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온화한 밤이었다. 갑작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문이 아니라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갸우뚱거리며 창문 쪽으로 시선을 두자 테라스에 그가 서 있었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가 수신호를 보낸다. 나오겠니? 시키는 대로 걸쇠를 풀어 창문을 열자 그는 무언가 꾸미는 듯한 표정으로 지난번에 그 옷 있지. 하고 물어왔다. 그 옷? 무슨 옷을 묻는 걸까 고민하자 지난번 파티 때의 그거, 하고 설명이 덧붙는다.
아아. 끄덕이고 2차로 있지만, 그래서? 묻자 루는 입고 나와 줄래? 여전히 이유는 말해주지 않은 채 눈 꼬리를 휘며 웃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이유를 묻기는 포기하고 창문 위로 커튼을 친다. 시키는 대로 까만 드레스를 입고 나가자 난간에 기대고 있던 그가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어요?”
언젠가를 떠올리게 하는 대사에 저 역시 그 때로 돌아간 듯 파핫 웃음을 터트리며 가볍게 손을 올린다. 여기서? 테라스는 두 사람이 서기에 좁지 않았지만 춤을 추기엔 무리로 보였다. 그러나 루는 느긋한 미소로 그녀의 손을 살짝 당기고 느릿하게 스텝을 밟았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몇 번을 춰도 고쳐지지 않는 애매하게 느린 박자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와는 잘 어울려, 지적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리드에 맞춰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또각거리는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아 시선을 아래로 주자 어느새 두 발이 테라스와 이별해 있었다.
“루?”
“이런, 한 눈 팔다 또 발을 밟으려는 건 아니지?”
그 때는 실수였다니까. 시치미를 떼자 그런 걸로 해둘게. 얄미운 답이 돌아온다. 허공에서 스텝을 밟는 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딛는 건 제법 용기가 필요했다. 붙잡은 손이 아니었다면 긴장했을지도. 사실은 지금도 긴장으로 어깨에 조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내색은 숨기고 그녀의 머리 위로 쭉 뻗어진 손을 따라 부드럽게 턴을 한다. 그 상태에서 루는 한 술 더 뜨듯 그녀와 마주 보는 대신 그녀를 앞에 세워 귓가에서 속삭였다. 이대로 걸어보겠니?
걸어? 두 손은 여전히 그와 잡은 채였지만 그가 시야에 보이지 않자 아까보다 조금 더 마음이 불안해진다. 떨어트릴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원초적인 두려움이었을까.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믿고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는다. 이어서 한 발, 두 발……. 그녀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고도가 높아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고, 그다지 싫지는 않은 기분.
“굳이 걷지 않아도 루라면 그냥 띄울 수 있지 않아?”
그럼에도 조금 불만을 담아 묻자 그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이 편이 즐거우니까. 그런 답이 들리는 기분에 짧은 한숨과 함께 사뿐사뿐 걸음을 이어나가다, 문득 공기가 달라졌다고 느꼈을까 그제야 에슬리는 주변을 볼 여유가 생겼다.
“와아…….”
얼마나 높이 올라온 걸까. 지상에서 보던 하늘과는 전혀 다른 밤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사람을 감싸주듯 둥글게 내려온 하늘은 위도 오른쪽도 왼쪽도 똑같아,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되었다. 함께 탑에 올라 밤하늘을 구경한 적도 있었지만 그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굉장해….”
두려움을 잊고 이번엔 아래를 보자 아직 꺼지지 않은 지상의 불빛들이 발밑을 반짝거리며 비추었다. 그게 꼭 밤에 피어난 꽃처럼 보여 한 번 더 탄성을 내뱉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 루도 보여? 굉장해. 멋져!
“응, 나도 보고 있어.”
돌아본 시야에 달빛을 배경으로 활짝 웃는 그가 들어찼다. 아,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한 마디와 함께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에 열이 오른다. 에슬리?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흔들고 그를 보고 바로 선다.
“그렇게 웃는 얼굴 보니까 기뻐져서.”
즐겁네, 루. 눈을 마주치고 서로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다시금 그와 처음 춤을 추었던 날을 떠올렸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이 순간만큼은 그녀도 모두가 행복한 동화책의 한 귀퉁이 정도쯤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을 품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그렇지. 욕심이 조금 더 늘었다. 조금 더? 아니, 조금 많이.
떠오른 생각에 미소와 함께 춤출까? 말을 건네었다. 맞잡은 손으로 온기를 나누며 하나 둘 셋, 다시 하나 둘 셋, 밤하늘을 무대로 사치스러운 왈츠를 이었다. 달빛을 조명삼아 별들 사이에 섞여 저희 또한 하늘의 빛나는 한 자리인 양 자리를 차지하고 빙글빙글, 한 번 더 빙그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