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청춘 아포칼립스 합작을 하고 왔어요~^^)0
소년소녀표류기
:prologue
[지금부터 하계방학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겠습니다. 각자 국기를 바라보고 서서……]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에서는 한창 방학식 방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소녀는 두 사람밖에 없는 텅 빈 교실에서 멍하니 칠판 위, 국기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례를 하는구나. 형식미라는 걸까. 그러나 뭐, 나쁜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
심장 위에 손을 올린다. 의례적인 동작이었을 뿐인데 두근두근, 아직까지도 뛰고 있는 이 고동이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려주었다. 두근두근, 앞으로 더 살아가야 함을 알렸다. 두근두근, 고동은 손바닥 아래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옆, 맞잡은 손의 안쪽에서 상대방의 맥박을 느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러니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했다. 이 숨 막히는 자연 속에서. 무심결에 손을 꽉 잡았던가, 아니면 옆 사람이 붙잡았던가. 고개를 돌리자 곧장 눈이 맞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자라버린 나무가 볕을 가리듯 어딘지 모르게 그늘진 녹음이, 자연이 그곳에 있었다. 우울과 슬픔에 먹혀버린 듯 눅눅한 빛깔에 소녀는 숨을 삼켰다. 본능처럼 손이 앞섰다. 손목의 붕대가 얼핏 그를 스친다.
[……유례없이 긴급한 상황입니다만 부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방학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교직원 일동은 언제나 학생의 안전만을 바라며……]
머리카락을 걷어내듯 그늘도 걷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손끝이 닿자 소년은 움찔거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새 푸석푸석해진 결을 넘기자 숨어 있던 눈썹이 드러났다. 한껏 찡그리고 구겨진.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왜, 왜 웃어요…. 기가 죽은 듯 들려오는 물음에 볼우물이 패이도록 소녀의 미소는 짙어진다. 그냥요, 그냥.
그냥, 함께 있는 사람이 선배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복잡한 내심을 숨길 줄도 모르고 얇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어쩔 줄 모르던 소년도 그 말에는 답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든 것인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풋된 청춘이었다. 무르익어가는 청하이기도 했다.
20xx.07. 어느 지독한 여름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서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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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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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방학하면 뭐 할 거야?”
“난 부모님이랑 여행 가기로 했어!”
“좋겠다~ 우리집은 덥고 사람 많다고 아무 데도 안 간대.”
“에이미가 같이 바다 갈 사람 모으던데 너도 가보면?”
“……나 걔랑 별로 안 친하잖아. …아니, 너희는 왜 나랑 안 가??”
“그래, 그래.”
시험이 끝나고 고대하던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이 붕 뜬 아이들을 진정시키려고 교사진은 갖은 고군분투를 했지만 이미 아이들은 풍선처럼 저 먼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성적 가지고 협박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결국 선생님은 다른 수단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어쩌냐, 너희. 곧 장마라던데.”
올해는 예년보다 장마 기간이 길어서 잘못하면 한 달 내내 내릴 수도 있다더라.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원성을 냈다. 쌤 나빠요! 아니, 선생님이 비 내리냐? 일기예보가 그렇다잖아.
초를 치기 위한 목적으로는 효과적이었다. 아이들의 기세가 꺾였다. 몇 년 전부터 이어지던 이상기후다. 겨울은 강을 꽁꽁 얼려버릴 정도로 추워지고 여름은 물이 범람하도록 비가 내리고, 봄가을은?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답하는 아이들만이 있겠지.
올 여름도 더위보다 비를 조심하라는 예보가 연이었다. 이제는 여름이면 수영복이나 선크림보다 우비와 장화가 더 잘 팔리는 시대다. 피서 계획이 엉망이 되면 어쩌지. 아이들이 술렁였다. 소중한 여름방학을 장마와 함께 보내야 하다니.
그 사이에서, 소년은 홀로 다른 걱정에 잠겨 있었다.
‘화단은 괜찮으려나….’
[화단, 괜찮을까요?]
소년이 그 메시지를 확인한 건 방과 후였다. 이, 이럴 수가. 2시간이나 답장을 못했잖아. 그래놓고 또 답장을 하기까지는 몇 번을 썼다 지운 건지. 소년이 보낸 답장은 길지도 않았다. [괜찮을 거예요. 제가 가서 볼게요.] 어떻게 보면 건조하기까지 한 두 줄. 보내고 나서야 아차 했다. 상대가 보내오듯 이모티콘이라도 하나 넣는 거였는데.
어쩌지, 지금이라도 이모티콘을 하나 붙여 볼까. 고민하던 찰나 상대가 빠르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곧장 전화가 걸려 왔다.
“어엇, 엇.”
전화는 메시지와 다르다. 목소리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얼른 받자 너머에서 경쾌한 인사가 들렸다.
[주노 선배, 안녕하세요.]
“아, 안녕… 하세요.”
[오늘도 화단 돌보러 가려고요? 저도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 그럼요. 와주면… 오히려 제가, 고마운데. 그런데… 에셸은 그, 원예부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 도움을 받아서. 아, 싫다는 건 아니고! 전혀 아니에요. 그냥, 그…….”
가뜩이나 바쁜 사람을 이런 일로 붙잡아도 되는 걸까. 하물며 상대는 학교에서 가장 일을 많이 맡기로 자자하지 않던가.
