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주노

31) 밀밭에 부는 바람

천가유 2023. 8. 3. 21:10

for. 주노

우울한 여자와 무기력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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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선 곳에 떨어진 아가씨가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젖은 흙냄새였다. 정원의, 바짝 마른 토양 위로 정원사가 표면을 적실 만큼 끼얹은 물이 증발하는 냄새가 아니라 긴 시간 꽁꽁 얼었던 겨우내 흙을 괭이로 전부 갈아엎어 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뒤집혀 섞인 오래되고 눅눅한 젖은 흙냄새. 땅속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작은 생명체들과 양분들이 봄 밤, 달빛 아래서 몸을 말리며 나는 낯선 냄새다.

당장에 의존할 게 오감 중 후각이었다. 주변은 흐리멍덩하게 실루엣만 알아볼 정도로 캄캄했고 귀를 기울여봤자 바람에 숲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짐승 울음소리나 들려 공포를 부추기기만 할 뿐이었으니.

이렇게 캄캄한 밤은 아가씨에겐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랬다.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개발하고 전구회사를 설립한 뒤 뉴욕 월가부터 시작해 땅을 파헤치고 전신줄을 잇기 시작했다고 하나, 아메리카 땅은 매우 넓었고 도시처럼 인구가 모여 있지 않은 허허벌판의 시골 땅에 가로등 같은 건 터무니없는 사치였다.

너른 밭을 끼고 드문드문 있는 집집마다 창 너머로 비치는 불빛이 겨우 지상의 등대 역할을 해주었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아가씨가 난데없이 떨어진 밭의 주인집은 현관에도 전구 하나를 끼워두고 있어 그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발밑이라도 조금 헤아릴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어렴풋이 보이던 집의 분위기가 퍽 온화하고 따뜻해 보인 것도 용기에 한 몫 해주었다. 아니었더라면 두 다리가 밭고랑에 끼인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꼬박 날을 샜을 것이다.

저기이.........”

영문도 모르는 채 겁에 질려 모르는 집 현관 앞까지 찾아왔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노크를 하는데 문손잡이 옆에는 계란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부활절이 코앞이었다. 특히나 이런 시골 마을에서 부활절이란 추수감사절과 함께 중요한 행사의 하나였고, 올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도하며 달걀장식을 산더미처럼 했다.

현관의 전등도 그 연장이었다. 새벽닭이 울 적에 부활했다고 하는 우리의 주님을 위해 꼭 이 시기만 밤에도 전구를 밝혀두었다여기에는 막 발명한 전구에 대한 경이로움도 담겨 있다. 세상에, 이렇게 밝을 수가! 창세기 11절의 그 문장 같지 않은가. ‘빛이 있으라.

그런데 정작 노크 소리를 듣고 현관을 열어준 상대는──,

.”

현관 너머 상대와 눈이 마주친 청년은 직감했다. , 이거 분명 귀찮은 일이다. 절대로 귀찮은 일이 된다. 기필코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만다. 그러니까 절대 엮여선 안 된다.

신문은 사절…….”

빠르게 거기까지 결론을 낸 청년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현관문을 다시 닫으려 했다. 애당초 해가 떨어지면 할 일이 없으니 자고 새벽 동이 틀 때면 일어나는 청년에게 이런 야심한 밤은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 자기가 이 문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을 해가지고. 그야 이 집에서 가장 만만한 게 자신이긴 했지만.

이 무기력한 청년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나서서 하고자 하는 의지는 0에 수렴하면서 남이 시키는 일은 요령을 부려 최소한의 힘만을 가지고 최저한의 결과를 내놓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무기력하지만 성실하고 의욕은 없지만 순순한, 어찌 보면 무사태평한 농부의 삶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청년이라 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청년의 무기력함을 단점으로 꼽았으나 덕분에 그가 힘 풀린 눈을 하고도 주변을 얼마나 기민하게 살펴보고 눈치가 빠른지는 잘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랬다. 자정을 훌쩍 넘긴 이 시간에 갑자기 누가 노크를 한다? 귀신이거나 강도이거나, 하지만 둘 모두 가능성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겁 없이 문을 연 청년은 잠깐 사이에 현관 밖에 선 아가씨의 스캔을 빠르게 마쳤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고, 그런 주제에 얼핏 봐도 옷은 상당히 고급, 봄 밤이 추우면 얼마나 춥다고 뺨이며 귀며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데 심지어는 금방이라도 울 듯 위태로운 표정, 그래. 다 알았다. 엮이지 말자. 순식간에 그런 판단을 내리고 모른 척 문을 닫으려 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알았더라면 등짝을 때리며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니?” 혼을 내셨을 테지만 청년의 판단은 그랬다.

