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주노
어제가 무려 주셸 500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아침부터 도착한 연인의 메시지에 주노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듣자하니 여기에 답하지 못해서 싸우는 커플의 수가 저 살비 앞바다의 모래알만큼 많다던가. 물론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었다. 22일, 100일, 200일, 300일, 1주년을 거쳐…… 벌써 오늘로 500일. 그러니까 즉 사귄 지 500일 되는 기념이라는 특별한 날인 것이다.
지금도 기록을 할 때 스마트 로토무보다 노트와 펜을 선호하는 주노는 일정 같은 것도 스케줄러에 수기로 작성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디데이 어플 같은 것도 써본 적이 없고 오늘이 사귄 지 며칠째 되는 날인지도 생각나서 확인해볼 때가 아니면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반면 스마트 로토무를 이용해 수많은 어플을 활용하고 심지어는 그걸 아이콘 색깔에 맞춰 폴더 정리까지 해놓는 에셸은 휴대폰 상단에 늘 디데이 앱을 켜놓은 채 기념일마다 주노에게 [띠링! 깜짝 편지가 도착했어요~(❤´艸`❤)]하고 오늘이 저희 사귄 지 며칠째래요! 메시지를 보내오곤 했다. 그러면 주노는 [으아아, 벌써 그렇게요? 언제나 고마워요. …사랑해요.] 답장을 보내다가도 '아직 며칠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지나간 날짜들을 믿기지 않는단 듯 보고 마는 것이었다.
나도 디데이를 더 챙기는 편이 좋을까? 고민한 적도 없지는 않다. 그러면 에셸이 옆에서 '저도 생각날 때마다 헤아리는 것뿐인걸요. 주노는 주노의 페이스대로 하면 돼요.' 답해주어서 그렇구나, 내 페이스대로. 생각하며 보내온 게 어느덧 오늘. 오늘만은 놓치지 않겠다고 동그라미를 쳐놓은 달력이 눈에 똑똑히 들어온다. 500일이었다. 큰 숫자다.
주노는 얼른 답장을 보냈다.
[벌써 500일이나 되었어요. 오늘도 많이 좋아해요, 에셸.]
[저도 좋아해요. 아주 많이 사랑해요. 이따 등대에서 볼래요? 데이트 해주세요.]
다, 당연하죠. 서둘러 답장을 보내려다 현관 문턱에 기우뚱, 걸릴 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주노는 제자리에 서서 답장부터 보낸 뒤 서둘러 직장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퇴근이 기다려져 큰일이었다.
“어라, 달링 씨는요?”
“오늘 오후 반차~ 얼굴이 아주 싱글벙글이던데.”
“아아.”
또 러브러브하러 가는구나. 모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생각이었다.
“신기하죠. 자기 입으로 티내는 분은 아닌데 저렇게 온몸으로 티가 난다는 게.”
“그러게요. 그래도 좋아 보이니까 좋네요.”
맞아맞아. 잠깐 자리에 없는 사람을 화두에 올려 오후 수다를 떨던 이들은 곧 삼삼오오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어느새 그들의 머릿속에는 내일 돌아온 그녀가 이번엔 무슨 마카롱을 사와서 돌릴까 뿐이었다.
오후 반차로 자유로워진 리본 도비는 소중한 파트너와 함께 뙤약볕에 녹아내릴 것 같은 등대 앞에 섰다. “오늘은 미루고 미룬 대청소를 할 거예요.” 결의에 찬 말에 샹델라가 그러든가~ 팔을 휘휘 흔든다. 그때마다 가뜩이나 더운 계절에 열풍이 불었다. 꺅, 위키링. 볼에 들어갈래요? 트레이너의 비명에 뭐어엇? …그것도 그렇긴 하지. 포켓몬이 납득을 한다.
오늘의 작업 도우미로 당첨된 건 팔이 유난히 긴 다크펫이었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에셸은 매번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고 미룬 아지트의 리뉴얼을 시작했다. 일단 동그란 창문들을 다 열어젖혀 환기를 시키고 오래되거나 계절에 맞지 않은 물건들은 차곡차곡 상자에 담아 뺀다.
10년쯤 된 오래된 러그나 면직물들, 여전히 예쁘지만 조금 낡은 것들을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곱게 접어 수납했다. 대신 꺼내든 건 여름을 맞이해 주로 흰색, 그리고 싱그러운 연두색과 빼놓을 수 없는 분홍으로 된 종류였다.
테이블과 책장 등에는 흰 레이스를 깔고 천장과 창문에 걸린 꼬마전구 위에는 가느다란 넝쿨식물의 모조품을 달았다. 그럴듯한 나뭇가지와 푸른 잎사귀, 흰 꽃, 하나하나 장식을 해나가다 보니 구상대로 만족스러운 리뉴얼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말이죠. 여길 혼자 쓰는 동안엔 야금야금 새로운 걸 가져와 쌓아두기는 했지만, 특별히 바꾸려고 한 적은 없었어요.”
