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이제까지 이어지던 대화 중 가장 그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5년 전에는 곧잘 보이던 유하게 휘는 눈웃음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으려던 그 때, 느릿한 목소리로 그가 절망을 고한다.
“부탁합니다. 제게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아주세요.”
……모르지 않는 심정이었다. 그녀 또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희망을 품는 것조차 비참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기분.
이 세상에 정말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 자는 성격이 아주 고약할 것이라고 에슬리는 몇 번이나 떠올렸다. 기도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웃기지 말라지. 그녀가 살면서 지켜본 세상은 간절한 자에게서 더 간절한 것을 빼앗고 불행한 자에겐 더한 불행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해서 바닥을 구르는 꼴을 위에 앉은 누군가가 즐겁게 지켜보기라도 하듯.
이 산을 넘어가면 매실 밭이 있을 거다, 귓속말로 꿈을 부풀려놓고 겨우 산을 넘으면 바위 밭을 보여주듯 지독하기도 하지. 좀 더 발버둥 쳐봐. 더 발악해 봐. 절망 앞에 더 큰 절망을 안겨줄게. 그녀 또한 느꼈던 바다.
“힘들지. 지치고, 괴롭고. 노력하는 스스로가 우습고 비참하고.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고 무엇이 달라질까? 그럴 바에야… 하고 생각해버리지. 포기하고 손을 놓는 게 차라리 편할지도 몰라.”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이 고통의 끝에 뭐가 있지? 뭐가 있긴, 더한 절망이 기다리지. 그럴 바에야 움직이지 않아. 여기 멈춰 서서 웅크리면, 더 이상 새롭게 고통 받지 않아도 돼. 괜한 희망을 가졌다 더한 좌절을 맛보지 않아도 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에 꽤 좋은, 영리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에슬리는 그의 방법이 비겁하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에게 아직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괴로울지 역시, 뼈에 사무칠 만큼 잘 알았다.
느릿하게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그러나 에슬리는 그저 그에게 공감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
“모렌 혹시 기억 나? 5년 전에, 나한테 왜 제국군에 가고 싶냐고 물어봤었잖아. 그 때 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지. 어째서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냐고 해서, 그건 그 때 이루고 나면 말해준다고 했었지. 이제는 딱히 이루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말해줄게.”
목깃을 느슨하게 하고 머리카락을 귀로 넘긴다. 예전에 묶고 있을 땐 차라리 덜 거추장스러웠던 것 같은데. 애매한 길이가 되니 거슬리네. 그렇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자 손바닥 끝에 노란 부스러기와 같은 것이 묻어났다.
“내가 사일란이라서, 사일란이란 이유만으로 나를 싫어하고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에게 당신네가 무시하던 사일란이 이렇게 우러러봐야 할 위치에 올랐다고 으스대고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어.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했어. 그런데 사실은 말이지. 정말 바라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입가를 느슨하게 당긴다.
“실은 말이지. 누군가 곁에 있어줄 사람을 바랐던 거야. 높은 자리에 오르면 모두가 날 싫어하지 않고 좋아해줄까. 뭐 그런 거. 얄팍한 생각이었지. 그리고 아카데미에 온 덕분에 굳이 높은 자리까지 오르지 않아도 날 좋아해주고 곁에 있어줄 사람들이 생겼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행복해질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어. 신이란 누군가의 불행을 보며 그 불행에서 발버둥 치는 걸 보며 즐거워하는 법인지 말야. 그러고 나자 이제 네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단 선고가 떨어지지 뭐야. 마치 이번엔 어떻게 발버둥 쳐볼래? 라고 누군가 말하듯이.
“이번만큼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말이지. 솔직히 무릎이 꺾였어. 비참했던 건 단지 눈앞의 절망만이 아니었어. 만의 하나 기적이란 것이 발생하여 이번 절망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는 건 아닌가. 앞으로 얼마나 더 거듭해야 하는 걸까.”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바랄 뿐인데 말이지. 읊조리며 다리를 접어 올린다. 웅크리듯 무릎을 감싸고 그 위에 턱을 올린 채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노력해봐야 우스워지는 기분이잖아?
“그런데도 말이지. 난 포기할 수 없었어. 살고 싶었어. 너무나 살고 싶었어. 내일을 욕심내고 싶었어. 힘들고 지치고 괴롭고, 여기서 포기하면 조금 덜 비참하게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음에도 굳이 쏟아지는 빗방울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개미처럼 말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내일을 알아버렸거든.
목소리는 약간의 떨림과 흥분을 담고 있었다. 격앙되려는 어조를 차분하게 하고자 눈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자꾸만 피하려는 그의 시선을 찾아 눈을 맞추었다.
“덜 불행하고 싶다고 했지. 정말 그걸로 만족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고 했지. 미련이 남을까봐 두렵다는 마음조차 이미 당신의 미련이 아냐? 살고 싶다는 마음을 억지로 죽이고, 욕심내지 않으려고 이제 다 포기한 척하고. 괴롭지 않으려고 하는 당신의 행동이 결국은 스스로를 또 괴롭히는 일이 되고 있지 않아?”
입을 가리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렇게 숨어버려서, 정말로 편해졌어?
“……모렌에게 그저 빈껍데기의 희망을 부풀려 넣으려는 건 아냐.”
눈살을 찌푸리고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며 느릿느릿하게 문장을 잇는다.
“적어도 혼자 비참하지 않게, 외롭게 발버둥치지 않게 옆에서 같이 굴러줄게.”
이거 진심이야. 하고 말과는 다르게 조금은 장난스러운 빛으로 눈 꼬리를 휜다. 나는 앞으로도 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비참한 내일을 향해서 계속 걸어갈 생각이거든. 그러니까 모렌 혼자 꼴사납게 애쓴다고, 절망하다 무릎이 꺾여서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옆에서 똑같이 비참한 동지가 있을 거야. 그럼에도 그 비참한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옆 사람으로 있어줄게. 어라─, 이거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아? 다시 한 번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그래도 이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모렌이 죽을 때까지 말야. 결국 치료법을 찾지 못하고, 언제 병이 악화되어서 비명횡사 할 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동안 같이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그래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러다 언젠가 희망이, 기적이 내려왔을 때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막상 죽기 직전이 되어서 조금만 더 노력해볼걸, 하고 후회가 들면 그쪽이 더 비참하지 않아? 차라리 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봤는데도 결국 안 됐네. 죽여라. 하는 쪽이 나라면 덜 억울하고 비참할 것 같아. 그 때가 되어서 다시 노력할 수 있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잖아.
“나는 나와 같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죽을 수 없어졌어. 모렌에겐 그런 사람 없어? 함께 내일을 보고 싶은 사람. 나는 모렌도 죽고 싶지 않은 이유를 가졌으면 좋겠어. 살고자 할 각오를 다졌으면 좋겠어. 전부 내 욕심인 건 알아. 그래도……,”
짧게 심호흡을 하고선 말을 잇는다.
“──오빠랑 더 오래 함께 있고 싶다고, 나도, 모렌의 여동생도 분명 생각할 테니까.”
그가 가족을 떠난 이유를 다 알진 못한다. 함께 있으면 불안정해진다고 했던가. 그는 그게 자기 탓인 것처럼 말했지만 글쎄, 에슬리는 어느 한쪽만이 잘못하여 균형이 무너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렌 한 사람이 희생해서 괜찮아질 리 없어. 균형이란 건 함께 맞춰나가야 하는 거잖아.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그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게 답이야? 그건 역시 이상한 것만 같아.
“모렌이 부디 덜 불행하고 덜 비참한 것 말고, 더 행복하고 보다 좋은 것을 욕심내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