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누군가 머리를 한 대 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뇌가 뒤흔들렸다. 약간 멍했고, 들려오는 단어의 의미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마치 외국의 언어라도 들은 양 해석이 되지 않았다. 이해는 한참 후에,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거센 파도로 찾아왔다.
그저 황망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입을 꿰매기라도 한 듯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제까지 그녀가 보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이제까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날 보고…… 있었던 거야?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의 남자가 낯설었다. 비행선을 탈 때 느끼던 어지러움, 귓바퀴를 타고 시끄러운 소리 같은 것이 들리면서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다.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아니, 실망하지 않아. 그보다 먼저 느낀 건 공포였다. 아주 깊고 어두운, 끈적거리는 어둠을 본 듯한 공포. 목덜미를 타고 오르는 한기에 주춤거리며 어쩌면 좋을지 모를 기분을 느꼈다.
아득해지는 기분을 일깨운 건 여전히 붙잡고 있던 손이었다.
“아…….”
언제나 따뜻하던 그의 손이 차갑게 식은 듯 느껴졌다. 꼭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입을 다문 그의 얼굴을 보았다.
‘참담한 표정, 하고 있어.’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 마냥 시선을 떨어트리고 움츠러든 그 모습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얼어붙어 있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어째서 루는, 내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어?”
이전부터 그는 몇 번이나 말했다. 너에게 꼭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 믿고 기다려줘. 언젠가는 네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어째서? 내게 선택을 맡기기 위해서? 내가 무슨 선택을 할 줄 알고. 당신에게 실망하고 영영 외면하길, 당신을 두고 혼자 나아가길 바랐어? 그렇게 해서 스스로를 단죄하려 한 걸까?
자신을 기만했다는 생각은 분명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저에게 공포를 안겨주었고, 이제까지 제가 지켜봐왔던 그를 의심하게 했고 실망도 했다.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당신도 두려웠으면서,”
내게 이야기해주었어.
듣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야 이런 표정 봐버리면 다른 말은 나오지 않는걸. 듣지 않았더라면 영영 그를 이해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고통을 모른 척 하지 않고 함께 아파하는 쪽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축 늘어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긴장 때문일까. 식은땀이 밸 것만 같은 차가운 손에 깍지를 꼈다. 언제나처럼 온기가 돌길 바랐다. 그녀는 그의 따뜻한 손이 좋았다. 5년 전의 아카데미에서도, 1년 전 아델하이에서 재회했을 적에도, 지금도, 루의 손은 언제나 저를 부드럽게 달래주던 따스한 손이었다. 에슬리에게 그의 손이 주는 온기는 변함없는 신뢰를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낯설지 않다. 이제까지 그녀가 지켜봐왔던 루가 맞다고 알려준다. 그가 들려주었던 말, 보여주었던 행동, 그녀를 향하던 표정, 그것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도록 안심시켜준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 입술을 깨문 채 저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혼자 무섭고, 막막하고 불안하고, 그만 두고 싶고 돌이키고 싶었지. 하지만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혼자서는 도저히 멈추지 못했던 거지.”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은 죽었고 그는 용서를 구할 상대를 잃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슬리는 아킬라프의, 새까만 연기로 물든 하늘 아래를 멈출 줄 모르고 달려가던 기관차가 떠올랐다. 브레이크가 망가져 낭떠러지밖에 남지 않은 선로 위를 달리고 또 달리던 기관차.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던가. 멈춰 섰다간 더한 막막함을 느낄까봐 차라리 눈에 보이는 낭떠러지로 향하고 마는.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우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기혐오에 빠져서 얼마나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었을까.
아카데미를 헤어지기 전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의 고민이, 선택이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달라졌어도 그 때도 지금도 그녀가 할 말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행복한 이야기는 역시 동화에나 나오는 거였어. 거짓말은 하지 않아. 나는 당신의 말에 상처받았고, 굉장히 아팠어.”
사실은 지금도 아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 일렁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표정이 일그러진다.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고, 그럼에도 에슬리는 입술을 당겨 웃어 보였다.
“그래서 루는 상처 입힌 것에 책임을 지고 떠날 거야? 곁에 있어주진 않아? 당신의 상처는 돌보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 당신의 곁에는 누가 있지?”
「그냥 거기에서… 손을 잡게만 해줘.」
사과에 사과로 답을 하던 기묘한 대화가 있었다. 그가 제 손을 거절하면 어쩌지, 조마조마하게 내민 손 위로 겹쳐오던 손이 있었다. 전해지는 온기에 안심하고 웃던 건 어느 쪽이었을까. 손을 잡길 바라는 게 나만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던 것은,
“나는 루가, 구하기 위해 애쓰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구해달라고. 멈추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당신의 앞에 있음을, 여전히 손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이 손을 잡아주면 좋겠어.”
───몸에서 마력이 새어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처음 느낀 기분은 막막함이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 채 갈피를 잃고 헤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무작정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마냥 불안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달리는 건 지치고 외로운 일이다. 멈춰서고 싶고 주저앉고 싶고, 사실은 누군가 알아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다. 나는 당신이 혼자 불행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아래를 가리키는 눈썹, 호수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눈동자, 그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괜찮은데.
“여전히 나는 루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 이 이상 스스로를 혐오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만약 루가 멈추길 바란다면 멈출 수 있도록 루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
당신의 손이 바라지 않는 일로 이보다 더 얼룩지는 일이 없도록.
모든 걸 그르쳐버렸다고 이제는 돌이킬 기회가 없다고 포기하지 않길 바랐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여전히 나아갈 길이 남아 있으니까. 용서를 바란다면 용서를, 속죄를 바란다면 속죄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지금부터 차근차근 찾아보기로 하자. 그렇지, 우선은──
“이번 임무가 끝나면…… 같이 흰 꽃다발을 사서 어머니의 묘에 가기로 했지. 가서, 용서를 빌자.”
그녀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리 없어. 덧붙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도 나도, 언제든 루의 행복을 바라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