처음 보는 아가씨가 제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 ……?”

……그거, 제 이름이긴 한데.”

돌고 돌아 인연의 조각이 끼워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파삭, 병아리가 막 알을 깨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2]

어떻게 주노가 여기에. 돌아간 게 아니었나요? 혹시 돌아가야 한다던 곳이──……. 아니면 제가 이상한 세계에 빠진 걸까? 그녀가 어리벙벙해 하는 동안 상대도 난처하기는 비슷했다. 이름을 부르길래 무심결에 반응했더니 정작 그녀는 영문 모를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정했더니 또 아는 척을 해왔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든 봄이라곤 해도 쌀쌀한 새벽에 겉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을 밖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보기와 다르게 무른 청년은 생면부지의 아가씨를 집에 들였다. 역사에 남을 한 발짝이었다.

주전자가 끓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얼른 불을 끄고 조금 찌그러진 컵에 대충 아무 찻잎이나 넣어 내놓는다. 이렇게 하면 찻잎이 제대로 우러나오지 않는다거나 알 턱이 없었다. 애초에 평소라면 맹물을 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워낙에 추워 보였으니까.

벽난로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놓고 여동생이 쓰던 담요를 주워와 건넸다. 하얗게 질렸던 뺨에 겨우 열이 돌기 시작하자 굳어 있던 손가락으로 컵을 쥐고 아가씨가 머뭇머뭇 인사했다.

, 저는…… 에셸이라고 해요. 에셸 달링, 이에요.”

, . ……주노입니다.”

아시는 것 같지만. 덧붙이는 청년은 역시나 반대로 그녀를 전혀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제야 의 세계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곳에도 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이해했다. 동시에 가 어째서 자신과 연인을 다른 사람으로 보았는지도 이해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에게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성가신 것도 같았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머쓱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이던 어수룩한 청년과는 전혀 달랐다.

에셸이 조금만 더 자신감을 안고 침착했더라면 그가 내색하지 않고 세심한 친절을 베풀고 있음을 알아차렸겠지만 세상이 비관적이기만 한 아가씨에게 보이는 건 오로지 심드렁한 그의 표정뿐이었다.

덕분에 스몰 토크를 겸한 남자의 사소한 질문은 에셸에게는 조사나 심문이나 다름없었고 무엇이든 고분고분 답하였는데 듣는 쪽에서도 그런 태도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게 다행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가장 중요한 어디에서 왔느냔 질문도 그랬다. 마을 이름을 답하면서 혹시 그가 자신의 결혼 소식이나 집안 이야기를 알까 눈치를 보던 에셸은 기대하던 것과 전혀 다른 정보를 얻었다.

──거기라면, 여기서 마차로 족히 일주일은 달려야 할 텐데.”

네에? 그렇게나 멀어요?”

자동차로는 금방이었는데. 아가씨의 중얼거림에 주노는 별 악의는 없이 답했다.

이 마을 전체를 팔아도 자동차 한 대 값이 안 나올걸요.”

온 집안의 불을 전구로 바꾸고 자동차를 한 대 두고 있던 집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멀뚱히 머릿속의 주판을 움직이던 에셸은 그래서 조금 안도해버렸다. 이 정도라면 가족들도 쉽게 자신을 찾지 못하겠구나. ──좋은 일일까?

그래도 거기까지 가는 마차를 수소문해보면 어떻게든……

, 안 그러셔도 돼요!”

……그러면.”

물끄러미 향해오는 시선에 에셸은 들 낯이 없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답했다.

, 며칠만. ……잠깐만, 아주 조금. 여기서 머물게, 해주세요.”

금방 갈 곳을 알아볼게요. 가엾게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앞에서 주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일을 혼자 정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당장은, 쫓아낼 거였으면 애초에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 방은 많으니까.”

그렇게 말해놓고 손님방은 청소를 해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하룻밤 제 방을 내주는 게 주노라는 남자였다. 귀한 밤잠을 방해받은 청년은 기꺼이 케케묵은 짚더미 위에서 새벽을 보냈다.

그가 내준 방이 손님방인지 그의 방인지도 구분할 겨를이 없던 에셸 또한, 수많은 고민을 뒤로 하고 눕자마자 순식간에 잠에 빠지고 말았다. 잠들지 못할 거란 걱정이 거짓말만 같았다.

