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피르 F. 렌하르트
청출어람靑出於藍
쪽에서 나왔으나 쪽빛보다 푸르다. 옷을 염색하는 염료란 흔하지 않은 재료다. 더군다나 푸른색이라고 하면 자연에서 그 색을 얻기가 더 어렵다. 그런 중에 청대란 아주 짙고 아름다운 푸른색을 뽑아내기에 알맞은 재료였다.
스케마의 한 영지는 염료가 될 쪽을 재배하곤 했다. 시기가 되면 한아름 수확한 청대를 끓이고 짜 푸른색을 추출해, 염색한 푸른 천을 바깥에 말리면 푸른 하늘 아래로 제법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렇다면 쓰임을 다한 청대는 어떻게 될까?
버려지겠지. 그것은 더는 푸르지도 살아있지도 않다.
어떤 철학자도 말하였더란다. “제자로만 남으면, 스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 시대는 언제나 더욱 뛰어난 것을 바란다. 청을 뛰어넘는 람. 구시대를 넘어서는 새시대의 박차. 그에 뒤돌아볼 것 없다.
간단하고 단순한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연신 질문을 하는 너는 이해를 거부하는 것일까.
“나도 방금 생각했어. 차라리, 너와 내가 부딪쳤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흰 선이 한 바퀴 휘감은 너와 시선을 맞춘다. 어쩐지 네게 의도와 다른 불이라도 붙여버린 듯 했다. 너와 진심을 다해 맞부딪쳐보자고, 설마 그걸 바랄까. 이야기가 흐르게 된 그 시작점을 헤아린다. 네가 편지를 읽고 부모님을 뵙도록 세크레타의 승리를 기도해주라고 하였던가.
멘토라 부르고 선배라 부르고 스승이라 부르면서 너는 네가 가리키는 그 호칭의 무게를 아는지 모르겠다. 어느 스승이 제자의 발목을 잡고 싶어 할까. 어떻게 너를 두고 망설임 없이 벨 수 있을 거란 말을 하는 걸까. 그 말에 속상한 티조차 내지 못한 채 웃었지.
죽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삶을 향한 강렬한 열망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나를 내던져 죽어도 좋다는 안일한 마음 또한 갖지 않았다. 다만 생각할 뿐이다. 살아남을 것인가. 살아남지 못할 것인가. 이제껏 찾아온 수많은, 나의 바람도 의도도 담기지 않았던 운명들처럼 생과 사, 그 두 갈래 길을 고르는 건 이번에도 내가 아니기에.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말이란 정해져 있지 않겠는가.
“제가 기꺼이 목을 내주어도 좋다고 생각한 상대가 당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자신의 목을 거는 농담이 퍽 태연하게 나왔다.
어쩌면 네 말처럼 나는 차라리 마녀로 태어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신의 자녀로 태어나 열망도 욕망도 갖지 못한 채, 망망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날 자리를 잘못 찾은 게 아닐까. 그리하여 모두가 쓰러지도록 홀로 서 있는 저주가 내린 거다.
문득 피로해져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너는 정말 못난 제자이자 후배다.
“저는 당신에게 서운하단 말조차 못하고.”
거듭 말한다. 이런 맥없는 삶임에도 생과 사 앞에서 구태여 사를 고를 마음은 없었다. 전장에서 한없이 무른 말이었으나 바라건대 모두가 같은 마음이길. 그런데 너는 몇 년 만에 겨우 얼굴을 보여서는, 재회한 그 순간부터 계속해──, 침묵으로 삼켜내지 못한 본심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은 별로 자지 못했다. 그 탓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한 발짝, 멀어진다.
채 마무리 짓지 못한 말의 뒤로 다시금 침묵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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