전화를 건 상대, 한 학년 후배인 소녀는 남을 돕는 일이라면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서는 성실한 학생회 임원이었다. 밝고 상냥하고 붙임성도 좋고, 돕겠다고 나서면 당연히 거절하는 사람도 없어서 늘 바빴다.
반면 소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도 돌보지 않고 방치된 화단과 사육장을 돌보는 쓸쓸한 아웃사이더로, 소년이 졸업하면 사라질 원예부 최후의 부장이라는 것 외엔 내세울 직함도 없었다.
이런 두 사람이 어쩌다 어울리게 된 것인지를 말하자면 소모할 단락이 기므로 접어두지만 어쨌든 여름이 되고부터 두 사람은 심심치 않게 모여 잡초가 무성한 화단 앞에서 열심히 풀을 뽑았다. 이번에도 소녀의 도움을 소년은 거절하지 못했고, 방과 후 남아서 함께 화단 정리를 하고 가기로 약속했다.
당연히 하려고 한 일이 기대되는 일로 바뀌는 순간이다. 화단으로 향하는 소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우와아. 시, 심각한데…….”
“이게 정말 2주만에 자랐다고요?”
부실에 가방을 두고 오니 그 며칠 사이 화단은 낡은 울타리가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밀림이 되어 있었다. 기말 시험을 앞두면서 잠깐이었는데 이렇게 자라버리다니. 경이로운 생명력이라고 해야 할까.
입으로는 심각하다고 말하면서 소년은 즐거워 보였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영 어렵고 또 서툴고, 어깨를 바싹 긴장시키지만 식물은 달랐다. 물론 동물도. 말이 통하지 않아도 교감할 수 있었고 애정을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결실이 기뻤다. 정말 농사꾼이나 할까. 아니면 브리더라든지.
“졸업하면 진짜 뭘 하지…….”
“졸업이요?”
“아, 그… 곧 1학기도 끝나니까요.”
“그렇구나…. 벌써 한 학기밖에 안 남은 거네요, 선배랑 이렇게 있는 것도.”
“그, 그것도 그렇네요. 앞으로 한 학기…구나. ……그치만 여름방학도 아직 시작도 안 했고, 그 때 잔뜩….”
거기까지 말하던 소년은 퍼뜩 무언가 떠올린 듯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아니, 여름방학에도 만날 수 있을 거라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저, 그러고 보니까… 에셸이 오면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보여주고 싶은 거요?”
“이쪽으로… 와볼래요?”
거기, 발 조심하고요. 앗, 자, 잡아줄게요. 여기, 손. 무의식이 용감했다. 내밀어진 것은 소년의 것보다 한참 작고 물렀다. 보드라운 손을 어설프게 쥐고 수풀을 헤치며 소년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때마다 소녀는 방긋 웃었고 맞잡은 손의 온도가 화악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풀잎 냄새가 코를 찌르고 끝이 뾰족뾰족한 잎사귀가 얇은 하복을 스쳤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샛길을 빠져나오자 나타난 건 학교 뒤편 분리수거장이었다. 소년이 보여주려던 것은 바로 거기 있었다.
거대하게 자란 식물의 줄기였다. 덤불 같기도 하고 덩쿨 같기도 하고, 나무는 아닌 것 같은데 곧게도 자라났다. 벌써 두 사람의 키를 훌쩍 넘게 커져서 몇 개나 되는 줄기가 서로 엮여 굵은 기둥을 자랑했다. 갈색 같기도 하고 녹색 같기도 한 표면에는 거칠거칠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래놓고 어느새 순식간에 펴지기도 했다. 꼭 호흡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뭔가요…?”
“우와, 너도 엄청 자랐구나. 아, 얼마 전에 분리수거를 하다가 발견한 녀석이에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식물이어서 신기해서 조금 돌봐주었는데…… 얼마나 쑥쑥 자라던지.”
신기하지 않아요? 어디까지 자랄지 모르겠어요. 들뜬 목소리가 식물에 관해 재잘거렸다. 햇빛을 받으며 잎이 넓게 편다든지 비눗방울 같은 것이 맺힐 때도 있다든지 꽃봉오리는 꼭대기에 딱 하나만 달려 있는데 사실은 꽃이 핀 뒤에 보여주려 했다든지.
그러나 한점 의심 없이 무구한 소년과 달리 이상하게도 소녀는 눈앞의 정체불명의 식물이 불안하기만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공포스러웠다. 왜일까, 그저 식물일 뿐인데.
“저어, 주노 선배…….”
이렇게 커다란 걸 키워도 괜찮은 건가요? 조심스럽게 운을 떼려는 순간, 투둑, 툭.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돌발성 호우다.
“이런, 아직 울타리 정비를 다 못했는데……. 아,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비부터 피해요.”
쏴아아─ 하고 쏟아지기 시작한 빗소리는 세상 모든 소리를 덮을 듯 우렁찼다. 상대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빗줄기가 세상과 나를 가르는 경계만 같았다. 어찌나 거센지 이대로 잡은 손을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에 되레 세게 잡았다.
급한 대로 학교 건물로 피한 두 사람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돌발성 호우는 빗줄기가 강하지만 그래봐야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조금 기다리면 그치겠지.
조금만 기다리면 그치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상식이라고 할 만한 게 파괴된 기점이라면 이 때가 아니었을까. 이 때의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비가 그치질 않았다. 폭우 속에 전파도 잘 터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하였다. 해본 적 없는 경험이라고 퍽 설레는 표정을 한 건 그 날 밤까지였다.