걱정이야 많았다. 생각할 일 또한 산더미였다. 아침이 오면 제일 먼저 결혼식의 주인공이 사라진 사실이 밝혀지겠지. 이 결혼식을 위해서 수많은 손님들이 초대되었을 텐데. 상대방의 체면은. 달링의 명예는.

터무니없이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습게도 지금에 와서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여우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신비한 생물은 사라진지 오래고 신데렐라의 요정 할머니라도 나오지 않는 한 마차도 자동차도 없이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사실에 기묘한 위안을 얻으며 에셸은 현실에서 도피하듯 잠들었다.

낯선 침대에서는 어딘지 좋은 냄새가 났다.

 

 

[3]

깜빡──.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미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몰래 쳐다보고 있던 주제에 한탄스러울 정도로 둔해 빠진 반사신경이다. 그런데 정작 상대 쪽에서 먼저 시선을 옮겼다.

처음부터 여길 보고 있지 않았다는 듯 자연스러운 시선 전환이었다. 눈치 채지 못한 걸까?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렇다면 조금 더…… 그를 지켜보고 있어도 될 텐데. 아가씨의 뺨이 오후의 햇살보다도 더 발갛게 익어간다.

드물게 두 사람밖에 없는 날이었다. 그리고 드물게 그가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는 날이기도 했다. 며칠만 머물게 해달라던 처음 말과 다르게 하루만 더, 이틀을 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어영부영 머문 지 근 2, 오늘은 주에 1번씩 다른 가족들이 없는 날이다.

그의 집에 머무르면서 알게 된 것이었다. 대체로 그는 하루 종일 밖에 있었는데 꼭 농사일을 돕는 게 아니더라도 일을 쉬는 동안 짚을 엮어 만든 허름한 오두막에서 낮잠을 자거나 소에게 여물을 주며 건초더미에서 자거나 울타리를 손 본 뒤 나무 그늘에서 자거나,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도 잠깐 손이 빈다 싶으면 눈을 감고 있을 때가 태반이었다. 당사자는 짐작도 못하는 바지만 어쩌면 이 작고 허름한 난쟁이 집에 적응해가는 백설공주 아가씨를 피하느라 바깥을 나도는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청년은 새벽같이 나가서 해가 다 저물어야 집에 돌아왔고 저녁을 먹고 씻은 뒤에는 제 방에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식객인 아가씨와 마주칠 일이 도통 없었다. 그래서 아쉬웠고, 오늘 같은 날이 생겨 감사했다. 그런데 정작 둘만 남겨져 놓고 아가씨는 청년에게 말 한 마디 붙여볼 줄 몰랐다.

이제껏 남자와 대화라고는 아버지나 가정교사, 저택의 사용인들 정도가 전부였던 그녀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거나 계절에 맞는 관용표현이나 시구를 찾아 첫 마디를 꾸미거나, 사용인에게 적절한 칭찬을 하거나 틀에 박힌 대화에서 벗어난 적 없던 아가씨에게 다짜고짜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와 나누는 프리토킹은 난이도가 높았다.

, 정말로 해본 적 없는 것은 아니다. 딱 한 사람 있었지. 그녀와 어떤 관계도 아니면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대화라는 것을 해보았던 상대가.

──그는 지금쯤 무사히 돌아갔을까? 돌아가서, 고대하던 연인과의 재회를 이루었을까.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이듯 조금 내민 채 에셸은 청년을 조금 더 관찰했다. 몰래 관찰한다는 당초의 계획은 잊어버린 듯 숨김없는 시선이었다.(덕분에 청년 쪽에서 얼마나 어렵게 모른 척하고 있는 줄은 당연히 몰랐다.)

밀짚모자를 쓴다고 하지만 햇볕 아래에서 일하는데도 참 새하얀 피부였다. 저렇게 볕에 타지 않는 피부는 세포의 색소가 다르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옆으로 쭉 째진 눈꼬리는 똑바로 향할 때면 째려보는 걸로 오해할 만큼 날카롭고 무서웠지만사실 지금도 종종 오해가 아닌 것 같다, 근래 겨우 그저 쳐다볼 뿐이라고 알게 되었다.

구슬이 굴러가듯 느릿하게 옮겨가는 시선, 그 안에 깃든 녹빛. 언젠가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보석이 떠올랐다. 동그랗게 연마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보석공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그만큼 깎인면이 많을수록 보석은 빛이 난다고 했다. 그의 눈이 그랬다. 어떨 땐 그늘진 숲처럼 짙은 암녹색, 어떨 땐 갓 따낸 박하처럼 싱그럽고 여린 녹색, 빛을 받을 때마다 다채롭게 색이 바뀌는 눈동자 너머로 시선이 부딪칠─……!

