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이 예쁜 잔이었다. 흠 잡을 곳 없는 하얀 커피잔. 받침과 스푼을 세트로 넣었다. 쇼핑 카트에 들어간 상자를 보며 아인델은 조금 들뜬 자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제까지 무언가를 욕심내거나 원해본 기억이 아인델에겐 극히 드물었다. 무욕無慾이란 뜻이 아니다. 특별히 간절히 원하거나 욕심내지 않아도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게 없었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원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늘 모든 것이 손닿는 곳에 있었다. 아인델 에스테반의 삶은 이제껏 그러했다. 그녀가 보다 숭고한 가치에 눈을 돌리고 무형의 것을 욕심내게 된 것에는 이런 성장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모든 것이 시작하는 계절, 텅 빈 방에서부터 새 출발이었다. 제 손으로 채워 넣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작년 겨울, 발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서 에인헤리의 페어가 발표되었다. 그녀의 이름 옆에 나란한 이름은 「율릭 함메르쇼이」, 10년하고도 약 2년을 더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다.
그 이름을 앞에 두고 아인델은 놀라지 않았다. 에인헤리의 페어는 전부 위에서 정해주는 것이지만 어쩌면 예감한 바였다. 그녀와 그의 상성은 누구보다 좋았으며 두 사람의 모범적인 아카데미 생활은 바깥 사회에서도 회자가 되곤 하였으니.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어쩌면 평생을 함께할 상대, 단 한 명의 파트너. 그렇다면 역시 너여야지.
내 가장 좋은 선택, 율.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율릭은 그곳을 ‘우리집’이라 칭했다. 낯선 단어였다.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거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 그러할 것이 당연해지도록.
우리 집이니 우리 손으로 꾸미고 단장하자고. 그 제안을 따라 함께 쇼핑을 나온 참이었다. 아인델은 제 옆으로 나란히 카트를 밀며 걷는 소년을 응시했다. 지난 2년 사이 조금 더 자란 소년과 벌어진 눈높이를 가늠하며 이러다 정말 손이 안 닿게 되겠어. 홀로 생각에 잠기자 소년은 오묘하게 섞인 두 색의 눈동자로 응? 하고 되물어왔다.
“이렇게 하나하나 직접 보고 고를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쓸 거니까 직접 고르는 게 당연하지.”
“아마추어보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시시콜콜한 의견을 나누며 미리 메모해둔 물품들에 하나씩 선을 그었다. 텅 빈 방에 채워야 할 물건들은 정말 많았다. 이제까지 당연하게 존재했던 것들을 스스로 고르고 사야 한다는 것이 아인델에겐 굉장히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알고 있어, 이델? 앞으로는 요리도 청소도 빨래도 전부 우리 손으로 직접 해야 하는 거야.”
“알고 있단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잖니.”
“별로 알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샐쭉 그를 흘겨보자 장난스런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요리는 나도 서투니까 차근차근 같이 배워나가자. ‘같이’, 그 단어에 아인델은 한 번 더 묘함을 느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서 새삼 그 수식어가 붙는 게 낯설었던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여러 가게를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하루 만에 전부를 채우기란 무리였다.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집을 꾸몄다. 가구를 채워 넣고 커튼과 카펫을 고르고 테이블에 올릴 꽃병과 꽃을 샀다. 겨우 그럴듯하게 집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아인델도 집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손수 꾸민 우리집.
방 정리는 다 끝났어? 겨우 한숨 돌리며 소파에 앉아 커피잔을 나란히 들었다. 요리는 전혀 못하는 아인델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커피를 내리는 일이다. 그와는 원두 취향이 달라 이번엔 특별히 그에게 맞춰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아인델은 대답을 피했다. 그가 레이디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않는 신사인 게 다행이었다.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불어드는 봄바람이 따스했다.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적어도 소파는 직접 앉아보고 사야 한다던 그의 말에 아인델은 겨우 동의할 수 있었다. 평화로웠다. 두 사람이 비록 훈련병 신분이지만 군인이 되었고, 곧 제대조차 자유롭지 않은 상명하복의 군 생활이 시작된다는 게 전부 먼 미래의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현실이지. 주어진 현실을 불운하다 투덜댈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아인델에겐 지금 작은 고민이 있었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올려둔 채 그녀의 손은 무언가를 움켜쥔 채 작게 꼼지락댄다. 실은 이삿짐을 푸는 중에야 간신히 떠올린 것이었다. 용케 잃어버리지 않았지. 잘그락, 체인 소리를 내는 그것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아인델이 느릿하게 그녀의 파트너를 불렀다.
“율.”
테이블 위로 은색의 물건이 올라왔다. 목걸이였다. 매끄러운 표면의 원통이 세로로 갈라져 쪼개지면 2개로 나뉘어지는. 갈라지는 단면의 한쪽엔 그녀의 이름이, 한쪽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어머니가 주신 거란다. 센티넬에게 가이드가 어떤 의미인지 아니까, 네가 믿고 의지할 단 한 명의 상대가 나타나거든 나눠가지라고.”
받으면서도 회의감뿐이었다.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나누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흠 하나 없는 원통의 표면을 매만지며 이 결점 없는 형태를 온전히 내 것으로 취하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다시 떠올랐다. 나눌 상대가 있다면 그 또한 너겠지. 이름은 직접 새겼다. 제 능력의 실 끝이 이런 용도로도 쓰일 수 있다는 걸 새롭게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