다음날엔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02
철학에서는 시간을 통해 ‘나’를 정의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이어지는 연속성이야말로 나라는 존재가 그곳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정의내리는 건 그 사람이 쌓아올린 시간의 축적, 때문에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만약 하루아침에 사람이 달라질 만한 경험을 겪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어제의 나와 다른 사람이다.
예를 들면 어제까지의 에셸은 비가 많이 내리고 전파가 터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선배와 학교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을 때 그저 수줍고 설레는 기분뿐이었다.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는 절박한 마음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오늘의 에셸이라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절대 전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돌아가고야 말겠다고 필사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토록 어제와 오늘이 달라진다. 더는 같지 않다.
더는 어제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게 된 소년소녀는 멍하니 물과 나무에 먹힌 세계를 보았다.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여전한 빗소리만이 사납게 귀를 때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아, 아침… 인 걸까요?”
비가 그치지 않은 탓에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좋아하는 선배와 한 공간에 누웠다는 사실에 설레 한참 잠을 설친 게 원인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까마득한 시간을 보내다가 그럼에도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마지못해 일어나자 그곳은 낯선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겨울 정도로 내리는 빗줄기 틈으로 기다란 줄기와 잎사귀, 이어서 축축하게 젖은 나무의 냄새, 나무들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두껍고 굵게 자란 그것들이 창틀을 꽃병 삼아 몸을 비집고 침범해 왔다. 깨진 유리창 틈으로 미지근한 빗물이 들이치면서 뿌연 안개가 서려 어느 것 하나 학교에서 느낄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상식을 지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무자비하게 깨트리는 역할이다.
학교를 휘감아 침투해온 나무줄기가 마치 호흡하듯 그 길이를 계속 늘려나가고 있었다. 벽을 타고 바닥을 기며 실시간으로 줄기가 자랐다. 잎이 돋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들린다고? 식물의 성장을 소리로 들을 수 있다니.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던 것이다.
콘크리트와 유리, 죽은 나무로 이루어졌던 공간에 산 나무가 꿈틀거리고 영역을 넓혔다. 바로 옆을 지나가는 줄기에 비명을 지르다가도 현실감 없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꿈이라도 꾸는 게 아닐까. 꿈 너머에는 조금 이른 장마가 기다리고 이것은 그저 악몽이 아닐까.
소년소녀가 망연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완벽히 고립된 채 두 사람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이 학교를 벗어나게 된 건 그로부터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꼬박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침이 찾아옴과 함께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시꺼먼 구름 틈새로 빛이 났다.
유리 조각의 파편처럼 드문드문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응시하며 에셸은 멍하니 성경 구절을 떠올렸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사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아니, 이쪽이 아닌가. 물로써 세상을 다스리시다. 우리는 방주를 놓쳤는가?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지만 희망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소녀의 희망은 바로 옆이다.
“선배, 보세요. 비가 그쳤어요. 선배…, 주노 선배….”
울적하게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소년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이 두 사람만의 작은 세계에는 절망이 곰팡이처럼 피어올라 있던 탓이다. 그를 흔드는 손목에 묶인 붕대는 그 증거의 일부였다. 덕지덕지 진흙이 굳은 머리카락, 먼지와 부스러기로 긁히고 때가 탄 얼굴, 구겨진 체육복,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소방도끼 같은 것이 쥐어 있다.
비일상에 매몰된 채 등 돌린 소년을 보며 소녀 또한 고개가 침울하게 꺾였다.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가 없어서야 맑아오는 하늘도 의미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비가 그치지 않는 다음날을 맞이했을 때 당황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든 환경에 적응해보려고 했다. 시간을 잠시 앞으로 되돌리자. 막 비가 그치지 않던 다음날의 이야기다.
하늘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를 쏟아내고 창밖은 호흡할 때마다 자라는 식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공포스러운 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도 없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소녀였다.
“이, 일단 뭐라도 움직여 볼까요? 조난당했다고 생각하고요.”
“그, 그치만 조난이라니. 이런 상황, 말도 안 되잖아요…… 뭘 어떻게… 해야…….”
“뭐라도요! 학교가 캠핑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으응, 저희는 5월에 캠핑을 다녀왔는데 무척 즐거웠거든요. 다 같이 텐트를 치고 카레를 만들고. 선배도 작년에 갔었죠? 그 때 이야기라도 들려주세요.”
“작년에… 다녀온, 캠프는…….”
나쁘지 않았어요. 요트를 탄 것도, 야영장의 돌을 골라낸 것도, 모닥불을 피운 것도, 밤새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와 눅눅한 흙바닥 위의 침낭도 싫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소녀의 노력을 따라서 의기소침하던 소년도 더듬더듬, 즐거웠던 추억을 꺼냈다. 소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소녀가 웃음소리를 내자 소년 쪽에서도 따라 희미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암담했지만 일단 억지로라도 웃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세찬 빗소리에 자잘한 소음들은 모두 묻히는 가운데 나무가 자라는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학교를 걸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줄기가 천장을 타고 벽을 타고 바닥을 타고 학교 전체를 자신의 터전 삼아 자라고 있었지만, 다행히 두 사람과 부딪치지는 않았다.
