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모두 끝났다면, 더 이루어야 할 일이 없다면. ……내게 주어진 이 두 번째 시간은 온전히 네게 쓰고 싶어.
더 이상 누구에게도 나누지 않고 전부를, 나를 바라고 원해준 네게.
가져줄 거니? 내 전부.
그건 꼭 고백처럼 들리는 걸.
어서 와, 이델. 내 욕망.
* * *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지나칠 만큼 아무것도. 완벽주의자에 결벽적인 그의 성격을 드러내듯 무엇 하나 자기 자리를 잃은 곳 없는 그 공간은 그럼에도 기묘하게 ‘집’이란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던 온기가 서린 집(Home)보다는 차라리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무미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만을 선명히 알려주었다. 기억하고 보존하기. 지키며 그리기. 집이 집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그녀의 탓이었다. 어쩌지, 이델.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는데. 제 눈치를 살피며 들려오는 말에 아인델은 그저 그의 수척해진 뺨을 어루만지고 말았다. 그럼 내일은 장을 보러 나가자. 당연히 내일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목걸이를 돌려받는 것이었다. 내가 이걸 돌려받아도 될까? 그 자격이 내게 있을까? 머뭇거리는 그녀를 두고 율릭은 망설임 없이 백은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걷으며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이건 네 거야, 이델.”
반으로 잘린 면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 끝이 그 표면을 쓸다가 꾹 움켜쥐었다. 그를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조금 실감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 있고 네가 여기에 있다는.
홀로그램으로나마 존재하던 것도 끝이 나고 모두가 떠난 뒤 아인델은 긴 시간 부유했다. 현실의 한 달이 흐르는 사이 그녀는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1년을 보내기도 했다. 붙잡아줄 시공간이 없는 감각은 몹시 어지러웠다. 죽음 뒤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다는 것만 깨달으며 무료하고 공허하게 그저 ‘존재’했다.
그 사이에 때때로 현실의 흐름과 우연히 같은 흐름을 탈 때면 제 죽음 뒤에 찾아온 것들을 지켜보았다. 장례식, 남겨진 이들, 격동, 변화.
세상은 놀랍게도, 그녀 한 사람의 부재가 아무렇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그 당연한 것에 아인델은 조금 맥이 풀렸다. 제 고집도 노력도 전부 자기만족에 불과하단 것을 알고 있었다. 억울한 기분 같은 걸 느낀 건 아니다. 다만 그저 맥이 풀릴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 손을 잡고 도망칠걸 그랬지, 율.
그 바람을 누군가 들어주기라도 한 것일까. 이렇게 다시금 그의 앞에 아인델은 실체를 갖고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목걸이가 손바닥 안에서 온기를 머금고 뜨거웠다. 생을 부여받은 증거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 두 번째 시간을,
하나의 욕망이 끝났다. 그리고 다음 욕망이 생겼다.
* * *
잠에서 깨어나면 당연히 그가 있었다. 허리에 감긴 팔은 늘 단단히 얽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조금 꼼지락거린 것만으로 그 또한 잠에서 깨어나 저를 더 깊이 당겨 안았다. 가지 마, 이델.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팔과 함께 그녀를 단단히 옭아맸다. 바싹 당겨 몸이 겹쳐질 때마다 그가 고동을 확인하는 걸 알았다. 아직도 잠에서 깨면 네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아. 너 없는 밤을 보낸 게 자그마치 한 달이야, 이델. 다시 한 달은 네가 있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안 돼. 한 달로는 부족할지도 몰라.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감정이 묻어났다. 정말 제가 어디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애착을 갖고 붙어오는 체온에 아인델은 얌전히 몸의 힘을 풀었다. 아무 데도 안 가. 네 곁에 있어. 놓지 않아. 그러나 백 마디의 대답으로도 부족하겠지. 신뢰는 말로 이루는 것이 아닌걸. 그러니 네가 정말로 안심할 때까지, 네가 만족할 때까지, 네 바람이 다할 때까지 응. 여기 있어.
“정말 부모님께도 인사 안 드릴 거야?”
“죽었다 살아난 걸 어떻게 설명 드릴까?”
그건, 하고 끄응 앓는 소리가 머리 위로 흘렀다. 좋은 방법이 떠오르거든 말해주렴. 심술궂게 덧붙이며 아인델은 펜을 들어 첫 마디를 적었다. 「이 편지는 행운의 편지나 스팸이 아닌 것을 먼저 알리며……」 편지봉투에는 귀엽게 부활절 달걀 스티커를 붙였다. 그거 정말 웃지 못 할 유머인 거 알지, 이델? 스티커를 압수하고 싶은지 전전긍긍한 눈을 하는 파트너는 무시했다. 지금 적고 있는 것은 그녀의 생일 초대장이었다. 초대장을 받을 대상은 에인헤리 7소대 부대원들. 딱 거기까지만 알릴 셈이었다.
비 내리던 그 밤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거짓말처럼 맑기만 한 일주일이었다. 그 사이 아인델은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나갔다가 괜히 얼굴을 보여 소란이 일어나는 것도 사양하고 싶었고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사회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굳이 이 사회에서 산 사람으로 인정받지 않아도 좋았다. 그럴 필요성도 가치도 찾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자리는 거기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가 아인델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어디에 속할지 어디에 머물지 전부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기색을 살피듯 눈을 굴리는 그에게 손을 뻗는다. 손등으로 굳은 뺨을 가볍게 누르다 쓸어 올리며 아인델은 작게 웃었다.
“나중에. 필요해지면 그 때.”
