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어떤 연유에서 나온 것일까. 나를 동정해서? 아니면 당신도 나와 같아서. 닮은 괴로움을, 슬픔을 안고 있어서?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나를 이해해주지.
“혹여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듣고 불행하더라도… 너의 고통을 모른 채 내버려두고, 나중에서야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그런 말을 들으면 기대지 않을 수 없는데. 정말 과거에 내게 다정하게 군 것도, 지금 내게 상냥하게 대한 것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
“울지 않아. 말해줘.”
정말로 울지 않을 거야?
은색의 시선이 살며시 내리 닿는다. 다가오는 눈동자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기도라도 하듯 당신의 두 손을 감싸들어 이마에 가만히 기대었다 내려놓고는──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기에,
“그런 루를 좋아해.”
당신의 다정함을 이용해서 미안해.
이야기의 시작점을 고르는 것은 어려웠다. 고민하다가 물이 빠진 듯 끝자락이 노란 머리칼을 한 가닥 뽑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자 빛바랜 부분이 설탕가루처럼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반짝거리며 날아가는 잔해를 당신의 앞에 보이며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지?
“사라져버리지 않아, 라고 말해줄 수 없었어.”
지금의 나는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거든. 가질 수 있는 건 오직 바람 뿐.
──이트바테르에 다녀왔어. 거기서 육친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는 이야기도 했던가. 그 때 내게 그들의 사망을 알려준 사람은 그들의 시신이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마르고 쇠약해져 있었다고 했어. 보통의 죽음과는 달랐지. 그곳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고 무덤 같은 걸 만들어주지 않아. 하지만 그들은 무덤을 만들 것도 없었다나봐. 어린아이만큼이나 가벼워진 시체를 처리하는 건 손쉬웠다고 해.
「그 머리색, 네 어머니와 똑같아서…… 바로 알아봤어.」
한 번 사일란으로 변하고 나면 혈통으로 이어지는 굴레가 생기지. 때때로 나를 괴롭히던 발작 같은 통증은 나를 낳은 사람들에게서 이어지는 걸까 생각했어. 그렇다면 죽음까지도 닮을까? 응, 닮는 모양이야. 20살이 되던 해에 불현 듯 몸의 한 귀퉁이가 깨진 듯한 느낌을 받았어. 깨진 곳은 손가락이었을까 무릎이었을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깨진 틈에서 조금씩, 천천히……
“새어나가고 있어. 몸 안의 마력이.”
내 입으로 말하는 건 뭔가 이상한 기분이네. 정작 스스로는 여전히 마력이란 걸 잘 느끼지 못하는데. 산만한 기분이 되어 자리에 풀썩 앉아 다리를 까딱거렸다. 시선은 여전히 발끝에 두고 두서없는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까──, 루도 알고 있지? 사일런스 실험이 어떤 실험인지. 생명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연의 마력, 그 위에 다른 마력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한 실험. 나는 그 실험의 직접적인 경험자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몸의 마력을 담는 유리병이 깨진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 그렇게 해서 깨진 유리병은, 물이 새어나가는 걸 막을 수 없는 거야.
“자고 일어날 때마다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게 느껴져. 눈이 녹는 걸 막지 못하는 것처럼, 손바닥의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매일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 그러면 꼭 누군가 내 등을 미는 것 같더라.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야. 네겐 시간이 얼마 없어.”
멈춰 서려고 했던 내 속내를 읽어낸 것처럼, 네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지.
읊조리고 있자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아 깊은 호흡을 내뱉는다. 갑갑해. 표정을 찡그리다가 당신과 눈이 마주쳐 다시금 미소를 그렸다. 닿아오는 시선 너머로 사일란인 게 죽도록 싫다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 이야기가 당신의 감정에 불쏘시개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느릿한 손길로 목덜미를 문지른다.
“이제까지는 무슨 장해가 나타나든 이겨낼 수 있을 줄로만 알았어. 나는 강해, 괜찮아,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왔어. 그런데, 이번만큼은,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하루하루 조금씩 새어나가는 걸 망연하게 지켜보는 것 외에는 지독하게 무력해서, 제 무력함이 두려워서……. 제국군에 들어간 것도, 뭔가 남기지 않으면 안 되겠단 조급함이 들었을 뿐이다. 여전 대단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말을 잇다 가볍게 떨리는 손을 쓰게 바라보고 깍지를 꼈다.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약해선 안 되는데, 나는 강해야만 하는데. 도리질을 치고 다시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자 시야에 들어오는 당신의 표정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흘렀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내 고통을 모른 척 하지 못한다는 당신의 말이 따스하니까,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어. 다가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주며 속삭인다.
“오해할까봐 덧붙이는데,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어떻게든 방도를 찾으려고 하고 있어.”
언제든 나는 살아갈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그 말만큼은 믿어줘.
이왕이면 좀 더 안심시켜주고 싶었어. 확신을 말해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그 때까지는 숨기려고 했지만, 물어봐줘서 고마워. 털어놓고 나니 후련한가? 뒷짐을 지고 씩 웃으며 한 발짝 물러난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내게 루는 어떻게 달라졌든 변함없이 소중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 역시 당신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아. 곁에 있겠다는 말도, 바람은 그대로야.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고 했지?
의지만으로 해낼 수 없거나 바람만으로 이룰 수 없는 일 앞에서 내 소망이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변하고 말아. 그러니 내가 아직 당신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당신도 조금은 나를 이용해줬으면 좋겠네.
“내가 해줄 이야기는 이걸로 전부야.”
울지 않아, 루? 고개를 기울이고 찬찬히, 깜빡이는 눈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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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 기대는 것, 자신의 두려움을 말하는 것, 상대가 루인 것, 전부 너무 어려워서 한참 고심하면서 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