잃었고 제 긍지가 꺾이고 오만함이 상처 입었다. 만일 이곳을 무사히 나간다고 하더라도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는 스스로가 《괴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통제될 수 있는 괴물인지 통제불능의 괴물인지 그 구분만이 존재한다고 고해해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지난 10년, 괴물이라는 말을 거부하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꿋꿋이 걸어 왔으나 자기장 안에서 끝내 제 이상은 꺾였다.
두려웠다.
그럼에도역시 아이에게 이른 절망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 꼭 닮은 뺨을 만지는 건 묘한 기분이었으나 아인델은 제 동료들에게 으레 하였던 것처럼 그 뺨을 다정히 어루만져주었다.
"한 가지만 마음에 새기고 유념하렴. 너는, 우리는 괴물이 아니야.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계급과 서열이 아닌 지성과 인애로 내 믿는 정의를 믿고 실천해 나갈 거란다. 언제든, 변함없이."
부디 그 믿음을 의심하지 마렴.
"우리는 괴물이 아니란다."
내일도 아인델은 같은 말을 동료 앞에서 내뱉는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천 번의 흔들림이 있다 하더라도, 입 밖에 낼 말은 천 번을 두드려 꺼내는 철처럼 견고하고 무결할 것이다. 몇 번을 꺾여도 고개 숙이지 않는 그녀의 긍지였다.
──두 사람의 대담을제 3의아인델은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았다. 지구 시절에 유행했다는 영화 속의 장면처럼도 느꼈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 감독은 창의력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아인델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제법 감동적일 것이다. 한참 어린 나이, 막 부모 품을 떠나려는 아이와 그런 아이에게 너를 믿으라고 조언을 해주는 미래의 자신. 스테디 소재로 팔리겠지. 이 뒤에 여자가 괴물로 변해 동료 손에 죽는다는 것까지 포함해 얼마나 비극적이고 자극적인가. 뻔한 소재라 해도 울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걸까. 정말 꿈일까? 아니면 어떤 거대한 의지의 악의적인 장난일까. 곧사살될 여자가 과거의 저를 안아주며 희망을 속삭이는 장면은 이 뒤에 이어질 잔혹한 장면을 보다 비극적으로 느끼게 할 장치에 지나지 않을 텐데.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비아냥거리지 않을 수 없는 촌극과 같다고, 아라크네도 버리고 아스테반도 버린 단지 아인델로 남은 여자는 냉정히 평가했다.
그래서미련 없이 돌아섰다.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어 아름답고 화려한 거미줄이 굶주린 듯 침만 뚝뚝 흘리는 것을 무시한 채.
당시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는지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다시 만난다면 어떤 말도 남기고 싶지 않다. 해줄만한 조언도 축복도 없었다. 어떤 말을 전해도 그녀는 그녀이며 어떤 말을 남기든 스스로를 향한 위로일 뿐 나비의 날개짓에도 미치지 않음을 이제는 잘 알았다.
순간은 빛의 속도로 지나고 결과는 짐처럼 남아 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렇다면 순리를 따라 걸어야지 않겠는가.
그러니 아인델은 손 댈 수 없는 과거에서 벗어나 깨어나길 택하였다.
“오늘 미카엘의 빵집 브런치는 무엇일지 궁금하구나.”
『Pão anjo』 강아지 두 마리가 그려진 새간판을그아이가마음에들어해줄까. 브런치를 먹고 난 뒤에는 더 더워지기 전에 여름옷을 맞추는 것도 좋겠지. 커튼은 가볍고 얇은 것으로 새로 달고 이불을 바꾸고, 아라크네도 아스테반도 아니게 되었으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