또 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번에야말로 눈이 마주친 게 아닐까. 그가 이쪽을 본 것만 같았다. 다 들킨 줄도 모르고 아가씨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우연이겠지. 모르겠지. 아니라면, 상대가 알아차렸으면 뭐라고 변명하지?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꼬이고 입은 풀처럼 딱 붙어버렸다. 큰일이에요, 큰일. 그렇게 온갖 호들갑을 떠는데 정작 청년은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들키지 않은 걸까? 아니면, 쳐다봐도 상관없다는 걸까.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진 아가씨가 툭 튀어나왔던 입술을 도로 쏙 넣은 채 이번에는 대놓고 쳐다보는 대신 그를 힐끔거렸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쉬는 날이라고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건 아니었다. 청년은 창고나 다름없는 집 근처 오두막의 보수를 막 끝내고 숨을 돌리던 중이고 아가씨는 그런 청년의 곁으로 점심 바구니를 갖다 주는 게 목적이었다.

바구니를 가져왔다고 알렸을 때는 거기 두고 가면 된다고 아주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고 목적을 이루었으니 돌아가면 될 일이었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게 현재다.

허술하게 세워진 오두막은 등불 하나 켜놓지 않고도 판자 사이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빛을 밝히고 있었다. 희거나 노랗거나, 아니면 바깥 풍경에 물들 듯 녹색 빛을 받으며 청년의 하얀 머리가 반짝였다.

예쁘다……. 작은 중얼거림이 흘렀다.

이어지는 건 얕은 한숨이었다.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면서, 뭘 하는 걸까. 오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곁을 뱅뱅 맴돈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처음에는 자신이 알던 이와 똑같이 생긴 게 신기해서, 믿지 못해서 청년을 몰래 지켜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은 대화 몇 마디로 사라졌지만그야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 에셸이 아는 주노는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도 아니었고그렇다면 어떻게 이곳에도 그가 있는 걸까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발칙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곳의 연인이었던 두 사람, 그렇다면 어쩌면…… 이곳의 그는.

당신이 제게…… 사랑을 알려주세요.

제게 사랑을 알려줄 사람인 게 아닐까?

발칙하고도 어리석은 기대였다.

저택에서 마차로 꼬박 일주일은 달려야 도착할 멀리 떨어진 마을, 그곳에서 제일 처음 만난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 자신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면 이제야 이야기가 시작하는 게 아닐까? 잠깐이나마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제부터 행복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기대는 며칠도 안 돼서 무너졌다. 그야, ──그가 아가씨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까!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부딪치기는커녕 마주칠 수조차 없다. 그의 시선은 늘 먼 곳을 향해 있었고 한 번도 이쪽을 향하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 대화를 몇 마디 나눠도 꼭 필요한 몇 마디 뿐거기 소금 좀. , , !. 아가씨는 금세 실망했고 단번에 침울해졌다. 이런 자신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고 풀이 죽어버렸다.

주인공 같은 건 없었다. 있는 것은 아주 잠깐 기연을 만난 운 좋은 아가씨 뿐. 그마저도 잠깐의 운은 성냥팔이소녀의 빈 성냥갑처럼 텅 빈지 오래였고 죽음과도 같았던 결혼식을 피한 뒤의 세계는 온전히 빈 손의 여자 책임이었다.

세상물정 어두운 아가씨의 각박한 책임이었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남의 둥지에 애써 몸을 구기는 동안 그 모습이 흡사 날개가 젖어 날지 못하게 된 작은 새와 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이상하고 또 오묘하고 참으로 번잡하면서도 어리석게 마음이 간다. 제 한 몸 간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또 그가 저를 피하는 걸 빤히 알면서. 제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면서 어느샌가부터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를 찾았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가 여자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그를 더 보고 싶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욕망, 일직선의 마음. 이런 감정을 좋아한다고 칭하는 걸까? 이렇게 하염없이, 이유도 모른 채 그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은 게 사랑인 걸까?

저기.”

…….”

……저기요.”

…….”

언제까지 볼 셈이지. 시선에 뚫리기 전, 기어코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밀짚모자를 뒤로 넘기고 지푸라기가 묻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내며 부스스한 낯이 찡그려진 채 어느새 딴 세상에 빠진 여자를 향한다.

몇 번을 불러도 알아채지 못하기에 하는 수 없이 남자가 그 앞까지 저벅저벅 걸어가야 했다. 낡은 나무 바닥이 끼이익, 소리를 내고 남자의 발이 지난 자리로 틈새의 햇볕이 깃든다.