율, 너는 좀 더 날 욕심내는 연습이 필요해. 벌써 나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그 목소리가 꽤나 짓궂게 나왔음을 안다. 유혹하는 것도 같았고 도발하는 것도 같았다. 어느 것도 맞았다. 멈칫하고 복잡한 표정이 되는 그를 두고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는다. 그가 익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많았다. 준비된 시간 또한 많았다. 서두를 것 없었다.
* * *
창밖으로 빗소리가 타닥타닥 들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두 사람의 집안은 빗소리만이 내려앉도록 고요해졌다. 평소 같으면 조용한 집안을 클래식으로 채우곤 했지만 비가 오는 날은 예외였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창틀로 튀는 빗방울, 쏴아아── 부드럽게 흙을 적시고 스며드는 빗줄기, 습한 냄새,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 질릴 줄 모르는 창밖의 경치를 위해 커튼을 걷어두고 아인델은 율릭의 품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두 다리를 세워 모으고 그의 팔을 어깨 위로 걸친다. 그렇게 해서 타고 내려온 손에 제 손을 얽고 느슨하게 머리를 기대면 두근, 두근하고 규칙적인 박동이 들렸다. 빗줄기로 인해 공기마저 눅눅하게 가라앉은 덕인지 품안으로 그의 냄새가 짙었다. 빈 곳 없이 그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안정된 호흡은 곧 잠들 듯 느긋하게 오르내렸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지루하진 않니?”
“지루해, 이델?”
“질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너랑 있는 시간이 지루할 리 없잖아.”
너는 늘 흠 잡을 곳 없는 답을 해오지. 가끔은 내가 좋아할 답을 위해 네 답을 포기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한참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다 문득 몸을 틀었다. 시선을 살짝 올리는 것만으로 그의 눈동자가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마주하는 시선이 가볍게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뭐 잘못했어? 그렇게 묻기라도 하듯.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아인델은 종종 고민했다. 내가 네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니? 꼭 혼내기라도 할 것처럼 제 발 저린 반응을 보이는구나. 그게 아닌데. 작은 손바닥이 그의 뺨을 덮었다. 커피색의 피부 위를 엄지로 문대듯 누르면 마른 뺨이 당겨져 웃는 얼굴을 그렸다. 제 손길을 따라 그가 어설프게 웃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웃음이 나는 건 제쪽이었다. 키득거림과 함께 가만히 입술을 내렸다. 왼뺨에 한 번, 오른뺨에 한 번. 살며시 닿았다 떨어지는 마찰음이 두 사람 사이로 짧게 지났다.
고개를 떼어내자 그가 숨을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할 말을 찾는지 그가 한참을 입만 뻥끗였다.
“화난 거, 아니었어?”
“내가 화날 만한 짓을 했니?”
그건 아닌데. 아니지만. 등으로 둘러진 큰 손은 쥐락펴락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침착하지 못한 반응에 아인델은 턱을 기울였다. 진정하란 듯 옳지, 속삭이며 빠르게 깜빡이는 눈꺼풀 위로 한 번 더 귀엽게 쪽 소리를 남기면 그게 도리어 역효과였던 듯하다. 뺨에 열이 오른 게 선명했다. 부름에 눈을 맞추면 여전히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이윽고 질끈 감겼다 떠올랐다. 있잖아, 이델.
“……정말 다 가져도 돼?”
신중하게 내뱉어진 그 말에 불쑥 떠오른 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
・
・
・
「율, 나는 네 것이니?」
「──내 것이 되어줄 생각도 없으면서 물어보지 마.」
참담하던 표정, 질끈 감으려다가도 다 감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마주해오던 눈동자. 어째서 그렇게 고통스런 표정인 걸까. 나는 네게 다 줄 생각이었는데.
───진심으로?
기꺼이 네 것이 되어주려 했다. 네 손 안에 붙잡히려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말뿐이었을 것이다. 이럴 땐 나보다 네가 더 나를 잘 안다. 네 것이 되기에 이미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 날에 네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네 전부를 주면 네게 전부를 줄게. 입버릇이었다. 그녀를 앞에 두고 저울질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잘난 듯 뱉던 말이기도 했다. 나를 갖고 싶으면 네 전부를 걸어 각오를 보여.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 반대편에 자신을 올린 것은 저울의 무게를 동등하게 하기 위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울 위에 올린 ‘아인델’에는 진심이 빠져 있었다.
나는 정말 누군가의 것이 되려 했을까? 아니었지. 고집스럽게도 나는 나의 것이었고 동시에 모두의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나는 너를 갖고 있었어. 율, 나의 율. 어째서 너는 내게 너를 주었을까. 왜 가장 처음부터네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준비해두었을까.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나를 나누길 그만 두고 너의 것이 되려고 한다. 네게 전부를 주려 한다.
답을 기다리는 초조한 시선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의 두 뺨을 감싸 쥐고 코끝이 맞닿을 거리만큼 얼굴을 가까이 했다. 긴장이 목울대를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답하는 대신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그의 눈이 꼭 어린 시절 그 때로 돌아가듯 커다랗게 뜨이는 것을 보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얇은 입술 위로 맥박이 두근거렸다. 굳게 다물렸다 아연히 열린 틈으로 호흡을 섞고 그를 맛보았다. 쓰고 단 맛이 거기에 있었다. 혀끝에 고이는 맛이 욕망을 부채질한다. 알고 있니? 네게만 욕심쟁이가 되는 내가 있단다. 한 번의 긴 숨을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떼어냈다. 샛노란 눈동자가 열을 품고 이지러지듯 휘었다.
“정말 다. 네가 여전히 날 바라고 원한다면. 더는 고결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고 높은 곳에 있길 욕망하지 않고 수많은 지키려던 것의 책임에서 벗어나 오직 너만의 작은 이델이 되어도, 너의 이상과 동경에 맞지 않는 내가 되어도.”