인터넷과 전파는 무용지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을까. 시계와 손전등 기능만 남아버린 휴대폰을 챙겨 넣고 두 사람은 일단 위로 향했다. 교실 창밖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바깥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첫 번째 사실은 완전히 침수된 1층이었다. 비를 감수하고서라도 나가 보려고 한 두 사람을 가장 먼저 좌절시킨 사실이기도 했다. 문짝을 떼어다 뗏목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하지만 당장은 어느 것도 무리다.
두 번째로 이 상황에서도 수도가 끊기진 않았다는 안도를 얻었다. 전기는 무서워서 건드리지도 않았지만 물이 나온다는 건 다행이었다. 비록 발 아래가 다 물 천지여도 깨끗한 물은 별개다.
마지막으로 옥상 문이 픽션에서처럼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꽉 잠긴 문을 열기 위해 이런저런 수를 써보았지만 결국엔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부수거나 열쇠를 찾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라 일시적으로 포기했다. 어차피 비가 그치지 않는 채다. 문 밖의 상황도 모르며 함부로 부수기에는 불안했다.
두 사람은 대신 학교 곳곳을 뒤져 생존 키트를 꾸렸다. 보건실을 거점 삼아 교실을 뒤져 담요나 생수, 과자 외에도 여러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모으고 선생님의 책상 위에서 오래된 라디오를 들고 왔다. 주파수를 맞추는 법도 몰라 서툴게 아무거나 돌리다 보면 간혹 어딘가의 전파를 잡은 라디오가 지직거리는 짧은 방송을 들려주었다. “…여전히 비가 그치지 않아…” 대개는 이런 식이었다.
반마다 걸린 시계를 모아 하나만 남겨놓고 건전지는 뽑고 휴대폰은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하루 한 번만 켜보기로 약속했다. 식량은 어떻게 나눌지 계획표를 세우고 화이트보드에 매일매일의 할일을 기록했다. 사실은 그렇게 바쁘지 않으면서도 바쁜 척을 했던 것 같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래도 함께여서 좋았다. 아침에는 변함없는 세상에 비관하다가도 밤에는 손전등을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앉아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속닥여 낙관했다. 그러다 보면 내일은 더 나아질 것만 같았다. 더 나아지리라 믿었다.
어느 날은 비상벨을 깨트리고 소방 도끼를 꺼냈고 어느 날은 물에 잠긴 계단 아래로 내려가 매점을 털기도 했다. 완전히 침수된 매점 안이 과연 괜찮을지 걱정했지만 도착해본 결과 질소 포장이라든지 통조림이라든지 그야말로 문명의 승리였다. 빗물에 잠긴 채로도 매점 안의 물건들은 대체로 무사했다.
냉장고가 멈춘 탓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봉지나 냉동만두 따위를 헤치고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물속을 잠수해 건질 수 있는 것들을 건졌다. 잠수가 쉽지는 않았다. 빗물에선 퀴퀴한 냄새가 흘렀다. 아주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못한 눅눅하고 미적지근한 물은 이유 모를 불쾌감을 유발했다.
언제였더라. 커피 아이스크림을 반으로 쪼개 친구와 나눠 먹으려다 선생님이 부르는 바람에 한 입 베어 먹은 그것을 그대로 두고 간 적이 있었다. 돌아왔을 때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 책상 아래로 뚝뚝 흘렀고 갈색의 끈적거리는 우물에 개미떼가 잔뜩 빠져 있었다. 물티슈를 꺼내 그것들을 닦아내는데 햇빛에 데워진 액체에 닿는 순간 손으로 단맛이 느껴졌다.
그 때의 불쾌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차갑거나 뜨거웠다면 가려졌을 몰라도 될 많은 것들이 닮은 온도를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그 날은 왠지 기분이 울적해 세면대에서 남 몰래 울다 왔다. 어쩌면 그도 소녀가 없는 곳에서 많이 울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아질 내일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버티던 어느 날, 그래. 바로 어제 사건이 벌어졌다.
:03
비가 그치지 않는 탓에 하루하루 수위가 오르고 있었다. 온갖 쓰레기가 같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매장해두었던 오물과 폐기물, 많은 역겨운 것이 시시각각 덮쳐왔다.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오는 오염된 물이 마치 그들의 죄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인류 모두의 죄다.
하는 수 없이 2층을 포기하고 더 위로 오르기로 했다. 한 층을 더 올라간다는 건 단순히 계단을 오르는 일이 아니었다. 고작해 며칠 사이에 한 층, 앞으로 며칠이나 더 이 사태가 지속될지 모르는데 이대로 계속 물이 차오르면 어쩌지?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지? 불안이 물과 함께 수위를 올렸다.
“차라리 아예 꼭대기 층으로 가버릴까요? 매번 짐을 옮기기도 힘들 수 있고요.”
“어, 어떨까요…. 하하….”
“옥상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실은 거기도 물이 차 있어서 문을 열자마자 물이 쏟아져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역시 옥상에 SOS 신호라도 둘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불안이 목 끝까지 차오를수록 소년의 말수는 줄어들었다. 혼자 무슨 고민을 떠안고 있는 건지 때때로 가슴에 못이 박힌 듯 힘겨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소녀는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그의 부담이 될까 말을 아꼈다.
“……역시 내일 일은 내일 또 고민하기로 하고, 오늘은 도서관으로 가요. 비가 와도 낮에는 조금 환하고 마음껏 책이라도 보는 거예요.”
“에셸은… 대단하네요. 저는 글자가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올 것 같은데…….”