이 안의 시간은 쭉 고인 채였거든요. 바나링을 무릎에 앉히고 느긋하게 몸을 젖히자 한결 환해진 실내가 한눈에 들어 왔다. 이렇게 밝고 넓기도 했구나. 과거에는 일부러 밝게 꾸미지도 않았던 것 같다고 뒤늦은 이해가 따랐다. 조금 어둡고 어두울수록 작아 보이고 그럴수록 아늑하고 꽁꽁 웅크릴 수 있는 저의 아지트.
하지만 이제는 혼자 웅크리는 공간이 아니니까.
저만의 아지트였던 것이 두 사람의 아지트로 바뀌게 된 것도 벌써 500일이 넘었다. 그만 닫기 위해 뻗은 창 위의 손에 그의 손이 겹치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렇게 손등이 뜨겁고 얼굴이 빨갛게 되는데. 시간이 어쩜 이렇게 빠를까.
동그란 창밖으론 새파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푸르기만 한 여름의 한가운데다. 창 너머의 풍경이 드넓어 문을 닫는 대신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았다. 습하고 짠바람이 얼굴에 확 부딪쳤지만 그것도 왠지 즐거웠다.
그를 통해서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세상이 그로 넓어졌다. 가끔은 이렇게 행복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막연한 불안이 가슴을 술렁이게 했지만 그럴 땐 어서 연인을 만나 힘껏 껴안는 것으로 불안을 녹여버렸다. 어쩌면 이조차도 허그를 위한 핑계는 아닐까 개구진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른 보고 싶다…….”
중얼거리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이럴 때가 아니다. 파티 준비, 파티 준비. 등대 리뉴얼 기념사진을 찍어두고 그 위에 기념일을 위한 꾸미기를 더한다. 오늘의 달링은 로맨틱 달링. 최고조의 사랑을 담고야 말겠다.
점심시간을 통으로 써서 케이크를 만들었다. 덕분에 점심은 거르고 말았지만. 연인이 알았다면 ‘네에? 식사를 걸렀다고요? 말도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주노!’ 하고 볼을 부풀리며 잔소리를 할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늘 주고 싶은 게 많다.
그가 주는 선물은 대체로 그랬다. 퇴근길에 들른 꽃집에서 꽃다발, 파는 것보다 못해도 정성 담긴 수제 케이크, 한 번도 싫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 직접 우린 밀크티……. 연인이 과거 꿈꾸었다는 값비싼 레스토랑이나 화려한 이벤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느 것 하나 진심이 듬뿍 담긴 소박한 마음이다.
이번에도 분명 최고의 미소를 보이며 기뻐해주겠지. 지금이라면 익히 확신할 수 있는 연인의 표정을 상상하며 주노는 여름 노을이 길게 꼬리를 내린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익숙한 오솔길을 올라갈수록 못 보던 게 하나씩 있었다. 이건 화살표…, 그리고 쪽지? 쪽지의 가장자리마다 리본 스티커가 하나씩 붙어 있어 누가 쓴 건지 표식도 확실하다. 열어보라는 거겠지. 조심조심 하나를 열어보자 연인의 글씨체가 있었다.
[그거 알아요, 주노? 최근엔 ○○챌린지라는 게 유행이라고 해요.]
“챌린지? 들어본 것 같기도….”
다시 한 걸음, 다음 쪽지를 오픈.
[저희는 사귄 지 500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기념으로 500 챌린지 같은 걸 해보는 거예요.]
에셸, 또 이상한 발상을 한 건 아니겠죠. 연인을 향한 이상한 확신도 500일 동안 더해졌다. 불안불안하게 다음 쪽지를 연다.
[주노가 무사히 500 챌린지를 달성하면 소원을 들어줄게요.]
“뭘 시키려고요, 에셸~….”
다음 쪽지를 열어보는 게 두려운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피할 수 없다. 도망갈 수도 없다. 주노는 마음을 다잡고 이어지는 쪽지를 하나씩 펼쳐보았다. 과연 쪽지에는 숫자가 500이기만 하면 되는 건지 온갖 얼토당토않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샌드위치 500개 먹기]
[배틀에서 500번 승리하기]
[계란프라이 500개 부치기]
[윗몸일으키기 500번 하기]
[500명과 프리허그하기]
[책 500권 읽기]
[마을 500곳 다녀오기]
[500그루 수확하기]
이걸 다 하라는 건가, 설마. 에이 설마……. 어쩐지 등대 가는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입구 바로 앞에 마지막 쪽지가 보였다.
[연인에게 뽀뽀 500번 하기]
──이 중 아주아주 쉬운 게 하나 있죠? 꼭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문 너머에 그의 500 챌린지 성공을 응원하는 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내로 마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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