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삭,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던, 그러나 존재감만은 무엇과도 빗댈 수 없이 강하던 그것이 부서졌다. 부서져 산산이 흩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이번에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우습게도 한껏 당겨진 현이 끊어지던 제 소리보다도 머리 위의 소리에 귀를 집중하고 말았다.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대꾸하지 못한 채 아인델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온몸의 힘줄이 모두 끊어진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옆구리가 화끈거리고 뜨거웠다. 누군가 제 옆구리에 불을 놓은 것만 같았다. 아주 뜨겁고 또 무척이나 뜨거워서 그대로 옆구리부터 불에 타 재가 될 것 같았다. 동시에 몹시 추웠다. 제 안의 모든 뜨거운 것들이 옆구리에 난 구멍을 통해 울컥울컥 흘러나가고 있었다. 생명이 흘러나가는 또렷한 감각이었다. 쇼크가 왔는지 제 의지와 무관하게 손이, 발이, 몸이 떨렸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그 몸이 겨우 진정한 건 뼈가 드러날 만큼 심각했던 상처 위로 투명한 수정이 덮이면서였다. 언제나의 극도로 섬세하던 수정이 아닌 서툴고 날 된 수정이 그저 양만을 늘려 꾸역꾸역 몸 위를 덮고 감쌌다.
이델.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이름을 더듬었다. 네가 우는 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아니, 본 적이 있긴 했던가. 그가 제 우는 얼굴을 본 적 없는 만큼 그녀 또한 그의 우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별로 보지 않아도 좋았다. 지금 보고 싶진 않았다.
울지 마.
그 한 마디를 뱉지 못했다.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표정을 보며 괜찮아. 또 그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전장 깊숙이 오면 네가 위험한데. 네가 위험해도 지금은 지켜줄 수 없는데. ……물러나. 마지막으로 한 줄 떠오른, 그러나 마찬가지로 전하지 못한 문장과 함께 아인델은 의식의 실을 놓아버렸다.
*
「완치까지 대략 2개월 정도 예상합니다.」
대 크리처 전투가 있었다. 운석이 떨어진 이후로 갑작스레 급증한 크리처와 벌인 이제까지 없던 규모의 섬멸전이었다. 다친 이가 많았고 죽은 이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 아인델의 상태는 어떻게 보면 양호한 편에 속했다.
그녀의 과욕이었다. 눈앞에 그대로 두었으면 죽었을 동료 군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제 실로 잡아당겨 공격 앞에 대신 노출되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셋은 위험해. 둘까지만. 그 말이 단순히 데미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란 걸 몸으로 체감했다. 데미지를 회복하기도 전에 광기가 찾아왔다. 순식간에 다리가 무거워졌고 뇌가 녹아내릴 듯 오감이 어지러워졌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간신히 급소를 피한 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원한 사이에도 율릭에게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 본인은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전투가 지나가고 파트너를 잃은 센티넬과 가이드가 무수히 많았고 에인헤리 전반적으로 전력의 구멍이 커다란 상태였다. 우수한 가이드인 그를 파트너의 간병 같은 것으로 묶어두기엔 아까웠겠지.
그 겨울은 몹시 시리고 추웠다. 밤이 길었다. 오지 않는 새벽을 기다리며 아인델은 가끔 나쁜 상상에 잠겼다. 그 일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만 두지 못했다.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을까. 그와 이렇게 길게 떨어져 있던 것은.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네가 날 믿지 않았다가 영영 내 손을 못 잡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그 때에 네가 내 손을 안 잡아줄까 봐 걱정해.」
과거의 그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잡을 곳 없이 빈 손이 차갑게 식어간다.
널 믿어. 믿게 해줘. 아직 믿지 못했던 걸까. 믿지 못하는 건 네 앞에서 나약해지는 나인데. 의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네 곁을 떨어지는 쪽이 더 두려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밤이 길었다. 옆자리의 부재가 시리고 추웠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느슨해진 마음의 빗장 사이로 희고 찬 눈이 쌓였다. 어서 봄이 오기만을 바랐다.
*
“네가 준 스프레드가 바닥났어, 선데이.”
2인 1실의 병실이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같은 방어 센티넬로서 곧잘 전투에서 호흡을 맞추던 선데이 맥이 그녀의 병실메이트였다. 선데이의 부상은 심각했고 참담할 정도였다. 재기 불능. 당장 대원이 한 명이라도 아까운 에인헤리조차도 더는 복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제대를 권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가 제대를 거부했다. 낫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했다.
아인델은 입원 생활 동안 그런 선데이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고 그녀보다 조금 상태가 낫다는 이유로 그녀의 회복을 여러모로 도왔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재활 훈련을 위해서라도 찾아올 테지만 예전처럼 24시간 곁에 있어주진 못할 거야. 그래도, 기다리고 있어주렴.”
나도 널 기다릴 테니까. 네가 돌아오기를.
성역聖域. 그 놀라운 힘을 몇 번이나 보았다. 아인델에게 빛이란 가이드의 이미지였다. 그랬기에 꺼리는 것이기도 했다. 저 빛에 감싸여야만 하는 나는 어둠인가. 우리는 저 빛에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인가.
그런 이미지를 선데이가 바꿔주었다. 찬란한 빛, 사람들을 지키는 빛의 막, 성역. 센티넬의 힘. 빛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한 번도 표현한 적 없지만 아인델은 아주 조금 선데이의 능력을 동경했다.