창살을 따라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을 맞으며 그 앞에 당도했다. 여자는 여전히 무중이었고 남자의 입에서는 퍽 낯선 소리가 들렸다.

에셸.”

……. ……? ……!?!”

,

거품이 펑, 터지듯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급히 숨을 삼킨 아가씨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뭘 몰래 하는 데는 조금도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림자 드리운 사람과 그림자에 먹힌 사람이 남았다.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났다.

 

 

[4]

드넓은 평야를 소유한 대지주, 비옥한 땅 위에 소작농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금빛 물결을 일궈내는 마을의 알아주는 큰어른. 그래도 옆마을의 누구보다는 낫다더라. 그쪽은 글쎄, 땅주인이 다 가져가서 낱알 몇 개나 겨우 줍는다는데 우리 어르신은 대인배지. 왜애, 들었지. 농사는 지긋지긋하다고 저 북쪽으로 올라간 건너집 아들이 공장에서 손이 잘렸다잖아. 보상금 한푼 못 받고 내쫓겼다더라. 그에 비하면 우리는 참 행복하지 않냐.

누군가는 그렇게 수군대는가 하면 또 한쪽에선 아니, 그래서 우리가 밭 갈고 씨 뿌리고 거두고 다 하는데 저기 손가락만 빨다가 싹 다 가져가는 게 잘한 거랍니까? 우리는 왜 우리 이름으로 된 땅 한 평 없냐구요. 노동의 대가라는 걸 정당하게 받겠다는데 그게 뭐 잘못된 거라고 죄 지은 양 속닥거리는 거요. 울분에 찬 목소리도 나왔다.

기껏 노예 해방을 외치고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자본이라는 게 새로운 신분이 되어버린 시대, 후대에 두고두고 회자될 러다이트 운동이 머지않은 시기였다.

그렇게 북이고 남이고 폭풍전야처럼 물 아래로만 술렁거리는 동안, 감사하게도 조그만 땅이나마 자기 이름으로 된 곳을 가지고 경작해 먹고 사는 작은 마을은 퍽 평화로운 축에 속했다.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처자 하나를 두고 며칠간 숙덕대기도 했으나 인심 좋고 넉넉한 실질적인 집주인, 주노의 모친이 모두에게 내 아는 먼 조카요. 선언한 뒤로는 소문도 사그라들었고 처자가 그 집 아들을 졸졸 따라 다닌다더라는 목격담이 이어진 뒤로는 아하, 며느리를 데려왔구나.’ 다들 알음알음 언제 혼례가 열리려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혼례란 곧 마을 전체의 축제다. 가뜩이나 손이 큰 집이니 또 얼마나 맛깔나는 음식을 준비할까. 그러고 보니 저 아래지방의 어디는 신부가 하룻밤 새 홀연히 사라졌다더니 들었어요? 아이고, 들었고말고. 괴물이 잡아갔다 신에 귀의했다 시종과 눈이 맞아 도망갔다 온갖 소문이 다 돈다면서요. 그래서 사실은 뭐라고 하더래요? 그게 사실은……

, 당신을, ……좋아, 해요.”

──사실은, 소문의 주인공은 초여름의 파릇파릇한 밀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파도치는 밭 한가운데서 엉뚱한 고백을 하고 있었다.

뙤약볕에 턱을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속눈썹을 찌르는 땀방울에 바쁘게 눈을 깜빡이다 보면 우는 것도 같았는데 따끔따끔해서 빨갛게 붓기까지 하니 오해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원체 남의 눈치를 보느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움츠러져 있던 여자였다.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고 죄 지은 사람마냥 늘상 살금살금 다니고, 그러다 한 번씩 시선이 맞으면 화악 달아올라 기름을 잔뜩 먹인 등불이 타오르는 것 같던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눈도 마주하지 못하며 더듬더듬 사랑을 고백해왔다. 놀림을 당하는 게 아닌가,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고백이었다.

저만 마주치면 빨갛게 달아오르던 얼굴이, 들킨 줄도 모르고 빠안히 쳐다봐오던 시선이, 고개를 푹 숙여가면서도 멀리 가진 못하고 바보같이 곁을 맴돌던 행동이, 하나하나가 전부 연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로?