“그럼 같이 읽어요. 둘이서 읽는 것도 즐거운걸요.”
그럴까요? 둘이 같이…. 꾸준히 말을 거는 목소리에 이끌려 소년의 고개가 조금 위를 향했다. 겨우 시선이 닿자 기다렸다는 듯 소녀가 웃었다. 말간 낯이었다. 도서관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있어요. 그곳은 비에 젖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보드라운 손이 문고리를 돌렸다. 어디서 올라온 건지 모를 흙과 습기로 그새 녹이 슬어가던 문이 기이익, 거북한 소리를 냈다.
꼭 이곳만 수십 년의 세월을 맞아버린 것만 같다고, 생각하던 순간 안쪽에서 뾰족뾰족한 줄기가 튀어나왔다.
“꺄악?!”
“에셸!!?!”
아래서 밀려드는 눅눅하고 역겨운 물비린내를 잊어버릴 정도로 짙은 향이 문틈으로부터 퍼졌다. 취해버릴 것만 같이 독하면서 지독하게 향기로웠다. 풍겨오는 근원지는 도서관 안쪽. 아, 주노가 키우던 식물의 줄기와 어딘지 닮아 있다.
도서관 안쪽은 그 정체불명의 식물이 꾸역꾸역 뿌리를 내리고 있던 모양이다. 호흡하듯 쪼그라들었다 펼쳐지는 갈색의 줄기에서 불길한 수액이 흘렀고 가시가 돋아난 덩굴이 소녀의 팔을 휘감아 들어 올렸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껏 어느 순간에도 공포에 먹히지 않으려던 소녀의 마음의 댐이 기어코 무너지는 소리였다. 무서워,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아파요. 가시가 파고들고 선혈이 수액과 뒤섞여 끈적하게 흘렀다. 그때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들을 내던지고 소년이 소방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저, 저리 꺼져! 놓아줘!”
도끼를 쥔 두 손에 구깃구깃하게 힘이 들어갔다. 이런 걸 휘두른다는 두려움도 잊은 채 쿵, 쿵, 도끼 소리가 요란했다. 문짝이 쪼개질 듯 죽은 나무에 깊은 홈이 파였다. 산 나무 줄기는 이미 잘려나간지 오래였다. 단면에서 흘러내리는 수액이 피처럼 보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줄기가 소녀를 내던지자 소년도 도끼를 던지고 달려갔다.
“에셸! 괘, 괜찮아요??”
“무, 문…. 문, 닫아야….”
“아! 자, 잠깐만요.”
허겁지겁 복도를 박차고 달려가 문틈을 비집고 나오려는 줄기를 발로 밀어 넣었다. 문고리를 잡고, 실내화의 밑창이 가시에 숭숭 뚫리도록 힘껏 짓눌러 억센 나무줄기와 힘겨루기였다.
나무줄기는 이제껏 도서관에 잘 있던 주제에 나오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나무를 발로 차거나 도끼로 찍거나, 상상도 해본 적 없던 일을 하며 주노의 얼굴에 비지땀이 맺혔다. 그 때, 엉금엉금 기어온 에셸이 주노의 발 아래서 알코올램프를 켰다. 불에 닿는 순간 나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서관 안으로 숨었다.
순식간이었다.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문을 닫는 걸로는 불안해 도서관 문 앞에 책걸상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나서야 주노는 주저 앉아 호흡을 골랐다. 그 동안에도 에셸은 긁히고 찔린 팔을 부여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복도는 변함없이 습하고 더웠다. 비가 그치지 않게 된 날로부터 김이 서린 거울을 보듯 선명한 날이 없었다. 그런데 에셸은 꼭 한겨울에 떨어진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를 악 문 채 주노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소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 에셸,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지금 당장… 치료해줄 테니까.”
전에 없이 빠르게 말을 쏟아내며 복도에 구급상자를 펼쳤다. 솜을 꺼내 피를 닦고 상처부위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 뒤에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붕대를 감았다. 그 동안 에셸은 입을 열지 못했다.
학교에 갇히고부터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소녀였다. 이 상황이 무섭고 두렵지 않을 리 없는데도 억지로라도 웃던 소녀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잘 웃는 편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고집스럽게 웃던 건 아니었는데.
그 가면이 드디어 깨진 것이다. 매끄러운 얼굴에 균열이 일면서 사정없이 찡그리고 일그러졌다. 무서워요. 무서워. 집에 가고 싶어…. 엄마…. 습한 공기 사이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난생 처음 겪은 이상한 일, 풀과 나무가 공포스러워지고 그치지 않는 비에 마음까지 침몰해갔다.
학교 밖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은, 친구는,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지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내일도 변함없을 거라고, 어쩌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고 하는 비관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던 마음이 끝내 부러지고 말았다.
흐느끼는 소리에 소년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깨물고, 마지막으로 붕대의 매듭을 감아준 뒤에는 도리어 힘을 잃고 물러났다. 멀어지는 온기에 ‘이럴 때는 오히려 꽉 안아줘 위로해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부정적인 감정에 서운함이 한 방울 더 섞이려던 차다. 소년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 나 때문에… 전부, 이런 일이.”