그랬기에 더욱 그녀의 부활과 복귀를 바랐다. 너는 우리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야.
“또 티타임을 가져야지. 그러니 꼭 돌아와.”
*
퇴원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연락을 남길 이들이 많았다. 이제 퇴원했으니 또 한 잔 어울려주렴. 부대 복귀는 아직이지만, 내 머그컵은 잘 있니? 병문안 한 번 와주지 않고 서운하구나. 그 사이 또 사고를 쳤다지? 대단해라. 응, 모처럼 퇴원했으니 맛있는 걸 대접해주렴. 잔소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 않니. 축하만 해주어. 얼굴을 보고 또 우는 건 참아주렴.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상대는 오랜 소꿉친구였다.
“자니? 내 생각은 조금 했니.”
“뭐예요, 그거. 누구 흉내야.”
“어머, 누구의 흉내도 아닌 아인델인 것을.”
병문안도 잘 와주지 않던 소꿉친구를 향한 어리광이란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농담을 뱉자 수화음 너머로 한참 어이없는 듯한 숨소리만 들렸지. 가볍게 웃음을 그리다 르윈,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연락을 한 본론을 뱉었다.
“덕분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내게 실망했니?”
덧붙인 말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이어졌다. 정적은 짧았다. 상대의 목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내가 실망했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내가 속상해지지.”
변함없이 자기중심적인 말을 뱉는다. 그 말에 그는 뭐라 답했더라. 이제 퇴원했으니 곧 보러 갈게. 기다리고 있으렴. 어르는 목소리를 내자 기다리고 있을게요. 착한 아이처럼 돌아온 답에 칭찬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소한 잡담 몇 마디를 더 나누다 아인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그 자리로 복귀하지 못해.”
재활까지 길면 반년도 걸릴 거라 했다. 반 년, 그렇게 긴 시간을 옆을 비울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움직이지 못한다. 부재가 시렸다.
“율을 부탁해, 르윈.”
오랜 소꿉친구 두 사람이 임시 페어를 짰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조차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둘이 친했니? 반의 농담, 반의 진담을 섞어 물어보았을 땐 돌아오는 반응이 똑같아 응, 친한가보구나. 혼자 안심했다. 두 사람이 알았다면 대번에 부정할 생각이었다.
잘 아는 두 사람이라서 더욱 임시로라도 페어를 짜는 일은 걱정스러웠다. 둘 다 상대를 배려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파트너 가이드를 지킬 생각 없이 제 능력으로 활개를 치기만을 좋아하는 르윈, 제 손으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반기지 않는 율릭.
전혀 모르는 상대보다야 낫지만, 한 번 전투를 나갈 때면 제 몸을 아끼지 않고 너덜해져 돌아오던 모습까지 떠올리며 아인델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율에게도 널 부탁해두었으니, 무리하지 말고.”
또 눈 같은 곳을 다쳐오면 혼내줄 거란다.
*
집으로 돌아왔다. 2달 만에 돌아온 집은 한 점 온기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차고 쓸쓸한 곳이었던가. 꽃병은 텅 비어 있고 공기가 건조했다. 먼지가 쌓인 장식장을 손가락 끝으로 훑은 아인델은 창문을 열고 청소부터 시작했다. 10년 사이 갈고 닦은 솜씨가 빛을 발했다.
청소를 마치고 커피를 내렸다. 그가 자주 듣던 협주곡을 틀고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커피 향, 바이올린의 소리, 겨우 익숙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그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그가 없었다. 테이블 위로 주인 없는 커피잔만이 쓸쓸히 식어갔다.
「나는 반드시 네 곁에 있어.」
“어서 돌아와 줘. 율.”
의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또 한 번, 그 단어를 곱씹는다. 제 마음 위로 꽃이 뿌리를 내리듯 수많은 결정들이 파고들고 자라나 무게를 주었다. 약해졌는지도 몰랐다. 이래서는 실망시키는 게 아닐까. 그건 조금, 무서운데. 무릎 위로 느릿하게 턱을 얹었다. 깜빡이던 눈동자가 서서히 감겼다.
감겨드는 눈꺼풀 아래로 망막에 새겨진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눈물로 젖어 일그러진, 공포로 물들었던 얼굴. 그런 표정 짓지 마. 아니, 그런 표정을 짓게 해서 미안해. 이쪽이 옳다.
센티넬이란 불편하다. 그녀는 그의 존재만으로 안정을 찾는데 그에게 돌려줄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하면 네가 안심할까. 무엇으로 네 불안을 잠재워줄 수 있을까. 내가 네게 무엇을 받고 느끼는지 네게도 같은 것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센티넬이란 불편하다. 가이드에게 받는 것 외에 할 수가 없다. 일방향의 힘, 일방향의 영향력. 나도 네게 주고 싶은데. 소파가 허전할 만큼 컸다. 이렇게 넓었던가. 언제 열릴지 모를 문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고치처럼 몸을 말고 아인델은 차츰차츰 수마에 잠겼다. 어서 돌아와, 율. 안아줘. 안아줄게.
봄여름가을겨울 4개나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주절주절 풀다 보니까
겨울 로그 꽤 좋아하는데 이 때 썼던 '고치'란 표현이 후반 러닝에서 또 쓰일 줄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