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쉴 기분이 아니었다. 정원의 눈밭을 밟고 익숙하게 나무 하나를 붙잡아 걸터앉는다. 거추장스러운 다리 갑주는 나무 아래에 던져놓고 발가락을 움직여 두 다리를 모아 웅크린다. 습관처럼 목가에 손톱을 세우려다 잡아주던 손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아내고 아, 아직 이 정도 여유는 있나보네. 혼자 웃음을 터트리다 곧 무릎에 이마를 문지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통각이 둔해지는 현상 정도는 완화 시킬 수 있는 내용이군.」
사일란으로 태어나 이제껏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몸을 불편하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제 삶에 있어서 그것은 차라리 이점이었지 단점이 되진 못했다. 오히려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발작 때마다 느끼는 통증조차 지워버리고 싶을 지경인데.
통각과 노화, 그것을 인간다움이라 여긴 걸까 그들은.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참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사고방식이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인간이라 말하는데 누가 마음대로 조건을 붙이는지.
잠깐이나마 이 몸의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기대했었는데. 정말 잠깐이나마. 하지만 기대는 파도 앞의 모래성보다도 빠르게 허물어져버렸다. 너무 순식간이라 제가 정말 기대했었는지조차 긴가민가할 만큼. 그래, 어쩌면 이미 오랜 시간 체념해도 몇 번은 체념했을 만큼 시간이 흐른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 몸이 정말 ‘보통’의 것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건 어쭙잖게 주었다 사라진 기대 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속이 울렁거린다. 안쪽에서부터 치미는 감정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생각을 멈춰버리면 그야 편하겠지. 그럼에도 무릎에 조금 더 이마를 문지르며 에슬리는 굳이 감정의 이름을 곱씹었다.
「저택에 찾아온 ‘잔재’ 만 해도 알 수 있어. 그녀처럼 ‘좋은 의미’로 발전 된 게 아니야. ‘조잡한 가품’의 방법이지.」
조잡한 가품의 방법.
「반대로 되묻는데, 너희 ‘잔재’는 도대체 어떤 실험을 당하는 건가?」
어떤 실험.
「실험보다는 고문에 가까운 행위군. 주인님께선 실험에 자의로 응하셨다. 마력을 주입하기 전에 우선, 신체에 맞는 ‘마력’이 무엇인지 어떤 술식과 맞지 않는지에 대해 고찰하지.」
고문.
「실험 도중에 이상반응이 온다면 그 술식이나 약품은 배제한다. 대체하거나, 다른 방법을 쓰거나. 천천히 진행되는 점도 있고. 대답이 되었나.」
그렇지. 아주 좋은 대답이 되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다 흰 입김을 깊이 내뱉는다. 억울해. 어째서 우리는. 그들은. 고통 받아야 했는가. 자신은 실험의 경험자가 아니기에 온전히 억울해할 수조차 없는 것이 더 억울했다. 거듭되는 실험들이 사실은 제대로 된 것조차 아니라던가. 소기의 목적마저 상실해버려서야 웃기지도 않아. 풀 곳 없는 분함, 불쾌와 짜증, 누구를 향해 연민을 가져야 할지조차 몰라 해소되지 못한 채 들끓는 감정을 날숨으로 뱉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하아…….”
한참을 제 안의 감정들을 연소시키다 고개를 든다. 그렇지, 보고가 아직 남았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과, 여기서 찾아낸 것들을 전부 묻어버리고 싶다는 생각, 두 것이 각각 무게를 지닌 채 저울의 양편에 오른다. 베로니카는 황실에 몇 번이나 보고를 올렸었다지. 그걸 제국은 묵살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저희가 보고를 올려봤자 잘 해봐야 함구하란 명이 떨어지고 말지 않을까.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가야지.”
고개를 털어내고 다시금 무릎에 기댄 채 잠시만 더, 느릿하게 심호흡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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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2부 러닝 동안 쓴 로그도 백업 끝! 하하하 즐거웠습니다. 커뮤 러닝하면서 로그만 10만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