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못한 소년의 얼굴 위로 자기혐오가 짙게 깔렸다. 한쪽의 댐이 무너지자 균형을 잃고 반대쪽의 둑마저 터지고 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지도 몰랐다. 희미하게 떨리던 입술 틈으로 억눌러왔던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처음부터 내가, 그런 식물 키우지 않았더라면. 에, 에셸이 도와준다고 했을 때…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했었으면. 사, 실은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혼자 하는 건 익숙하고, 오히려… 혼자 하는 편이 가끔은 편하기도 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에셸까지 이렇게 되어버려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전부 미안해요. 다 제 탓이에요.
“왜, 그렇게 말해요? 저, 필요 없었어요? 사실은 없는 편이 더 좋았어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열아홉, 열여덟이란 나이가 참 보잘 것 없었다. 고작해 반 년 있다가 성인이라니. 대체 어른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반 년 사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봇물터지듯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복도에 주저앉은 채 엉엉 울었다. 그게 아니라고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 하염없이 울었다.
안팎으로 쏟아지는 비에 몸도 마음도 축축한 기분이 되어, 겨우 눈물을 그칠 즈음에는 두 사람 다 퉁퉁 분 붕어만 같았다. 에셸은 손 다쳤으니까, 당분간 무거운 건 제가 들게요. 더듬더듬 잠긴 목소리로 소년이 말하면 네…. 시무룩하게 소녀가 끄덕이고 도서관에서 쫓겨나 다른 교실을 찾았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적어도 목이 메는 감정만은 다 털어낸 것 같았다. 그날은 다른 무엇인가를 할 여유도 없어 책상을 밀어낸 바닥 한가운데 담요들을 모아놓고 나란히 곯아떨어졌다.
:04
그렇게 밝아온 아침이다. 빛이 드는 하늘을 믿지 못하고 에셸이 창가로 몸을 내밀었다.
“에셸, 위, 험해요.”
“보세요, 선배. 하늘이 맑아요!”
“그러니까…, ……정말, 맑네요.”
덕분에 울적하게 무릎을 모으고 있던 주노도 일어날 수 있었다. 주춤주춤, 곁으로 오는 그를 당기며 소녀가 맑게 웃었다. 두 사람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맴- 맴- 맴- 매애앰….
자연은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한가. 비가 그친지 고작 몇 시간만에 어디선지 알 수 없게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데 인간이 남긴 문명 위에 매미와 개구리, 줄기를 뻗어나가는 나무, 학교 안까지 헤엄쳐 들어오는 물고기들을 보았다.
반쯤 물에 잠긴 건물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나무줄기에 휘감겨 있었다. 높다란 빌딩을 화분삼아 나무들이 뻗어 올랐다. 개 중 어느 것들은 해가 들자마자 빠르게 꽃을 피웠다. 건물의 창만한 크기의 꽃들이 하나, 둘 개화해나가는 광경은 아찔할 정도로 무섭고 아름다웠다.
어쩌면 이 비가 쓸어내리고 싶었던 건, 지구의 오물은 바로 인간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는 이토록 생명력 넘치지 않은가. 그러나 끈질긴 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먹통이 된 인터넷과 전화를 뚫고 재난문자가 연이어 도착했다. 구조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부풀었다.
역시 옥상으로 올라가 봐요. 거기서 SOS 신호를 보내요. 같이 돌아가기로 해요, 선배. 소녀의 손이 다시금 소년을 당겼다.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에, 셸은 가요. 저는, ……저는, 가도 될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봤잖아요…. 제가 키우던 나무. ……어쩌면 정말 제 잘못일지도 몰라요. 저, 저는… 구조될 자격이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소녀가 믿을 수 없단 듯 눈을 크게 떠도 소년은 시선 끝을 바닥에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저, 정말로. 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 탓이에요.
언제부터 쭉 그런 생각을 안고 있던 걸까. 비가 내리기 시작한 다음날? 계속해 팽창해나가는 나무줄기를 보면서? 매일매일 학교를 잠식해가는 식물을 그는 매번 어떤 마음으로 지나쳤을까.
“저 때문에 에셸이 다쳤잖아요….”
어제 일이 그의 죄책감에 쐐기를 박았다. 단단히 박힌 그것이 그를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맸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떨어졌다.
켜둔 줄도 몰랐던 라디오에서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잠시 후 11시부터 하계방학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신 학생 여러분은 부디 방학식에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방학식을 하는구나. 날짜 감각이 사라져 오늘이 방학식 날인 줄도 몰랐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평화롭고 지루할 줄 알았던 일주일이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기로에 놓일 줄은. 방송을 들은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었다. 그렇게 방학식이 시작되었다.
간간이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맑은 날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 남은 교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기묘할 정도로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날만 같았다. 익숙한 책상, 익숙한 칠판, 익숙한 방송……. 그래놓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온통 푸르기만 해서, 숨 막히게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수면 위로 건물들이 반사되어 꼭 물 아래로도 세상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하늘도 땅도 파랗기만 해서─이 경우 ‘땅’이라는 표현이 맞을까?─실수로 페인트통을 엎어버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계가 위태롭도록 아름답고 기이했다. 그 세계 속을 단 둘이 살아 있었다. 흘러나오는 방송을 들으며 에셸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움찔했지만 주노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막상 입을 열려고 하자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곧 있으면 방학식도 끝이 날 텐데. 그러고 나면 또 적막이 찾아올 텐데. 그 전에 말해야만 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신기하다. 일주일 전의 소녀와 지금의 소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에셸은 더는 일주일 전의 자신을 보아도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변하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있죠, 주노 선배. 잠시만. 잠깐만, …제가 이제 괜찮다고 할 때까지 눈을 감아주실 수 있을까요?”
