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올리버
언해피데이
숨이 막힐 정도의 갑갑함, 코를 찌르는 시원한 스킨 냄새, 품을 감싼 체온은 에어컨 바람을 가로막으며 온기를 안겨준다. 글쎄,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비몽사몽인 채로도 비현실적임을 감지해낼 만한 비상사태였다.
에스프레소를 원샷한 기분으로 정신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온몸의 핏기가 사악 빠졌다. 매니저가 보았다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만한 기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녀가 눈을 뜬 자리는 무려 (어쨌든) 남자친구의 품 안인 것이다.
(일단은) 남자친구 품에서 눈을 뜨는 게 뭐 어때서? 그야 뭐가 어떻다. 태어난지 40개월을 지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남들 다하는 ‘평범함’을 보내본 적 없던 여자는 이게 차라리 버라이어티 촬영 중이길 바랐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신디’가! 남자 품에서 일어나다니! 상황에 놀란 나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위한 비상식적이던 지난밤의 전개는 잠시 잊어버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자리에서의 탈출이었다.
다행히 올리버는 전날 밤 지나치게 무리한 탓인지─그야 평범한 인간의 일주일치 에너지를 소모하기야 했다─신디가 품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눈물 자국은 없었고 표정은 꽤 태평하기까지 했다. 얄미워 죽겠군. 속으로 그를 잘근잘근 씹는 상상을 하며 신디는 매니저에게 데리러 올 것을 부탁했고 주변에 파파라치가 없는지 확인도 시켰다.
매니저가 올 때까지 할 일이 많았다. 올리버의 방에서 멋대로 모자와 마스크 따위를 뒤지고 모습을 감출만한 옷도 고르고, 여기는 대체 어떻게 온 건지 신발마저 없는 것을 보고─그야 날아서 왔나?─기함을 토했으나 대충 그의 슬리퍼 하나를 골라 신고 테이블에 「옷이랑 신발 비용은 나중에 청구해요. C.」 쪽지를 남기고, 미리 렌즈 너머로 복도는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을 한 뒤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살금살금 나왔다.
그의 집 주변에는 집앞에 죽치고 있는 극성 팬이나 파파라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 참 좋겠군. 제대로 보안이 되지 않는 허술한 맨션을 멋대로 헐뜯으며 매니저의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신디는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정신이냐고, 왜 그 집에서 나오냐고 잔소리를 쏟아붓는 매니저의 말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얼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신디.]
[또 차단했죠?]
[내 연락 또 무시할 거예요?]
[자꾸 차단만 하지 말고]
[좀!]
[대화 좀 해요……]
[제발요]
이번에는 올리버가 틀렸다. 신디는 차단하지 않았다. 차단하지 않은 채 실시간으로 쌓이는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세워둔 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던 중이다. 한편으론 차단을 하든 하지 않든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차단하는 걸로 불만이 크길래 기껏 하지 않아 봤는데 그가 보내오는 연락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건 다르지 않다. 이럴 거면 해도 상관없지 않아?
그 때, 지이잉. 하고 휴대폰이 울리며 이번엔 전화가 걸려 왔다. 역시나 발신자는 올리버. 신디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뒤집어 놓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다음 스케줄은 인터뷰가 하나, 촬영이 두 건, 올리버와 찍는 리얼 버라이어티가 나흘 뒤. 이 정도면 여유로군. 체중계에 올라간 신디는 죄책감 없이 치즈 반, 페퍼로니 반 피자에 브라우니, 바닐라 아이스크림, 제로 콜라까지 주문하고 뒤집어 누웠다.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밤은 끝이 났지만 흔적은 사라져도 머릿속에 각인된 여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체크해 키스마크 하나 없다는 걸 확인했음에도 반나절이 꼬박 지나도록 때때로 목덜미가 욱신거리거나 허벅지 안쪽의 열감 같은 게 느껴졌다. 온몸에 그의 냄새가 밴 것도 같았다. 정말 지독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일에 휘말린 자신도, 저 때문에 휘말려버린 그도.
쿠션에 얼굴을 박은 채 부재중 기록이 남은 휴대폰을 켜고 메시지를 두드렸다. 헤…어…ㅈ……, 아니지. 소용없어. 문자를 지우고 다시 엎어진다. 이번 일로 신디가 깨달은 한 가지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걔도 내 말 안 듣잖아!」
유치찬란하지만 알기 쉬운 한 줄의 명제다.
바꿔 말하자면 헤어지는 것도 계속 사귀는 것도 신디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결국 모든 결정권은 올리버에게 있었으므로. 하늘처럼 치솟은 시소의 끝, 그의 마음이 주는 무게만큼 떠오른 신디는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길 뿐이다. 언젠가, 그가 자신을 내려줄 때까지.
딩- 동, 피자가 도착했다. 현관에 덩그러니 있던 쇼핑백을 신발장에 넣고 사각판을 받았다. 쇼핑백에는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던 남성용 슬리퍼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매니저가 넣어준 것이다.
「여기서 너희 집까지 가는 동안에도 방심하면 안 돼. 남자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녔다는 게 알려져 봐.」
「최악이네.」
그 자리에서 매니저 차에 있던 여분의 신발로 갈아 신었지. 올리버에게는 언제나 이럴 거면 확 스캔들이나 내버리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정작 노출을 가장 두려워하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디 본인이었다. 여론이 언제 어떻게 비수를 꽂는지 이미 지독하게 겪었다. 또 겪는 건 사양이다. ──그런 것치곤 꽤 조심성 없이 만나나? 싶기도 하다만은 전부 계산을 끝마친 방종이었지.
욕망에 솔직하고 충동적이면서 섬세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때로는 건성이고 때로는 건조하며 때로는 건방질 정도로 거만하다. 본인이 맡은 배역과 닮은 것이라곤 착해 빠진 것 같은 얼굴뿐, 속은 전혀 달랐다. 그래서 종종 의문이었다. ‘올리버는 나를 왜 좋아하는 거지?’, ‘배역에 너무 몰입해서 에셸을 좋아하는 걸 나로 착각하는 건 아냐?’, 대체 나 같은 여자 알면 알수록 좋아할 구석이 어디 있다고.
TV를 켜고 아무거나 보이는 영화를 재생시켰다. 소파 위에 두 다리를 모은 채 피자에 타바스코를 왕창 뿌리고 얼음컵에 콜라를 채우고 피클을 찍고……,
[사랑해요……]
화면 너머의 남자가 사랑을 고백한다. 애절한 목소리에 문득 그를 망가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연관성도 없이, 어처구니도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신디는 먹던 피자를 내려놓았다.
이걸 해피서큐버스데이랑 연속으로 올리고 싶었는데 백업 하나를 빼먹었다(데헷콩
본래는 이 이야기의 끝을 신디의 "그러니까 나랑 헤어질 게 아니면 내가 당신을 더 좋아하게 만들어 봐요!" 라는 선전포고로 할 생각이었는데... ...
신디가 거기까지 가주질 않더라. 올리버가 자길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도망가는 여자.
'with.주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4) 고작 그런 것 (0) | 2023.09.02 |
---|---|
33) 500 챌린지 (0) | 2023.08.10 |
31) 밀밭에 부는 바람 (0) | 2023.08.03 |
30) 소년소녀표류기 (0) | 2023.07.28 |
29) 오묘한 사이 (0) | 202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