의문이 앞섰고 뒤따르는 것은 불신이었다. 대답이 곤란해져 잠시 얼굴을 덮었다. 키보다 큰 편인 손이 얼굴을 완전히 덮은 사이 그 틈새의 시선이 여자를 향했다

고백한 주제에 여자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선은 발끝에 박혀 있었고 눈이 좌로 우로 바쁘게 굴렀다. 깍지 낀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모양은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는데 필사적으로 도망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왜 도망치고 싶어 하지. 고백은 왜 한 건지? 애초에 여자가 말하는 좋아한다란 무슨 감정인 걸까. 그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고 눈앞의 이가 아는 건지도 불확실했다. 막연하게도 남자는 저이가 말하는 감정이 사랑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보다는 무언가의 착각일 거라고. 당신이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닐 거라고. 미안해요. 첫 운을 떼자 상대의 귀가 쫑긋 섰다. 남자는 멋쩍게 눈을 굴렸다.

하지만 당신은제가 어떤 사람인지잘 모르잖아요.”

생각에 비해 대답은 짧았다.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처럼 한참 꼼지락거리던 여자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대신 주노는 보았다. 바싹 마른 흙 위를 투둑, 툭 적시는 물기를.

, 죄송해요. ……그러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제 말은, 그런 게…….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 잊어주세요.”

, 또 저렇게 금세 도망가잖아.

멀어지는 그녀를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제든 저렇게 떠날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 역할은 저 작은 새가 자립할 때까지 도와주고 보살피는 것이다. 거기까지가 연민으로 베풀 수 있는 선이었고, 그 이상부터는 연민과 다른 이름이 되고 만다.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제 답은 틀리지 않았다.

쏴아아ㅡ, 다시 바람이 불었다. 약간의 물기마저 앗아가는 뙤약볕 아래 밀밭이 푸르게 흔들렸다.

 

[3.5]

 

곧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을 나온 지 보름을 넘은 시점이었다. 이 가족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너무나 친절했지만 그 호의에 무작정 기대 어리광을 부리는 건 집을 벗어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과 같았다. 에셸은 스스로 서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막상 결심을 하고도 막막하기만 했다. 빵 하나도 혼자 굽지 못했고 빨래하는 법은 간신히 익혔다. 차가운 개울물에 덜덜 떨면서 겨우겨우 제 옷을 빨고 나면 제대로 짜내지 못해 축축한 옷을 하루 종일 말렸다. 일은 그나마 바느질에 재능을 찾았지만 삯바느질을 받기 위해서 또 낯선 사람의 집 문을 두드리고 일을 받기까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곳을 떠나 갈 곳이 없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야지, 훨훨 떠나가야지 생각만 할 뿐 제가 사는 나라의 크기도 정확히 모르는 이가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있을까. 다만 하나쯤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바다는멀까요?”

“? 아뇨. 자전거를 타면, 하루면 갈 거예요.”

그에게 점심 바구니를 챙겨주러 간 또 다른 어느 날이다. 혼잣말처럼 내뱉은 소리에 답이 돌아오자 말을 꺼내놓고 또 바보처럼 놀랐다. , , 그렇구나. 가깝네요. 더듬더듬 답을 하자 그에게서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 대화는 완전히 끝난 걸까 싶을 즈음 그가 말했다.

태워 줘요?”

그는 왜 제게 잘해주는 걸까. 아니, 잘해주는 이에게 같은 말을 붙이는 건 실례겠지.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해주려는 걸까. 눈이 맞았다. 다른 의도라곤 보이지 않는 깨끗하게 연마된 녹색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는 바다를 좋아할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여자는 벌써부터 바다가 좋아질 것만 같은데.

가보고싶어요.”

그럼 가 봐요.”

같이. 소리 없이 들려온 말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돌려줄 것 없이 쏟아져오는 그의 호의가 조금 기뻤고, 어쩌면이란 기대가 들었다. 그래, 어쩌면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쭉 서툴고 요령이 없고 그러면서 자기 감정이 바쁜 나머지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참 이상하지. 좋아하는 나머지 상대에게 보일 나만을 신경 쓰고, 정작 나를 보는 상대의 얼굴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벌써부터 들떠 어떻게 예쁘게 꾸밀지를 고민하다가 저택에 있을 적처럼 꾸밀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시무룩했다가 똑같은 리본들 중 그나마 깨끗한 걸 골라 머리를 묶으며 천치처럼 굴었다.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가 페달을 밟았다. 에셸은 방석을 깐 뒷좌석에 앉았다. 폭신폭신하란 가족의 배려였다. 그런데도 마차나 자동차와는 전혀 다른 승차감에 엉덩이가 아파서 울상이 되었다가, 언덕을 오를 때는 내려서 함께 자전거를 끌고 오르고 내려갈 때는 무서워서 그의 허리에 꽉 매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 혼자였더라면 훨씬 금방 당도했을 텐데 에셸을 매달고 움직이는 통에 두 사람이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름다워요. 세상에, 말도 안 돼.”