“네, 넷? 눈이요? ……이, 렇게요?”
“네. ……그 상태로 들어주세요.”
사흘 째였던가, 나흘 째였던가. 집에서처럼 거울을 보고 머리를 묶으며 단장할 여유가 없어지면서 트레이드마크 같은 머리 모양을 포기했다. 교복은 구깃구깃했고 흙먼지와 빗물과 피로 더러운 채였다. 아침에 간신히 세수만 한 얼굴은 며칠째 로션 하나 바르지 못해 푸석푸석했고, 정말이지 이런 모습 누구에게도, 하물며 그에게는 더더욱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꼭 그래서 눈을 감아달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깨닫고 나자 더 부끄러워졌다. 그가 지금의 에셸을 보지 못해 다행이다.
“……저도 선배에게 고백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고, 고백이요!?”
“네. ──사실은요. 쭉,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바라온 게 있어서요.”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요란하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움에 소년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 눈 뜨면 안 되는 거겠지? 대체 무슨 말이 이어지려는 걸까. 맞잡은 손에서부터 고동이 점점 거세졌다.
“이대로 선배가 졸업해버리는 건 싫다고. 졸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에? 네?”
“그래서요. 지난번 밤에 소원을 빌었어요. 그 날은 유성우가 떨어진다고 하는 날이었거든요.”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어리벙벙하게 눈을 감은 소년 앞에서 소녀는 조곤조곤 침착하게 고해성사를 이어나갔다.
“정말 하늘에서 별이 예쁘게 떨어졌어요. 쏟아지는 별들에 대고 소원을 빌었어요. ‘선배가 졸업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꼭 별들이 답을 해준 것처럼 반짝였어요. 비가 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다음날이에요.”
“그런, 그…….”
단순히 우연 아닌가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낯이었다. 감은 눈 너머로 키득키득,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배 본인도 그렇게 생각 못했으면서. 맞잡은 손에 슬그머니 깍지를 낀다. 다시 한 번 소년의 어깨가 긴장으로 바싹 솟았다. 그 상태로 한 걸음 더 다가가자 곧 서로 닿을 듯 몹시 가까워졌다. 저, 저기. 에셸. 저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으면……. 우물우물거리는 목소리의 뒤로 바람이 크게 불었다. 마치 등을 떠밀어주듯.
소녀의 입이 조그맣게 열렸다.
“좋아해요, 선배. ……저, 주노 선배가 좋아요.”
펄럭, 커튼이 나부낀다. 두 사람의 실루엣이 커튼 사이로 완전히 감추어졌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당사자조차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소녀가 콧잔등을 부딪쳐왔다.
쵹, 하고 닿아오는 보드라운 온기가 있었다. 이런 순간까지도 우직하고 바보 같은 소년은 혹시라도 실수로 눈을 뜰까봐 도리어 필사적으로 눈썹에 힘을 주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입술을 맞댄 채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도둑키스인데, 빼앗기는 쪽에서 이토록 무방비하게 내준다.
소녀의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바깥은 여름, 계절을 타듯 뜨겁다.
“제 탓으로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어요. 제가 빈 소원이 온 세상이 선배의 졸업을 방해하도록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무서웠어요. 어디에 말할 수도 없었어요.”
네 탓이 아니라고, 간신히 소년이 답했다. 그게 기뻐 소녀가 눈을 접었다. 내내 억지로 웃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자기 탓이면 어쩌지, 내심으론 벌벌 떨면서 겉으론 하다못해 웃으려고.
“그런데 오늘, 방학식을 해버린 거예요. 이상하죠. 저희의 시간은 여기 멈춰 있는 것만 같은데 그럼에도 지금은 여름의 한복판이고…… 오늘부터 여름방학이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아요. 한 달은 너무 금방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저 차오른 물도 빠질까. 세상의 90%가 잠겼다가 빠지고 난 다음에는 어떤 숨길 수 없이 추악한 찌꺼기들이 땅 위에 남을까. 그러기 전에, 이 마음도 그런 식으로 들통나기 전에 전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전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선배 탓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선배도 제 탓이 아니라고 해주니까. ……같이, 나가요. 선배. 같이 돌아가요.”
조금 더, 같이 있어주세요.
비가 그치고, 태양이 젖은 세상을 말려가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뜨거운 여름, 필사적인 소녀의 목소리에 소년은──
:epilogue
또 다시 나흘 밤낮을 꼬박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날씨가 맑았다. 해가 나오자마자 아침부터 사람들은 바쁘게 빨랫줄을 당겼다. 세탁을 마친 빨래들이 줄지어 걸리고 섬유유연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퍼진다. 오늘은 언제까지 맑을까. 빨래가 마를 때까지는 버텨주면 좋겠는데.
오랜만에 난 볕에 세탁물 옆으로 사람들도 몸을 말리러 나왔다. 어느새 흔히 보이는 풍경이었다. 방수칠을 한 녹색의 옥상 바닥에 돗자리라도 하나 있으면 좋고 없으면 대충 겉옷이라도 깐다. 그대로 길쭉하게 누워서 광합성. 오래 가진 못했다. 선크림을 아무리 발랐다 한들 태양빛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자칫하면 까맣게 타거나 화상을 입기가 부기지수인 탓이다.
