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딘테그로 : 혁명의 도화선

16. 강요, 선택, 마땅한 권리

천가유 2021. 10. 24. 21:30

 

: 프레이즈 에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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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탄생부터가 타인의 욕망을 위해 내려지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을 강요받나?

진심은 가장 가파른 다리에서 튀어 오른다. 정제되지 않고 터져 나온 날 것의 말에 너를 통해 거울을 보았다. 너와 내 가진 것 중 온전히 우리가 선택한 것은 몇이나 될까. 쥔 것 없이 작은 손을 응시했다.

죄책감에 잠기고 죄악감에 시달리며 남을 향한 가시보다 더 많은 가시를 스스로 꽂아 넣어, 작은 몸이 가시투성이였다. 가시를 눕히는 법도 배우지 못해서, 네 숨통이 조여드는 것을 보기만 한다. 누군가는 네게 책임을 져야 했다. 가르쳐주지 않은 것, 배워 마땅했던 것. 네가 선택한 것과 선택할 수 없던 것 사이에서.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냐,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가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원해서 변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왜 그때의 네가 아닌 것에 스스로를 탓할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너를 보고야 말았다면, 네게 위선이라도 기만이라도 보일 수 있는 선이 여기 있었다.

긴 세월이었다. 허무맹랑한 전설, 진위도 불분명한 신화, 고작 100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1000년이란 지독히 길었다. 정말 신이 선한 세상을 꿈꾸었더라면 네 말처럼 보다 적극적으로 이 세계에 관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은 천 년의 세월 동안 나라를 방치하고 인간들이 서서히 신을 잊어가길 바랐다. 그들이 최초의 선함을 잃고 얼룩져가는 것을 보기만 했다. 선의 기준을 세워야 할 사제는 타락하고 세상은 힘의 논리로 흘렀다. 그 사이에 너와 같은 아이가 몇이나 생겨났다.

나의 삶임에도 나의 것으로 삼지 못하는 불행한 아이다. 네 운명을 타인에게로 돌려 원망하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그 뱃속으로 끌어안아 웅크리는, 너는 틀림없이 불행했다.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네가 저지른 죄가 온전히 너만의 것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까지도 너의 죄 삼지 않길 바랐다.

공평하지 못한 세상, 부조리한 세태, 생각하는 바는 많았으나 소리가 되기 전에 침묵 속으로 수많은 말들이 가라앉았다. 네게 듣기 전에 스스로 알고 있었다. 나는 무력하다. 내 약함이 죄가 되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채 다 지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선을 깨트리려 한다면, 너 또한 기억해야 하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검을 들고 있나.

네게도 있을 것이다. 탄생부터 네 의지를 벗어나 무엇 하나 자유로운 줄 모르고 지내온 네 삶의 궤적 중 스스로 바라고 선택한 일이. 네가 검을 드는 모든 순간이 괴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네게 가르쳐주었으면 했다. 아무도 없다면 내가 알려주고 싶었다.

새하얀 성전, 끝없이 이어지는 대리석의 기둥. 높이를 알 수 없는 지고한 공간. 청명한 하늘. 지상의 부패를 까마득하게 모른다는 양 티 없이 순결하고 맑은 공간. 바람조차 고요히 불 듯한 그곳에 선 검은 망토를 발견해 다가간다.

프레이즈.”

만약 널 부른다면 언성도 에버리스도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네 불리울 이름까지도 온전히 네 선택이었으면 했다. 흰 제복이 검은 제복의 곁을 나란히 한다. 두 색이 나란한 풍경이 당연하길 바란다. 깜짝 놀랄 만큼 어느새 널 보며 바라는 것이 늘었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역시. 저는 저의 선도 당신의 의지도, 이런 방식으로 증명하길 바라지 않아요.”

당신이 스스로에게 그만 잔인해졌으면 좋겠어요. 이 세상은 너무 넓어서, 저 하나의 뜻이나 당신 한 사람의 바람으로 어찌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세상을 좌우할 만한 크나큰 바람을 갖기에 저는 너무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저 한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만큼의 것을 바란다면.

한때 당신에게 울타리의 아늑함과 올바른 길을 알려주었던 책임이라고 해도 좋아요. 아직 당신에게 다 알려주지 못한 여러 가지 것들을 알려줄 기회를 주었으면 해요. 당신이 좀 더 알아야 할 것들, 배워야 할 것들을.

그 배움이 당신의 기호가 되고 선택이 되고 취향이 되어, 당신이 스스로 좋고 싫음을 말하며 선택할 권리까지 이어지도록.

당신에게 떨어지는 강요를 이겨내기엔 여전히 약하다면 함께 강해져요. 더는 그 강요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면 목소리를 내도록 해봐요. 프레이즈. 당신이 괴로워하지 않을 선택을 돕고 싶어요.”

비록 얼굴을 마주 볼 시간이 더 뒤로 미뤄진다 해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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