해변까지 내려가려면 아직 거리가 남았지만, 숲이 막 끊기는 지점부터 이미 절벽 바깥으로 바다가 보였다. 처얼썩, 철썩. 아래로는 거센 파도와 함께 흰색 포말이 절벽에 부딪치고, 수평선 너머로는 저물어가는 해가 바다에 오렌지색 물감을 풀고 있었다. 사진만으론 느낄 수 없는 압도적인 자연이 펼쳐졌다. 에셸은 금세 매료되고 말았다.

, 그렇지. 만약 살 곳을 정한다면 이곳이 좋겠어. 바다가 가까운 이곳이 좋겠어.

어쩌면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었을지 모른다. 저를 향해오는 시선을 에셸은 눈치 채지 못했고, 해가 전부 저물어 캄캄해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곳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결국 그날 중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 바닷가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한 방을 나눠썼는지는 이만 서술을 줄이기로 한다.

 

[5]

고백이 충동적이었느냐 묻는다면 부정의 여지가 없었다. 바다를 보고 돌아온 바로 며칠 뒤, 사라진 신부를 찾는 수색대가 결성되었다는 소문이 이 시골마을까지 들려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풍문을 어디까지 신뢰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달링 가문에서는 딸을 고인으로 취급하여 유령의 장례식이라도 치러주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신랑되는 측에서 제 신부가 어느 악의적인 세력에 의해 납치된 것이 틀림없다며 수색을 제안했고 제대한 동료들을 이끌어 신부 찾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결혼식 당일에 사라져버린 치욕스러운 딸을 차라리 죽은 사람 취급하는 집안도 집안이었지만 상대측의 태도는 왜?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심심한 거지.”

, 심심해서요?”

그렇고말고. 원래 남자들은 쓸데없는 일에 열 올리기를 좋아해. 그 정혼자라는 사람, 막 군대에서 돌아왔다고 했지? 힘은 남아돌고, 자기 잘난 능력은 과시하고 싶고. 신부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니까 또 얼마나 화제가 돼. 아주 딱이지, .”

어휴, 그래. 얼마나 재미있겠어. 병정놀이 하던 거랑 비슷한 거야. 남자들은 나이를 몇 살을 먹어도 애라니까, .”

그러다 정말 사라진 신부를 찾기라도 하면 아주 코가 으쓱해지는 거야. 게다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자는 남자대로 자기가 싫어서 신부가 도망갔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잖아.”

그건 안 되지. 끌끌.”

아이고, 새댁. 그게 아니야. 좀 더 팔 힘을 이렇게 써서, 이렇게 비틀어야지. 옳지, 옳지. 아니, 힘을 더 팍팍 써보라니까. 빨래하는 아주머니들 틈에서 낑낑거리고 힘을 주었다. 아가씨의 손은 이미 안간힘을 다해 하얗게 질렸는데 아주머니들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해 보였다. 쫄쫄, 쫄쫄쫄, 빨래에서 짜인 물이 개울로 다시 흘러간다. 한참을 쥐어짜고 나니 그 날은 전보다 빨래가 금방 말랐다.

마을 사람들은 주노의 어머니 말을 철석같이 믿어 에셸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이 불안했다. 이곳까지 수색대가 찾아와 상냥한 분들이 저로 인해 곤란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좋을까, 조급한 한편으로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자포자기 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어차피 저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당신도 저를 좋아해준다면.’

잠시 달콤한 꿈을 꾸었다.

그에게 거절의 말을 듣고 돌아온 날은 펑펑 울었다. 그의 거절이 슬픈 것보다도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만약 그가 제 마음을 받아준다면, 그랬다면 이곳에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얄팍한 바람이 들통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신부가 되어 마을사람들의 새댁 소리에 아, 아니에요. 부정하는 대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 단란한 가족의 일원으로 남아 만의 하나 수색대가 당도한다 하더라도 이곳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앙큼한 거짓말이나 해보고.

그런 꿈을 꾸기도 했다. 다 끝나버렸다.

밀밭을 배경으로 그에게 마음을 전하던 날, 그가 보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건조하게 곤란한 듯 했고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 덤덤한 얼굴 위에 숨김없이 존재했다. ‘이세계의 그에게 당신이 저를 사랑해달라고 고하던 날과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가 당신을 곤란하게 했구나.