그래도 잠깐이 소중했다. 소년소녀도 어깨를 맞댄 채 볕을 쬐러 나온 참이다. 한편에는 양산을 펼쳐두고 차가운 이온음료도 그 옆에, 해가 따가워지기 전까지 이른 여유를 부렸다.
“내일이면 여름방학도 끝이네요.”
“벌써 그렇게. 시간은, 정말… 마음대로 흘러가버리네요.”
절대 멈추지 않고,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하지만 그래서 우리도 주저앉아 비관할 시간이 없어 바쁘게 시간을 쫓아가버리고 마는 걸까.
이 더운 날씨에도 둘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깍지 낀 손 안으로 땀이 차도록 힘껏 맞잡고 있었다. 소년의 말에 소녀가 키득거리고 웃는다. 왜 웃는지 짐작한 얼굴이 날씨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 테지. 세상이 물에 잠기고 겨우 첫 해가 뜬 날. 두 사람의 시간에 새로운 달력이 하나 추가된 날.
커튼이 나부끼고 입술은 닿았다 떨어지고, 등 뒤로 펼쳐지는 풍경이 어디까지 암울하고 절망적이든 하등 상관없는 것처럼 오로지 서로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아서, 좋아한다고 고백한 소녀와 고백을 듣고 울기 시작하던 소년의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그 뒤로는 서로 말 없이 걸었던가. 어렵사리 옥상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기다리던 것은 청명한 여름, 거짓말 같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딱 한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바깥이 기다린다. 어쩌면 학교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때에 붕대 감긴 손을 소중한 것마냥 쥐고 소년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시간이, 멈춰 있는 게 아니었어요. 제가 어떤 짓을 저질렀든 비는 내리고 식물은 자라고, 어려운 일들은 번지기만 하고……. 에셸까지 다치게 하고. 그냥 에셸에게, 꼭대기에 핀 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꽃이 예쁘다고 네가 웃어주길 바란 것뿐이었는데. 고작해 그것이 지금에 달했다. 아마 앞으로도 제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쉬이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마땅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탓할 테지. 그런 성격이었다.
“그런데도 에셸은, 같이… 있어달라고, 해 줘서…….”
목이 맨 듯 더듬거리던 목소리의 끝에는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방울방울 흘렀다. 소녀가 얼른 손등을 갖다 대자 손등이 그의 짠맛을 기억했다. 울지 말아요. 속삭이는 입술에도 짠맛이 닿았다. 눈이 커진다. 어설프게 눌러오는 입맞춤의 뒤에는 늦은 고백의 답이 있었다.
“저도, ……저도, 좋아해요. 에셸을. 정말 좋아해요. 에셸이 없었으면 제 탓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있어줘서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계속── 같이 있어주세요.
멀리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 로맨틱한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허둥지둥 문턱을 넘었다. 안과 밖, 그늘과 볕,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그렇게 넘어갔다.
그 날은 상상했던 것보다 일찍 구조되었다. 일주일간의 비일상을 마치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꼭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물론 하나도 꿈이 아니었지만. 걱정하던 가족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내고, 자신의 방 침대에서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내고 깨어났을 때는 일주일 하고도 하루 전과는 다른 자신이 거기 있었다. 그럼에도 틀림없이 내가 있었다.
곧 방학이 끝난다. 지독한 여름도 끝이었다. 이 뒤에 우리가 알던 가을이 올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다. TV에서는 연일 수많은 추측이 떠돌았다. 내로라하는 저명한 과학자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이 현상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것 하나 맞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세계는 이제껏 우리가 알던 그 어떤 상식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가혹하게도, 세계는 우리에게 적응할 시간 같은 것을 주지 않았다. 다만 마음대로 앞서 갈 테니 힘껏 쫓아오라고 했다.
냉정하고 잔인한 세계에 내동댕이였다. 혼자였으면 뒤쳐지고 남겨져 무력하게 휩쓸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서로를 당길 손이 있다. 이온음료의 뚜껑을 여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가 툭 입을 열었다.
“……흉터, 남아버렸네요.”
“그렇네요. 티, 많이 나나요?”
유독 깊이 찌르고 들었던 가시가 하얀 자국을 남겼다. 깨끗하던 손목의 안쪽에 남은 베이고 찔린 흔적들을 엄지로 문지르며 소년은 못내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또 그런 표정이죠. 괜찮다며 소녀가 웃는다. 그렇게 미안하면, 선배가 책임져주면 되죠. 가볍게 흘러나온 농담에 그, 그럴게요! 제가 책임을…… …에? 기합이 바싹 들어갔던 대답에 점점 맥이 풀리고 간지러운 적막이 사이를 채웠다. 이 다음엔 누가 입을 막았지?
바람이 불었다. 포근하게 감싸오는 섬유유연제 냄새, 비눗방울이 만드는 무지갯빛 그림자, 낯선 꽃향기, 새의 날갯짓 소리.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뒤섞인 엉망진창의 세계다.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갈 곳을 잃고 표류하던 마음에 이정표가 생겼다. 어디로 향하는 게 옳을지 여전히 알지 못했지만 가야만 한다면, 내일을 향하고 싶었다. 네가 있어서 나아가고 싶은 소년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풋된 청춘이었다. 무르익은 청하이기도 했다. 지독한 여름의 끝에서 우리는 서로를 찾았다. 서로의 손을 잡았다.
──소년소녀표류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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