한 번 겪고도 멍텅구리처럼 반복했다. 평생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도 몰랐다. 의지할 상대를 찾아서 헤매이다, 기대가 꺾이고 실망하고.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쓸쓸하고 또 외로웠다. 앞으로도 또 기댈 일을 찾을지 몰랐다.

다만 그는 아니다. 더 이상 그는 아니다.

짐을 쌌다. 얼마 되지 않는 조촐한 가방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빈 손이었는데 지금은 가방 하나 분량이 나왔다. 그간 신세를 졌으니 떠나겠다고 인사를 드렸다. 나중에라도 돈이 모이면 꼭 갚겠다고 하자 그들 가족은 크게 웃으며 그런 소리 말고 또 찾아와도 좋다고 해주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있으며 저택의 사람들을 종종 떠올렸다. 떠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그곳에서 사랑받았음을 잊지 않는다. 이곳의 사람들 또한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우울과 기대, 불안과 설렘, 양가되는 감정을 안고 막 마을을 떠나는 날에는, 그런데 어째서?

, 어째서?”

……그야, 혼자 보낼 수 없으니까.”

그가 동행했다. 자연스럽게 옆을 따라 걷는 그를 황망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다급하게 뒤따랐다. 쓰라리게 남은 상처 위로 찬바람이 불었다. 마음이 추워졌다.

 

[6]

그가 여행길에 동행했다. 자전거는 없었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도착하고도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버려진 집을 수리하고 사람이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남자가 나무판자를 떼어 와 못질을 하는 동안 에셸은 열심히 싸리 빗자루를 들었다.

첫날은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판잣집에서 잤지만 다음날엔 바람이 다 막혔다. 하루가 더 지나자 커튼을 달고 문고리와 창문의 경첩을 제대로 달 수 있었고 테이블과 의자가 생겼다. 경사가 높은 계단은 아직도 오르기 무서웠지만 주노가 달아준 밧줄 난간을 단단히 쥐고 조심조심 오르내릴 수 있었다.

집 곳곳에 등불을 달고 가스를 충전하고, 여유가 생기자 화병에 꽃을 꽂아놓을 수도 있게 되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어떻게 좀 사람 사는 꼴을 갖춰갈 동안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어째서?

아니, 생각하지 말자.

돌아가고 돌아가지 말고는 그의 맘인걸. 굳이 생각하지 말자. 그게 아니라 기대하지 말자.

그는 돌아갈 것이다. 그 언젠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갈 사람이다.

더 이상 꿈꾸지 않기로 했다. 바보같이 그를 힐끔거리며 관찰하기도 그만두었다. 그의 호의를 착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진의를 궁리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기댄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에는 그에게 받은 게 많았다.

에셸 달링은 그의 마음을 두 번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발화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혼자잘 해볼게요.”

파도 소리에 곧 묻혀버릴 듯 작고 희미하면서도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당신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제가 걱정되어 여기 남고 만 상냥한 당신이 그만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잘 웃었을까. 알 수 없었다. 밤이 어두워 다행이라 여겼다. 발치의 빛만을 바라보며 잘 올라가지 않는 뺨을 당겨 올렸다.

……잘 됐네요.”

돌아오는 답은 여전히 상처 위의 소독약처럼 쓰라렸고 술렁거리는 마음을 알아차리듯 가스등의 빛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또한 곧 사라질듯 흔들렸다. 밤이어서 다행이다. 파도 소리가 커서 다행이다. 덕분에 들키지 않을 것이다.

멍하니 빛만을 응시하는 사이 어둠이 한 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엉망인 제 표정이 있었다.

──그는 언제 돌아가는 걸까. 어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는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텐데. 그를 찾지도 않을 텐데. 그가 없이 사는 법을 익힐 수 있을 텐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바보 같은 짓도 그만 둘 수 있을 텐데.

저는 아직도 당신을 좋아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착각도 아니에요. 정말로 당신을 좋아해요. 그래서,

당신의 곁에 있기 괴로워.

 

그가 입술을 겹쳤다.

 

 

[7]

꿈이 깨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꿈인지 구분가지 않았다. 사실은 전부 꿈이라면 어쩌지. 영원히 깨어나지 말까? 무엇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걸까,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마음의 갈피조차 모르는 채 여자는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풍겼다.

 


시간여행 합작에서부터 시작된 19세기 AU의 주셸.

시간여행합작 > 그 사이에 썰 > 붉어질 때까지 기다려를 거치면서 완전히 연인이 되었는데 그 과정을 풀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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